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없이도 완성되는 우리 이야기
비가 그친 다음 날, 하늘은 유리처럼 맑고 공기는 산뜻하게 차가웠다.
습기 하나 없는 선선한 바람이 바람막이를 입고서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주 2회 하루 한 번만 달리는 버스를 맞춰 타고 10시 오픈시간에 맞춰 카듀증류소로 향했다.
손님이 우리 둘 뿐인 버스는 조용히 언덕을 넘어갔다.
증류소에 도착하자마자 입구 언덕 위에서 빨간 깃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증류소 카듀(Cardhu)는
1824년에 남편 존과 함께 은밀하게 위스키를 빚던 헬렌 커밍(Helen Cumming)이 마음을 담아 만든 곳이다.
헬렌 커밍은 불법 증류 단속을 피해 빨간 깃발을 올려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빨간 깃발이 보이면 이웃 증류업자들은 작업을 멈추고 술을 숨길 수 있었다.
그 깃발이 지금은 카듀의 자부심과 전통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깃발이 있는 언덕에서 사진도 찍고 간단한 아침 식사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오픈시간이 되었다.
첫 번째 손님으로 방문자 센터 문을 연다.
문을 열자마자 코끝으로 느껴지는 은은한 오크 향...
위스키의 향은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위스키병들과 굿즈들! 사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배낭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참 좋은 핑계를 대며 나를 다독인다.
그리고 시음 테이블에 앉았다.
진한 색의 위스키와 연한 색의 위스키,
배도 고팠기에 수프 세트도 하나 주문했다.
살짝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수프는 손끝부터 속까지 천천히 데워주었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뒤이어 위스키를 마셔본다.
첫 번째 위스키는 꿀처럼 부드러운 향과 과일 향이 싱그럽다.
끝 맛에는 은근한 오크 향이 살짝 남아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목 넘김이 좋은 위스키다.
두 번째 위스키는 조금 더 묵직한 숙성 버전이었는데, 은은한 매움과 달콤함이 번갈아 오는데 마실 때마다 다르다.
나는 여전히 복잡한 테이스팅 노트를 적을 순 없지만,
‘부드럽고, 기분이 좋아지는 맛, 맛있는 맛’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우리는 10년 차 아이 없이 사는 부부다.
한때는 자식이 필요한지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다.
'자식이 필요한지?'
우리에게 필요해서 자식을 만든다?
이 질문부터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태어나서 자라고 커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누군가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 보기로 했다.
'아이를 가져야 하니?'가 아니라
'아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한 인간으로 잘 키울 수 있을까?'
'아이 없이 산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아끼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나도 아직 덜 컸는데...
나에게 쏟고 있는 이 시간들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오래 이야기했고 몇 번은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정자, 난자 냉동까지 생각하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의 사정, 일과 소득, 팬데믹이 남긴 흔적까지
여러 겹의 현실을 지나 결국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자!'는 결론에 닿았다.
우리에게는 둘이 충분하다!
(물론 아이가 주는 기쁨과 행복의 우주는 죽을 때까지 느껴보지도 알 수도 없겠지만...)
우리는 친구들의 탄생 소식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아이 사진을 보며 웃는다.
다만 우리의 집은 두 개의 머그컵, 두 장의 기차표, 두 사람이 나눠드는 한 잔으로도
충분히 따뜻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속도와 마음을 잘 모른다.
결혼 안 하면 결혼하라 하고, 결혼하면 첫째, 첫째 낳으면 둘째...
누군 우릴 이기적이라 불렀고, 어떤 친척은 죄인 취급을 했다.
그 말들이 우리 마음을 오래 긁어놓았다.
특히 우리 집 외가 쪽의 재촉과 질타, 자기들 맘대로의 판단과 결론은 만날 때마다 가슴이 쿡쿡 아렸다.
결국 우리는 그 만남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선택이 쉽진 않았지만 우리에게도 경계와 회복이 필요했다.
우리 삶의 방향키는 우리 손에 있다.
가족은 숫자가 아니라 온도이고, 완성은 형태가 아니라 서로를 끝까지 돌보려는 마음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두 사람의 시간을 정성껏 산다.
걷고, 보고, 요리하고, 대화하고, 쉬고, 다시 웃는다.
아이 없이도 완성되는 우리 이야기는 이 방식으로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다.
누구의 삶도 한 가지 답으로 재단되지 않으며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깃발을 든다.
'아이 없이도 완성되는 둘의 이야기'라고
가끔은 빡빡한 사회의 눈치를 무시해야 하지만,
우리는 매일의 작고 단단한 행복으로 우리의 집을 세워간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의 방식으로 행복해지자.'
위스키 향이 길게 남았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아이 없이도 충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