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강을 뒤로하고, 바다가 있는 아일라섬으로

지도는 방향을 주고, 속도는 걸어보며 안다

by 마여사

스페이사이드의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마지막으로 깊게 들이마셨다.

며칠을 함께 걷던 붉은 강과 푸른 숲을 등지고, 우리는 서쪽 끝 바다의 섬 아일라(Islay)로 향했다.

위스키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섬.

바다의 소금기와 피트 연기가 스며든 잔이 기다리는 곳.


스페이사이드 캠핑장을 떠나는 날


예상치 못한 정차, 길어진 기다림

글래스고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른 아침 버스로 케나크리(Kennacraig) 선착장으로 향했다.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스코틀랜드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여행이 늘 그렇듯 모든 길이 평화롭고 순탄한 건 아니었다.


멈춘 버스안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멈췄다!

버스에서 내렸다가 다시 탄 기사님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오늘 여정에 '예상치 못한 정차'가 추가되었다.


우리는 길가에서 대체된 다른 버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따라 바닷가에 바람이 거세서 페리 운항이 평소와 달랐다는 것이다!

하루 여러 번 있던 페리가 그날은 점심 한 번, 저녁 한 번 뿐이었는데...

우리는 결국 점심 배를 놓쳤다...


배가 떠난 선착장과 곧 많은 사람들로 붐비게 되는 대합실


저녁 배이자 오늘 마지막 배까지 여섯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오늘 여정에 '6시간의 기다림'이 추가되었다.


대합실 한쪽 벽 콘센트에 휴대폰 충전기를 꽂았다.

휴대폰 배터리가 한 칸씩 차오르듯 마음도 한 칸씩 가라앉았다.


기다림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걸 그날 알았다.

어제까지의 나는 ‘언제 끝나나’, '언제 가나' 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는 기다림이었고,

그날의 나는 ‘지금 여기’를 천천히 받아들이는 기다림이었다.

계획이 틀어져도 우리가 이 섬으로 들어가게 되리란 사실만은 변함없다는 확신 덕분이었을까...

초조함은 조용히 가라앉았고 시간은 잘도 흘렀다.



처음 가는 길인데, 어떻게 미리 알겠나

나는 계획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 방학이 시작되기 전, 학교에서 방학 계획표를 그리게 했다.

하얀 도화지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고 24시간으로 나눈 뒤, 아침 기상부터 점심시간, 숙제, 독서, 저녁 루틴까지 색연필로 정성껏 채워 넣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오늘을 계획대로 살아내겠다'는 마음이 단단했는지 계획표에 맞춰 생활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물론 매일같이 다 지킨 건 아니지만...

그때의 습관은 어른이 된 지금도 어딘가 남아 있어, 계획이 틀어지거나 변수가 생기면 마음부터 먼저 흔들린다.

하지만 바람의 세기, 배의 시간, 길의 돌발은 계획의 바깥에서 온다.

해보지 않고는 가보지 않고는 모른다.

그걸 여행을 하면서 깨닫고 있었다.


처음 가는 길은 늘 그런 것 같다.

지도는 방향을 주지만, 길의 속도는 걸어보아야 안다.

오늘의 기다림은 그 사실을 다시 가르쳐 주었다.

‘틀어졌다’가 아니라 ‘여백이 생겼다’고 이름을 바꿔 붙여보면 어떨까.

기다리는 동안 그 여백 안으로 바다 냄새와 느긋한 호흡이 들어올 것이다.

내가 사랑하던 계획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표의 바깥에서 불쑥 찾아오는 변수들 역시 내 하루를 다르게 빛내는 방법이라는 걸 이 여행길에서 배우는 중이다.



포트 엘런에 닿는 시간

해가 기울 무렵, 저 멀리서 하얀 배가 들어왔다.

드디어 승선. 차와 사람이 순서대로 실렸다.



바다가 열리자 짭조름한 냄새가 확 끼쳐왔다.

잔에 닿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아일라의 향을 맡고 있었다.
파도는 생각보다 잔잔했고, 나는 잠깐 졸았다.

남편이 깨웠을 땐 창밖에 포트 엘런(Port Ellen) 선착장이 보였다.

'왔구나!' 작게, 그러나 또렷하게 맘속으로 환호했다.


잔잔한 물결에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저기 포트 엘런이 보였다


위스키의 섬, 내일의 첫 잔

아일라는 스코틀랜드 서쪽의 작은 섬이지만 전 세계 위스키 지도를 그릴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라프로익, 라가불린, 아드벡 같은 전설적인 증류소들이 자리하고,

각각의 위스키는 섬의 바다, 바람, 토양, 피트가 만든 독특한 향을 품고 있다.


<아일라 10개 증류소>

이곳에는 정식 허가받은 증류소는 9곳과 Port Ellen의 재가동을 앞둔 1곳을 포함하면 총 10곳의 증류소가 있다.



Laphroaig 라프로익 · 바다 짠내·요오드, 아일라 위스키 그 자체

Lagavulin 라가불린 · 깊고 느린 스모크, 묵직한 우아함

Ardbeg 아드벡 · 강력하고 거친 스모크

Bowmore 보우모어 · 부드럽고 균형 잡힌 스모크

Bruichladdich 브룩라딕 · 피트의 끝판왕

Bunnahabhain 부나하벤 · 피트향 없이도 아일라 특유의 맛이 느껴짐

Caol Ila 쿨일라 · 산들한 스모크와 허브·꽃 향의 조화로움

Kilchoman 킬호만 · 농장 증류소, 곡물의 결이 살아있는 위스키

Ardnahoe 아드나호 · 신예의 또렷한 피트와 깨끗한 질감, 전망 맛집 증류소

Port Ellen 포트 엘런 · 전설의 재가동, 이름 자체가 스토리


지도에 핀을 하나씩 표시를 하다 보면, 섬이 마치 ‘위스키 보물찾기 판’처럼 보인다.

바람이 불면 바다가 먼저 흔들리고, 그다음 잔속 향이 미세하게 흔들리겠지.


내일의 첫 잔을 기다리며

기다림이 길었던 오늘, 하지만 생각보다 친절했다.


오후9시 해가 지고 있는 아일라섬


해보지 않은 일,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두려움이 먼저 손을 잡는다.

사람 마음은 원래 익숙한 길에서 편해지고 자꾸만 어제의 방법을 오늘에도 복사하고 싶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익숙함에도 처음이 있었다.

처음 걸음은 늘 서툴렀고 길은 걸어야 길이 되었다.

낯섦이 조금씩 익숙함으로 번지는 동안 우리는 배웠고 자랐다.


후회에도 종류가 있다.

하지 않아서 남는 후회는 오래, 깊게 남지만 해보고 남는 후회는 다음 선택의 지도가 된다.

넘어지더라도 방향을 얻고 틀리더라도 문장을 하나 더 배우게 된다.

그래서 완벽한 확신 대신 작은 호기심을 들고 나선다.

오늘의 불안은 내일의 문장이 되고, 오늘의 낯섦은 모레의 익숙함이 된다.

어차피 한 번뿐인 길이라면, 해보지 않고 남길 아쉬움보다 해보고 남길 배움을 선택하고 싶다.


내일의 첫 잔 앞에서 나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