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예민한 나, 위스키 노래 속에 마음을 풀어본다.

완벽히 조용하지 않아도, 오늘의 나는 충분히 괜찮다.

by 마여사

캠핑장에서 시작된 위스키 노래 기차 여행

아침, 캠핑장 공기가 꽤 서늘했다.
겉옷을 껴입고 부지런히 역으로 걸어가다 보니 금세 몸이 달아올라 지퍼를 슬쩍 내렸다.
걸어서 도착한 작은 기차역 Dufftown
오늘 여정은 여기서 시작된다.





레일의 리듬과 위스키 노래

자리에 앉아 숨을 돌리자마자 기차가 출발했다.
오래된 작은 기차는 아주 천천히 달린다.

창밖으론 넓은 초록 언덕 사이로 양 떼가 점처럼 흩어진다.
이런 표를 최근에 본 적이 있었나? 너무 귀여운 기차표의 검표가 끝나고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는데

승무원이 위스키 기차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기차 안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달리는 이벤트도 있다고 하니 시기를 잘 맞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있으니 그 승무원이 위스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경쾌한 보컬이 위스키 노래에 너무 잘 어울려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바퀴 소리가 겹치면서 더 경쾌한 느낌이 든다.

오늘 하루를 위한 배경음악이 만들어진 것 같다.

그리고는 계속 기차는 달려갔다.


노래를 듣다 보니, 소리에 예민했던 내 이야기가 자연스레 따라 올라왔다

나는 한때 소리에 정말 예민했다. 지금도 물론 예민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나를 무너뜨리던 소리들

내가 특히 힘들어하는 소리들이 있다.
먼저 시계 초침 소리. 우리 집엔 아예 시계를 두지 않았고, 무음 시계를 알고 나서야 거실에만 하나 놓았다.

그런데도 가끔 신경이 곤두선 날엔 무음 시계의 미세한 기계음마저 들린다.


식당에서 수저 부딪히는 소리, 음식을 씹는 소리 때문에 밥을 제대로 못 먹고 나온 적도 많다.

껌 씹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에도 불쾌감이 솟구쳐 마음이 요동쳤다.


보통은 반복적인 소리에 노출되면 점차 둔감해져서 자연스레 차단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처럼 예민한(흔히 청각과민증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사람의 경우엔 그 소리만 더 크게 들린다.

스트레스는 말로 다 못할 만큼 두렵고 불안하고, 진이 빠진다.

그 시절의 나는 늘 소리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번 참다 참다 울었다.
식당 한쪽 자리에서, 지하철 의자에서, 밤 침대 위에서...

눈물이 먼저 나왔다. 이유를 설명하기도 어렵다.




몰랐던 이름, 버티던 시간

나중에야 병원에서 약물치료도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런 증상명 자체를 몰랐고, 결국 그 스트레스를 몸으로 버티며 지나왔다.


반전은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면서였다.
약 용량이 세진 않았는데도 우울 증상이 가라앉자, 같이 묶여 있던 소리에 대한 과민 반응도 조금씩 옅어졌다. 덕분에 숨 쉴 틈이 생겼다.


그리고 남편의 존재가 컸다.
내가 소리 때문에 힘들어하면 가능한 한 그 자리를 먼저 벗어나게 해 주고, 그럴 수 없을 땐 대화를 유도해 내 집중을 다른 곳으로 옮겨주었다.

남편이 거는 그 말 한마디가 당시의 나를 여러 번 구해냈다...


메모를 덮듯 마음을 다독이고, 다시 레일의 리듬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곧 Keith 역에 내렸다.




잊을 수 없는 스코티시 브렉퍼스트

증류소 예약까지 여유가 있어 시내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선택은 고민 없이 Scottish Breakfast
버터에 구운 토스트, 촉촉한 노른자, 바삭한 베이컨과 소시지, 향긋한 버섯, 너무 부드러운 레드빈, 그리고 순대 닮은 블랙푸딩... 거기에 부드러운 카푸치노까지... 환상적이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유럽인이었을지도…’
이 음식을 먹으러 이곳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역시 계획 밖에서 작은 행복이 찾아왔다.





