틀어짐을 여백으로
아일라의 바람은 종종 성격이 또렷하다.
그날은 특히 그랬다. 비까지 합세해 텐트 생각을 단번에 접게 만들 만큼 거세게 밀어붙였다.
짜증이 올라왔지만 입술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딱히 짜증 낼 이유가 없었다.
짜증을 내서 비가 그친다면야 두 말 않고 내겠지만...
오늘은 버스를 타고 섬의 중심 마을에 있는 보모어 증류소로 이동했다.
비가 오는 날 이곳에 버스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그리고 방문한 보모어 증류소.
으슬으슬하던 것이 증류소에 들어서자마자 코끝부터 풀린다.
보모어 증류소는
1779년에 설립된 아일라에서 가장 오래 가동 중인 증류소로 알려져 있다.
해변 마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고, 물은 라건 강(River Laggan)을 쓰고 있으며
균형 잡힌 스모크와 바다의 짭조름함, 은은한 과일·꽃 향이 어우러진 ‘밸런스형 아일라’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래서 아일라 입문자는 물론 애호가들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매력적인 위스키다.
Bar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바다로 이어진다.
따뜻한 실내에서 바다를 바라보자니 거센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와 세찬 비가 어쩐지 멀게 느껴진다.
한잔씩 시음을 했다.
알고 있던 것처럼 스모크가 진하지 않고 밸런스가 좋아서 마시기 편했다.
따뜻함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오늘의 따뜻함은 액체의 온도에서만으로 전해진 것이 아닌
편안했던 이동, 이 공간의 향, 안심하는 마음 때문에 더 깊이 전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위스키로 녹인 몸을 다시 버스에 태우고 포트 샬롯으로 향했다.
도저히 오늘은 캠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예약한 포트 샬롯 유스호스텔!
이곳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훨씬 깨끗하고 훨씬 편안했다.
깔끔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방과 뜨거운 물에 깨끗하기까지 한 샤워장, 넓고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진 주방, 따뜻하고 아늑한 라운지 그리고 너무 친절하고 상냥했던 호스트 부부까지...
계속 캠핑만 했던 우리에게 이곳은 너무도 완벽한 숙소였다.
여행에서의 안도는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젖은 양말을 갈아 신고 따뜻한 물로 컵을 채울 수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하다.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근처를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흰 집들이 줄지어 바닷가를 따라 서 있고 사람들이 없는 거리는 빗소리와 파도소리로 가득했고 살짝 쓸쓸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가운데가 고요해진다.
우산은 쓰나 마나에 날씨가 안 좋아서 다른 곳을 가기도 어려워 세웠던 모든 계획이 틀어진 오늘
불평불만을 하기에 너무도 딱인 날!
그러기엔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친다.
몇 달 동안 여행을 하며 여행이 가르쳐 준 가장 큰 배움은
계획은 그저 방향일 뿐이라는 것.
버스가 멈추고, 배가 연착되고, 길을 잘못 들고, 예상치 못하게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던 날들.
버스가 멈추면 바꿔 타고 배가 연착되면 기다리고, 다른 길로 왔다면 돌아가고 비가 오면 젖지 않는 길을, 젖으면 따뜻하게 씻을 수 있는 숙소를 고르면 된다.
우리는 참 많은 선택을 해야 하고
처음 가는 길은 늘 낯설고 어렵다.
지도는 방향을 알려주지만 목적지는 가봐야 알고 속도는 걸어봐야 안다.
'왜' 보다는
'그럼'으로
그 선택이 다시 마음을 데워주었다.
내일도 비가 온다는데...
그건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도 하다.
지금은 따뜻한 이곳에서 위스키를 즐겨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