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내려놓으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맥켈란 향 속에서...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의 아침 공기는 서늘하고 투명했다.
캠핑장에서 발걸음을 떼고, 우리는 강을 따라 걷다 숲길로 접어들었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스치며 작은 속삭임을 남기고, 걷는 내내 강물 소리가 귓가를 따라온다.
맥켈란 증류소까지는 중간중간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건너야 해서 조금 위험하다.
그래서 증류소 예약을 하면 '걸어오지 마시오'라는 식의 답변이 온다.
그곳에서 위스키를 꼭 마시고 싶은 뚜벅이부부는 조심스레 도로를 건넜다.
좌우를 잘 살피면서...
그리고 마침내, 내가 스코틀랜드에 온 이유 중 하나이자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그리던 이름 앞에 섰다.
1824년에 문을 연 맥켈란은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일 몰트 위스키의 명가로 자리해 왔다.
그 이름은 단순히 ‘유명한 위스키’가 아니라,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상징 같은 존재다.
맥켈란은 특히 스페인 헤레즈 지방에서 직접 제작한 쉐리 오크 캐스크에서 숙성된 달콤하고 그윽한 향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오크통을 만드는 나무 선정부터 철저히 관리하고, 그 안에 쉐리 와인을 숙성시킨 뒤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져와 위스키를 잠재운다.
목재의 결마다 스며든 향과 시간은 마지막 한 모금까지 부드럽게 스며드는 품격이 된다.
내가 처음 위스키에 반했던 순간도, 바로 이 맥켈란 쉐리 오크 12년을 마셨을 때였다.
입술에 닿자마자 퍼졌던 달콤한 쉐리향, 묵직하지만 무겁지 않고 날카롭지 않은 부드러운 풍미, 그리고 오래도록 입안에 남아 있던 여운...
그 한 모금이 내 위스키 인생의 첫사랑이 된 것이다.
그 후로 여러 위스키를 마셔봤지만,
“제일 좋아하는 위스키는?”이라는 질문 앞에서는
지금도 주저 없이 대답한다.
“맥켈란이요.”
그래서 이곳 맥켈란 증류소에 도착한 순간은 단순히 여행의 한 장면이 아니라, 첫사랑을 만나러 온 감정이었다.
2018년에 완공된 최신형 구조로 전문 건축가들의 손길로 디자인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들어가면서도 여기가 건물이 맞나? 하는 의문을 가졌다.
지붕은 언덕과 들꽃, 숲을 닮은 곡선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고 말하는 건물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풍경과 너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또한 맥켈란은 위스키계의 ‘롤스로이스’(?)라고 불리며, 그 명성만큼이나 럭셔리하다.
다른 위스키 증류소에서 흔히들 부르고 칭하는 ‘방문자센터’, ‘굿즈샵’, ‘위스키매장’도
이곳에서는 더 맥켈란 부티크(The Macallan Boutique)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치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처럼 화려하고 눈이 번쩍하게 꾸며져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고급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크리스털 디캔터와 한정판 병들이 전시되어 있고, 손님을 맞이하는 스태프의 유니폼과 표정, 제스처마저 ‘우리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콧대 높은 자부심이 불편하지 않은 건, 그만한 품질과 스토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단순히 ‘무언가를 사는 곳’이 아니라, 맥켈란이라는 세계관 속에 잠시 초대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황홀한 시음
솔직히 말해, 맥켈란은 한국에서도 비싸다.
내 첫사랑이지만, 가격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없는 아련한 존재...
여기서도 싸진 않다.
하지만 이렇게 먼 길을 걸어, 그 이름 앞에 섰는데 한 잔 정도는 사치가 아니라 예의였다.
잔을 코를 가까이 댄다...
말이 필요 없는 향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맛의 표현은 생략하겠다.
나에게는 단순한 ‘맛있다’가 아니었기에... (그리고 맛 표현을 잘 못한다)
시간과 기다림, 그리고 내가 걸어온 모든 발걸음이 한 모금 속에서 응축된 듯한 감동이었다.
(눈물을 흘렸던 건 비밀... 남편이 옆에서 엄청 웃었던 것도 비밀...)
나는 어릴 적부터 걸음걸이 하나, 젓가락질 하나, 글씨체 하나까지 바르게 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 속에서 자랐다.
아직도 기억난다. 이제 막 숫자를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유치원에 막 들어가려고 했을 때다.
숫자 ‘8’을 위에서부터 한 줄로 이어서 쓰지 못하고 동그라미 두 개를 그린다고 두 손을 들고 벌을 섰다.
그게 어린 나에게 굉장히 큰 사건이었는지 마흔이 넘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사소한 실수라도 혼이 나면 마음속 작은 숨이 막히기 일쑤였고 ‘잘해야 돼’라는 생각이 습관이 되면서, 나 자신을 가장 먼저 옥죄었던 것 같다.
그 습관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따라왔다.
낮 동안 실수한 건 없는지, 내가 한 말이 누군가에게 불편하지 않았는지, 혹은 더 잘할 방법이 있었는지를 계속 곱씹는다.
자려고 누운 밤에도, 하루가 끝난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내일은 더 잘해야지’, ‘그때는 왜 그렇게 했을까’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래서 여행도 늘 계획대로 깔끔하게,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비가 오면 어쩌나, 길을 잘못 찾아가면 어쩌나, 시간에 못 맞추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했다.
그런데 스페이사이드의 그 숲길 위에서, 맥켈란으로 향하던 그날은 달랐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지고, 차도 없고, 생각보다 멀었고, 도로는 무서웠다.
내가 생각했던 ‘가는 길’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웃으며 걸어갔다.
걸으며 문득 떠올린 구절이 있다.
바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씀.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빈 것이라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완벽’이라는 형체가 사실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굳은 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몰아치다 보면 언제나 자신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완벽이란 결국 끝없는 자기 불만과 채찍질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셈이다.
마치 반야심경에서 ‘몸에 힘을 빼라’고 하는 것처럼, 그 순간 나는 조금 내려놓았다.
내가 조금 비틀거린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고, 오늘 못한 건 내일 하면 된다는 걸,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흩날리듯 가볍게 생각했다.
이날 마신 맥켈란의 깊고 부드러운 향은, 마치 내 마음의 경계를 천천히 풀어주는 것 같았다.
첫사랑을 다시 만난 기쁨과, 나를 옥죄던 완벽주의에서 한 발 물러서는 안도감이 한 잔의 위스키 속에 함께 녹아 있었다.
맥켈란의 여운은 입안에서 오래 맴돌았고 나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더니, 그 자리에 스며든 건 예상치 못한 편안함과 자유였다.
여행을 언제 끝낼지도, 돌아가면 바로 취직을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당장 내 앞에 있는 건(솔직히 말해서) 맛있게 위스키를 마시며 남편과 웃는 시간뿐이다.
그리고 그게 지금 내가 제일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붙잡아 끙끙댈 필요는 없다.
몸은 스코틀랜드에 있는데, 머릿속만 한국에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 바보 같은 짓이라니...(조금은 했다)
이곳에 오기로 한 건 나다. 그렇다면 지금은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잔 속 위스키가 반쯤 남아 있다면, 그것부터 천천히 즐기는 게 순서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렇게 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그 순간에 집중하고 싶다.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다.
정말로...
맥켈란의 깊은 향은 내 마음속 오래된 결들을 천천히 풀어주었고,
나는 오늘, 그 향 속에서 다시 한번 사랑에 빠졌다.
맥켈란을 사랑했고, 지금은 그 사랑이 더 깊어졌다.
이 사랑은, 아마 오래도록 내 잔 속에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