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숫자가 아니라 밀도
구름이 잔뜩 낀 아침,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늘의 목적지는 라가불린 증류소!
어제 방문했던 라프로익에서 30분 정도 더 걸으면 라가불린을 만날 수 있다.
오늘은 호텔에 배낭을 맡기고 걷는다.
몸이 이렇게나 가벼울 수가... 바닷바람과 함께 나도 날아가는 것 같았다.
바다 냄새와 스모크가 코끝을 찌른다.
19세기 초(1816)에 문을 연 라가불린은 아일라 남해안의 만(灣)의 흰 건물과 긴 창고가 인상적인 증류소다.
부드러우면서 깊고 너른 스모크, 밸런스가 너무 좋은 피트가 특징이다.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났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라가불린 중류소도 라프로익 증류소와 마찬가지로 바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내가 이곳에 와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말이지... 미친 풍경이다.
안으로 들어가 라가불린의 여러 위스키와 굿즈등을 구경했다.
뚜벅이 여행자라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계속하며 자연스레 들었던 굿즈들을 내려놓는다.
시간이 되어 신청한 투어에 참가했다.
오늘 투어는 웨어하우스 시음이다.
젊은 가이드가 특유의 경쾌한 템포로 우리를 창고 안으로 이끌었다.
우와... 공기 속에 가득한 위스키향에 나도 모르게 턱을 들고 숨을 들이마셨다.
시음은 오크통에서 바로 꺼내 마시는 방식인데
오크통에 장치를 꽂아 입으로 위스키를 끌어올려 병에 담고 다시 잔으로 옮겨 시음한다.
가이드가 시범을 보인 후 참가자도 해볼 수 있어서 남편도 도전해 본다.
양손으로 장치를 잡고 입으로 한 번에 쭉— 빨아올리는 게 쉽지 않은가 보다.
남편이 꺼낸 위스키는 내 감정까지 들어가서 그런지
입에 머금으면 유난히 부드럽게 번지고, 끝맛은 길고 달콤하게 남았다.
오늘 마신 라가불린 위스키는 너무 다정하다.
이렇게 라가불린에 한 번 더 빠져버렸다.
요새 너무 빠지네...
라가불린 이야기에 종종 따라붙는 이름이 있다.
배우 조니 뎁.
그는 금주기간에 향이라도 맡겠다며 라가불린 16년을 주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 모금의 맛을 넘어서 향 그 자체가 주는 위로와 기쁨을 나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늘 투어엔 우리를 포함해서 총 6명이 참가했다.
우리처럼 온 부부 한 팀, 마음 맞는 친구 둘이 함께였다.
서로의 표정을 슬쩍 읽고 맛을 권하고 가끔은 말없이 미소만 나누는 모습이 참 좋다.
나이가 들수록 관계가 서서히 정리되는 걸 느꼈다.
처음엔 불안했고 서운했다.
붙잡을수록 내가 더 지치고 상처받는 걸 알면서도 쉽게 놓지 못했다.
딱 한 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거리를 두기 시작하니 그 빈자리가 곧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에 ‘평생 함께할 사람’과 ‘여기까지의 사람’이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말 끝마다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오래 연락 못해도 다시 만나면 바로 이어지는 사람,
그 몇 명이면 충분하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주변을 정비하니 삶이 가벼워지고 선명해졌다.
나는 나를 더 탄탄하게, 더 건강하게, 더 심플하게 가꾸는 법을 배웠다.
결국 이 시간은 관계를 버린 시간이 아니라
나를 돌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관계는 숫자가 아니라 밀도인 것 같다.
모든 인연을 애써 붙잡아 둘 필요는 없고 때로는 조용히 흘려보내는 용기가 서로를 더 편안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위스키 테이스팅처럼 잔을 가득 늘어놓기보다 오늘의 취향에 맞는 몇 잔에 집중하면 풍미가 더 또렷해지듯이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최고의 베스트프렌드 남편이 있다.
함께 걸으면 길이 덜 춥고 같은 잔을 나눠도 서로 다른 향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
우정도 사랑도 결국 시간의 숙성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천천히, 깊게, 그리고 가볍게 웃으면서.
잔을 줄이면 향이 선명해지듯, 인연을 비워낼수록 남은 사람의 온기가 더 또렷해질 것이다.
덜 갖는 용기가 결국 더 깊이 사랑할 힘을 만들어 줄 것이다.
창고의 어둠과 오크 향, 바다의 바람이 뒤섞인 오늘의 공기를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라가불린은 '강렬함'을 말하지만, 나에게는 '다정함'으로 남은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