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글쓴이의 주관적인 경험만을 기반으로 작성된 에세이이며, 명확한 학술적 근거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한국어-영어 통역사입니다. 하지만 어릴 때 영어 공부를 해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공부를 지독히도 싫어했기에 학창시절 내내 게임만 하며 살았으며, 문법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고 영어 단어만 간신히 암기한 채로 임했던 수능 영어 시험에선 4등급을 받았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로도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4학년이 되었을 때 받은 진로 상담에서 담당 교수님의 간곡한 조언으로 떠밀리듯 토익 공부를 시작한 것이 제 영어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토익 공부를 시작한 때가 25살이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28살에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해서 2년의 교육과정 끝에 통역사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원어민만큼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진 못 하지만, 일반적인 토종 한국인 영어 실력자분들과 비교했을 때 크게 뒤지지 않는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어 학습자분들이 익숙해 하실만한 영어 시험 점수를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27살이 되자마자 응시했던 토익에서는 980점, 오픽에서는 S등급(OPI)을 획득했었습니다.
지금은 인하우스 통역사로 근무한지 어느덧 2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제 주변 사람 중에서는 제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타지에 계신 부모님께선 통역사로 취업한 직후 나눈 통화에서 “그럼 이제 너도 영어로 대화할 줄 아는거냐”라며 신기해 하셨고, 대학 시절 어울렸던 모임에 나가면 “네가 영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며 영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저는 다른 영어 고수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빠르게 영어 실력을 향상시킨 케이스입니다. 그 때문에 여러 영어 학습자 분들로부터 영어 공부법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아왔었는데요. 이번 호에선 그에 대한 제 답변을 짧게 풀어볼까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특별한 비법이랄 것은 전혀 없고 뻔한 내용뿐이니, 이미 아는 내용을 복습한다는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학습 과정에서 방법 자체에는 거의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온 영어 공부의 7할은 단순한 리딩이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회화 공부를 할 때에도 거의 리딩만 했을 정도로요. 저는 방법을 찾는 것보다도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일반적인 영어 학습자들은 자신이 영어로 말을 못하는 이유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려 들지 않습니다. 영어로 말이 안 나오는 이유는 사람에 따라 정말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단어 암기 / 문법 공부 / 쉐도잉처럼 정해진 공부법에만 습관적으로 의존하죠. 예를 들면, 영어로 말을 하다가 당장 쓰고 싶었던 단어가 안 떠올라서 문장이 끊기면 “나는 단어 공부가 부족하구나!”…라며 무작정 단어책을 집어들고 보는 식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예시를 활용하여 설명을 이어나가보도록 할까요?
단어가 안 떠오르는 상황에 단어 공부를 안 하면 대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을 하는 도중 단어를 깜빡하는 것은 원어민들도 흔히 겪는 일입니다. 당장 우리만 하더라도 한국어로 말을 하다가 적절한 단어가 안 떠올라서 말이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요.
가까이 알고 지내던 사람도 한동안 안 만나다 보면 이름을 떠올리기 어려운 법입니다. 인간은 원래 모든 것을 이따금씩 깜빡하는 존재입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단어라면 여러 번 복습해두는 게 좋겠지만, 모든 영단어를 절대 깜빡하지 않을 수준으로 공부해두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한마디로 단어를 깜빡하는 것 자체는, 그 빈도가 지나치게 잦지 않다는 전제 하에,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고쳐야 할 문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인식을 바꾸는 순간,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어를 깜빡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서 “단어를 깜빡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로 바뀌게 됩니다.
자, 여러분이 친구와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여러분은 친구에게 아래에 있는 물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녀석의 명칭을 모른다고 해서 1분 동안 “음…” 하며 입을 꾹 닫은 채 정확한 명칭을 떠올리려고 고민하거나 대화 자체를 포기해버리는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대부분은 아마 아래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이용할 테죠.
- 풀어서 말하기: “그 빵 봉지 묶을 때 쓰는 거 있잖아!”
- 얼추 비슷한 단어 이야기하기: “그 빵 봉지 집게 말이야!”
단어/문법 공부를 하다보면 언어라는 것이 마치 엄격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규칙을 벗어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소통을 위한 도구이고,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이 아니라 맥락입니다. 저 녀석의 실제 명칭은 “빵 클립”이지만, 여러분들이 저걸 “빵 집게”로 부르든, “플라스틱 쪼가리”로 부르든, 심지어는 그냥 “그거”라고 부르든, 빵 봉지를 묶을 때 쓰는 도구라는 맥락이 제시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없이 메시지를 이해할 겁니다.
쉽게 말해 정확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거나 문법적으로 좀 틀린 문장을 구사하는 것은 일상 대화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복잡한 메시지가 오가지 않는 대화에 한해서는 문장까지 갈 것도 없이 단어 몇 개만으로도 충분한 소통이 가능합니다. 복잡한 어휘나 문법 지식 같은 것 없이, 정말 기본적인 지식만 가지고도 말이죠.
소통에 있어서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입을 닫아버리는 습관”입니다. 즉, 영어 단어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어 단어가 생각 안 나면 포기해버리는 버릇이 문제인 겁니다. 저런 습관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단어 공부는 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정확한 단어나 문법, 즉 규칙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그것들을 깜빡할 때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때문에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깜빡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한 뒤, 떠오르지 않는 단어를 문장으로 풀어서 이야기하거나, 비슷한 의미를 지닌 더 단순한 단어로 dumb down하는 스킬을 천천히 연습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말하다 단어를 깜빡하는 문제의 원인에 대한 제 주관적인 분석입니다. 이것보다도 훨씬 다양한 관점에서 더 깊게 분석해보는 것도 가능은 할 겁니다. 제 글의 요지는, 단순해보이는 문제일지라도 그 원인까지 단순한 경우는 드물다는 겁니다. 누군가는 단어 공부가 부족해서 깜빡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깜빡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원인이 다르면, 당연히 공부의 방향도 달라져야 합니다.
인풋을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는 어린아이와는 달리, 이미 모국어 언어 체계가 뇌에 확고히 자리를 잡은 성인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모국어로부터 오는 제약을 극복해야 합니다. 학습자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언어 습관을 지니고 있으며, 그 습관은 어떤 식으로든 대상의 외국어 학습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내 언어 습관이 내 영어 학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학습자 본인밖에 없습니다.
“이것만 암기하면 누구나 한달만에 프리토킹 가능!” 이라든가 “이것만 한달 내내 들으면 귀가 트인다!” 같은 one-size-fits-all 솔루션은, 적어도 성인 학습자에겐 없다고 생각하시는 게 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내 외국어 실력이 정체되어 있는 원인에 대한 고통스러운 분석이 필수적입니다. 중요도로 따지자면 제대로 된 원인 파악이 9할이며, 그 원인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 것인지는 1할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영어로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건 이해하지만, 마음 속의 조급함을 잠시만 내려두고 며칠 정도 스스로의 뇌 속을 차분히 들여다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영어로 말이 안 나올 때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심리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면밀히 관찰해보시고 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가설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만 있다면, 많은 경우 해결은 시간 문제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