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난입한 기쁨 한 조각,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떠오르는 해에 텐트가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어김없이 새소리에 눈이 떠졌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캠핑장에서 발걸음을 옮겨 마을 뒤편 오솔길을 따라 린 폭포(Linn Falls)로 향한다.
아벨라워 마을 중심에서 숲길로 20분 남짓, 폭포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물소리가 점점 또렷해진다.
폭포 앞에 서니 온몸이 시원하게 깨어나는 기분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잠시 발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듣기만 해도, 오늘 하루가 이미 완성된 느낌이다.
폭포를 등지고 짙은 초록을 헤치며 걸었다.
발끝은 촉촉하고, 공기는 나무와 흙냄새로 가득하다.
어느 순간 그 향 사이로 달콤한 곡물 냄새와 오크통 향이 살짝살짝 스치기 시작했다.
그 길 끝에서 만난 곳, 글랜알라키(GlenAllachie) 증류소!
이곳은 1967년에 문을 연, 스페이사이드의 비교적 젊은 명가이다.
하지만 작지만 단단한 설비와, 깊이 있는 스타일이 매력적인 곳이다.
투어를 할 생각이 없이 방문했는데, 마침 바로 시작하는 투어에 한 자리 남았다고 한다.
망설였다.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우리 자리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투어에 참가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가이드는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투어는 바로 시작되었고, 그녀의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오크통이 어떻게 숨 쉬는지, 물과 시간, 효모가 어떤 방식으로 황금빛을 만들어내는지
농담과 함께 풀어내니 마치 한 편의 이야기 같았다.
반짝이는 증류실, 숙성 창고의 묵직한 공기, 쉐리 오크통의 향기를 직접 맡아보는 것까지 알차게 이어졌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적인 나에게 ‘예상 밖’은 늘 스트레스였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고 설레었다.
예전의 나는 ‘계획에 없던 일’이 생기면 곧장 불안을 느꼈다.
칸칸이 채워진 일정표를 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빈칸을 보면 불안했다.
그래서 뜻밖은 늘 나에게 변수였고, 변수는 곧 스트레스고 내가 흔들렸다.
그런데 인생이 먼저 계획을 바꿔버렸다.
생각도 없던 결혼을 했고
평생 살 줄 알았던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고
남편 발령으로 베트남에서도 반년을 살았다.
그리고 지금, 둘 다 잠시 일을 내려놓고 여행 중이다.
이 모든 게 계획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씩 겪어낼수록 불안감보다는 설렘과 기쁨이 커졌다.
‘틀어졌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에서 오히려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이런 걸 느낄 새도 없이 타이트하게 살았던 내가 얼마 전부터
뜻밖은 때로 내 삶에 작은 상금을 건네주고, 그 보너스를 꽤 달콤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여백을 남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채우는 대신, 중간에 숨 쉴 칸을 남겨둔다.
그 틈으로 새로운 만남이 들어오고, 새 풍경이 들어오고, 가끔은 새로운 내가 들어온다.
뭔가 틀어지면 괴로워하던 나에게 단지 작은 '에피소드'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도 아직 뜻밖의 순간이 쉽지는 않다.
가끔은 당황스럽고, 가끔은 손에 땀이 나고, 아직도 살짝 흔들린다.
그런데도 내가 계속 이 길을 걷는 이유는
내 인생에 아주아주 큰 나쁜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니라면,
그건 어쩌면 내 하루에 들어온 작은 선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조금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잔 속 황금빛을 살짝 돌리고, 코끝으로 향을 먼저 맡는다.
달콤함과 스파이시가 번갈아 오고, 첫 모금은 부드럽다가 뒤에서 살짝 매운 타입이다.
'오, 괜찮네?' 하다가도 내 첫사랑 맥켈란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고 해도 이 한 잔이 덜 특별한 건 아니었다.
여행에서 만난 맛과 향은 결국 그날의 공기, 이야기, 웃음과 함께 기억될 테니...
투어를 마치고 나오며 오늘 일들을 생각해 봤다.
폭포 소리와 위스키 향, 그리고 계획 밖에서 느꼈던 재미와 즐거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내가 계획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겠는가.
큰 해가 아니라면, 오늘의 장면으로 남겨두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도 좋을 것이다.
재미와 즐거움, 행복한 느낌만 남겨두고 말이다.
계획과 지도는 여전히 필요할 테지만 한 칸쯤 비워둬 보려고 한다.
비워둔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오면 내 마음도 조금 더 열릴 거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