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바닷바람 따라, 라프로익과의 첫 만남

취향에 정담은 없다

by 마여사

걸어서, 라프로익까지

아일라에 도착한 다음 날

숙소를 따로 잡지 않았던 우리는 배낭을 그대로 멨다.

10kg이 훌쩍 넘는 짐이 어깨를 눌렀지만 목표는 단순했다.

라프로익(Laphroaig)까지 걸어가기!


바람은 짭조름했고 공기엔 피트 냄새가 가득했다.

코밑에 무언가를 발라놓은 것처럼 걷는 내내 피트향이 느껴졌다. 온몸으로...



지도에선 도보 30분이라지만 10kg의 배낭을 멘 우리 걸음은 여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쉬엄쉬엄 어느 정도 걸었을까.

지도 속 글자가 실제 표지판으로 등장하는 순간 심장이 먼저 속도를 올렸다. 바다가 바로 앞이었다!
오늘의 목표는 단 하나.

라프로익



기대 이상의 방문자 센터 & 바

아직 오픈 전이라 바닷가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파도 소리가 낮게 깔리고 공기엔 오크와 바다냄새가 겹쳐졌다.

아니 어떻게 바다 바로 앞에 증류소가 있지?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지?

우리는 감탄하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드디어 오픈시간

라프로익의 방문자 센터와 바는 정말 잘 되어있었다.

우리의 무거운 배낭을 놓을 수 있는 자리를 안내해 주었고 그 배려 하나로 어깨가 가벼워졌다.



숍은 위스키 병과 굿즈 디스플레이가 깔끔했고 동선도 편안했다.

사고 싶은 굿즈들이 너무 많아 한참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데 남편이 슬쩍 나를 Bar 쪽으로 끌고 갔다.

잘했어, 남편!



들어간 Bar에는 커피와 차를 무료로 제공하는 셀프바가 있었다.

살짝 추웠던 나는 우선 셀프 바에서 커피를 하나 채워 들고 창가에 앉았다.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니 바닷바람으로 식은 몸이 금세 녹아들었다.

'오길 잘했다.' 커피 한 모금에 그 생각이 들었다.


<라프로익 증류소>

위치: 아일라 남쪽, 바다 바로 앞

설립: 1815년, 존스턴(Johnston) 가문 → 현재 Beam Suntory 소속

물: 킬브라이드 스트림(Kilbride Stream)

맥아: 아일라에서도 드문 자체 플로어 몰팅(필요량 일부 직접 생산)

피트: 아일라 산 피트를 태운 연기로 맥아를 건조 → 요오드·해조·약초 같은 ‘의료용’ 뉘앙스가 시그니처

숙성: 버번 캐스크 중심. Quarter Cask, Triple Wood 등 캐스크 피니시로 구조감 업

인상: 짭조름한 해안 공기와 헤비 피트 스모크—‘아일라다운’ 교과서 같은 첫인상


새로운 내 취향 발견의 날

위에 쓴 글들을 보면 라프로익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라프로익을 이날 처음 마셔봤다.


내 피트 입문은 탈리스커였다.

대형마트에서 행사상품으로 많이 보이길래 구입을 했는데...

내 코엔 정말이지 너무 소독약이었다. 아니 그냥 소독약이었다.

결과는 대실패... 마시는 건 둘째치고 냄새만 맡는 것도 어려웠다.

'피트 위스키를 왜 마시는 거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오늘

라프로익 한 모금에 나는 피트 위스키에 바로 빠져버렸다.
내가 느낀 라프로익의 피트는 직설적이었지만 이상하게 ‘달콤’했다.

소독약 냄새가 나지만 그 소독약은 아니다.

내가 표현은 서툴지만 굳이 비유해 보자면 달달한 아이스크림에 피트를 한 스푼 섞은 느낌?

진하고 솔직한 스모크 위로 단맛이 매끈하게 올라왔다.

'어라? 내 스타일이야!'

창밖으론 파도 안쪽에선 진한 피트 향 그리고 눈을 뜬 라프로익의 맛

취향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

누군가 “탈리스커 맛있어”라고 하면

나는 속으로 '어떻게 피트 위스키를 좋아하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라프로익 위스키 향을 코끝에 올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니 ‘소독약’이라던 그 언어가

'바다·약초·요오드', '스모크' 같은 새로운 어휘로 바뀌었다.

내 혀에선 ‘직설적인 피트’가 ‘부드러운 단맛’과 겹쳐지더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그 피트 위스키가

맛있게 느껴졌다.


정답은 없다.

내가 탈리스커가 안 맞듯이 어떤 사람은 라프로익이 별로라고 할지도 모른다.

취향은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라 들어보고 이해하는 문제였다.


오늘 한 모금이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내 취향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 주었다.


바다와 커피 사이, 잠깐의 온기

테이스팅 사이사이 따뜻한 커피가 큰 역할을 했다.

바깥의 차가운 바람, 실내의 피트 위스키 향, 손끝의 머그컵 온기는 부드럽게 내 긴장을 풀어주었다.
선물로 받은 라프로익 10년 미니, 드라이브 키트, 구입한 라프로익 치즈까지 느긋한 오전이 완성됐다.



정오가 지나고 우리는 다시 배낭을 멨다.

'또 와야지!'



오늘의 라프로익


처음 만났는데 오래 알고 지낸 취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