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흐트러져도 괜찮았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예전 같으면 '오늘 약속은 취소...'였을 텐데, 여긴 집이 아니고 우리는 위스키를 만나러 온 여행자였다.
고어텍스에 스패츠, 작은 우산까지 단단히 챙기고 길 위에 섰다.
첫 목적지는 글랜그란트(Glengrant) 증류소
1840년, 그랜트 형제가 세운 스페이사이드의 고전.
길고 슬림한 스틸이 만들어내는 맑고 산뜻한 과일향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공사 중... 바도, 투어도 문이 닫혀 있었다.
작은 샵만 둘러보고 돌아서는데, 이상하게도 아쉬움이 오래 남지 않았다.
바로 옆 정원(The Glen Grant Garden) 덕분일까
비 머금은 잎들이 반짝이고, 작은 폭포와 개울, 나무다리가 잇는 길이 고요하게 이어졌다.
빗소리와 새소리가 섞이는 순간, 마음속 소음이 한 칸 줄었다.
잠시 비가 그친 틈에 벤치에 앉아 싸 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소풍처럼, 아주 간단하게. 그런데 그 단순함이 오히려 나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하늘이 다시 쏟아졌다.
얇은 우산 위로 탁, 탁, 탁. 지나가는 차바퀴가 튀기는 물보라가 신발을 찍는다
이렇게까지 비를 맞아 본 게 언제였는지...
그런데 웃음이 났다. 나답지 않게.
비를 피하기보다, 그 안을 걸어가 보기로 했다.
드디어 도착한 곳은 스페이번(Speyburn) 증류소
1897년 설립, 스페이강 물과 전통적 방식으로 빚어낸 과일·허니 노트가 특징이다.
10년 숙성은 특히 가볍게 즐기기 좋아 입문자에게 자주 추천된다고들 한다.
우리는 투어를 신청했고, 가이드는 친절하고 유쾌했다.
스코틀랜드의 억양은 내 귀 밖으로 통통 튕겼지만 번역기와 남편의 도움으로 핵심은 놓치지 않았다.
물–보리–효모가 만나는 순간, 오크가 숨 쉬는 시간, 현대식 패널이 지켜보는 오늘날의 양조.
거의 증류소의 속살을 다 보여주는 동선이었다.
마지막 시음에서 선물로 받은 작은 잔 하나는 오늘의 기념이 되었다.
스페이번 위스키는 완벽한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비 오는 날과 잘 어울리는 위스키였다.
가볍게, 따뜻하게, 오래 남는 여운으로...
나는 원래 비 오는 날 외출을 싫어한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옷과 머리칼이 젖고, 흙이 튀고, 발이 무거워지고 축축하고
집에서 준비했던 모든 것이 흐트러져버리는... 으... 나는 정말 별로다.
생활비, 카드값은 비를 가리지 않으니 회사엔 나가야 한다.
그날은 회사 가는 것도 별로, 비가 오는 것도 별로인 최악의 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퇴근 뒤의 약속이나 주말의 약속은 미안합니다... 오늘은 메시지로만 안부를 전합니다...
사실 나는 ‘흐트러지는 것’ 자체를 불안해한다.
내가 생각한, 내가 준비한, 내가 예상했던 그것들이 흐트러지면
어쩔 수 없지가 아니라 이러면 절대 안 되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극도의 불안감이 든다...
나는 어릴 때 아빠에게 엄청 혼나면서 젓가락질을 배웠다.
그 어린애가 어떻게 한 번에 젓가락질을 하겠나...
혼나는 것이 너무 무서웠고, 덕분에 또래보다 빨리 젓가락질을 할 수 있었다.
또 있다. 아빠는 내 공책에 원래 있는 줄 위, 아래로 살짝 공간을 두고 또 줄을 그었는데, 그 안에, 그러니깐 말하자면 원래 있는 줄에 글씨가 닿지 않도록 정 가운데에 맞춰서 글씨를 쓰도록 했다.
그렇게 맞춰 쓰지 않으면 당연히 혼이 났고 역시 덕분에 줄이 있든, 없든 글씨를 아주 바르게 흐트러짐이 거의 없이 쓸 수 있게 되었다. 또 그 덕분에 학창 시절엔 글씨 쓰는 일은 주로 맡아서 하기도 했다.
그 습관이 마흔이 넘은 지금도 남아, 밥을 먹을 때면 내 젓가락질이 바른 지는 물론 남의 젓가락질까지 무심코 살피곤 한다. 그리곤 젓가락질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그렇게 불편했다. 밥만 잘 먹으면 되는 것을...
‘바르게, 정확하게, 틀리지 않게’ 그 말들이 내 하루의 자를 대신했다.
작은 삐뚤어짐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남편이 아침에 비가 오는 걸 보고 내 기분을 살피는 걸 알았다.
혹시라도 가지 말자라고 하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여행이라는 것을 내 몸이 알고 있어서일까.
빗속을 걸어 흙이 튄 신발을 내려다보며 나답지 않게 씩 웃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젓가락질이 조금 서툴러도 밥은 충분히 맛있고, 글씨가 줄에서 살짝 벗어나도 마음을 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비에 조금 젖으면 어떠하랴.
옷은 빨면 되고, 몸은 씻으면 된다.
계획도 그렇다.
한 줄 어긋나면 여백이 생기고, 그 여백에는 종종 좋은 바람이 들어온다.
반칙이 아니라면 정해 둔 선 밖으로 조금 나간 들 그게 인생에 무슨 큰 일이겠나.
축축한 공기 속에서 남편과 함께 젖은 옷과 신발을 보며 웃으며 사진을 찍어댔다. 기억에 남기려고 말이다.
마음이 유난히 가벼운 날이었다.
돌아오는 길, 빗줄기는 여전했고 우산은 여전히 작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늘 나는 완벽한 일정표 대신 비의 리듬을 따라 걸었고, 오늘의 에피소드로 남겨두기로 했다.
폭포 소리와 오크 향, 젖은 흙냄새와 작은 잔 하나
그걸로 충분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