오늘의 목적지, Strathisla 증류소

배도 든든하니 이제 Strathisla Distillery로 걸어가 본다.
1786년에 문을 연,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 가동 중인 증류소 중 하나로
그 유명한 위스키, 시바스 리갈의 핵심 원액이 여기서 나온다.

위스키를 모르던 어린 시절에도 이 이름은 알았으니...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과 잘 다듬어진 잔디, 살짝 기운 두 개의 파고다 지붕
오래된 위스키 라벨이 현실로 튀어나온 풍경 같다.


방문자 센터로 들어서자 보이는 로얄 살루트! (연진아…?)

그리곤 환해지는 나의 얼굴
'내가 사랑하는 그 향이 난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나만의 위스키 만들기

우리는 투어 대신 위스키 블렌딩 코스를 예약했다.

나만의 위스키를 만들 수 있다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되어 안내받은 곳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엔 스포이드, 비커, 작은 병들, 작은 기둥에 세워진 유리병 속 다섯가지 위스키가 저마다의 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설명을 들은 뒤 드디어 시작한다!
달콤한 쉐리 향은 ‘조금 넉넉히’, 플로럴은 ‘살짝’, 크리미는 ‘은근히’, 피트는 ‘조심스럽게’
스포이드로 위스키 병에 담아본다.

섞는 순간 퍼지는 향에서 '이거야' 하고 속으로 탄성이 나온다.

시음시간이 되고...
첫 모금에 '나 재능 있나 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완성된 나만의 위스키


그리고 묘하게도, 오늘은 향만큼 소리도 덜 날카롭게 다가왔다.

비커가 살짝 부딪히는 소리, 테이블의 딱딱 거리는 소리, 실험실(?) 안에서 또각또각 거리는 소리...

예전의 나였다면 어깨가 먼저 굳었을 소리들이 오늘은 잔잔한 배경으로 스며들었다.

위스키 만드는 데 너무 집중을 했나...?

향을 따라 호흡을 고른다.

진정되는 느낌이다.




소리를 배경으로

예전엔 조용한 순간만 찾았다.

퇴근 후 곧장 집에 가고, 주말에도 거의 집에 있었다.

하지만 계속 집에만 갇혀있을 순 없기에...

들려오는 소리들을 ‘배경’으로 두는 연습을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소리를 모두 없애려 하기보다, 내가 집중할 것을 고른다.

필요하면 이어플러그를 쓰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오디오북을 켠다.


지금도 시계 초침, 수저 소리, 씹는 소리, 냉장고 기계음 같은 것들은 여전히 들리고 거슬린다.
다만 ‘고통’이라고 말할 만큼의 파도는 잘 오지 않는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이건 때로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문제이며, 일상·수면·관계에 영향을 줄 정도라면 병원을 찾는 게 맞다.

그리고 치료와 더불어 스스로의 심리적 훈련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탓하지 않으면서, 스트레스를 키우지 않는 생각의 언어를 익히는 일이.




캠핑장으로 돌아온 작은 병

우리는 작은 병 두 개를 소중히 안고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병 속엔 Strathisla의 향만 있는 게 아니다.
레일의 리듬과 승무원의 노래, 따뜻한 아침, 그리고 ‘소리에 예민한 나’가 조금은 너그러워진 오늘까지 함께 담겨 있다.


돌아가는 길이 너무 예쁘고 맑았다


나는 계속 훈련 중이다.

완벽히 조용한 하루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

레일의 리듬, 바람의 숨, 잔에 남은 위스키의 향

그 모든 소리를 배경으로 두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스페이사이드를 떠나기 전, 맛있는 안주 곁에 천천히, 오래, 깊게 이 병을 열어 마실 거다.
스페이사이드의 바람을 따라 내일도 걸어본다.



완벽히 조용한 하루가 아니어도, 오늘의 나는 충분히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