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암기를 빼고서 영어 공부를 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학습 방법이야 저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기초 영단어들을 암기하는 것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합니다. 물론 기초 단계를 벗어났다고 해서 단어 암기를 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토익이나 토플 같은 영어 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영단어를 암기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토익스피킹이나 오픽 같은 회화 시험을 위해서도 유용한 숙어 또는 문장을 통째로 암기해가는 경우가 다반사이니까요.
그럼 더 많은 단어나 표현을 많이 암기할 수록 영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는 걸까요?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암기한 영단어의 수가 유창함과 정비례했더다면, 영어에 대한 학구열이 뛰어난 한국인들에게 영어 회화가 이렇게까지 두려운 존재였을리 없겠죠.
암기가 만능 학습법이 아닌데도 여전히 많은 영어 학습자들이 단어 및 표현 암기에 주로 의존하는 이유는 아마 방법 자체가 단순하고 거의 즉각적인 성취감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적절한 심리적 보상을 제공해준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진짜 문제는 학습자에게 착각을 심어줄 가능성이 높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로 '암기한 단어는 내 것이 된다'는 착각이죠. 새로운 단어를 막 암기한 바로 그 순간에는, 마치 필요할 때 언제든 그 단어를 꺼내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니까요.
단어의 뜻을 암기하는 것과 단어를 활용하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외운다고 해서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까지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Follow'라는 단어를 예시로 들어볼까요? "Follow me!" 같은 문장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쉽게 떠올리고 사용할 수 있는 반면 "Korea won the most gold medals, followed by Japan and China." 같은 문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문장의 의미를 해석할 줄 아는 학습자야 많겠지만, 실제 영어로 대화할 때 'follow'라는 단어를 저런 식으로 활용하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간단한데, 한국어에서는 후자와 같은 구조의 문장을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단어가 지닌 고유의 패턴을 무시한 채 한국어로 대응되는 의미만 암기해서 문장을 조합하려는 학습자들이 흔하게 맞닥뜨리는 문제입니다. Follow + somebody 같은 문장은 기계적으로 번역했을 때 한국인들에게 직관적인 결과물이 나오는 반면(누군가를 따라가다), be followed by somebody 같은 문장은 기계적으로 번역했을 때 한국인들에겐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이죠(누군가에 의해 따라가지다?). 영단어를 착실하게 암기한 학습자가 영어로 말을 하려 할 땐, 한국어 문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린 뒤 각 단어를 대응되는 영단어로 번역하고 결과물을 조합한 뒤에 입을 여는 경우가 흔합니다. 암기한 단어들을 한국어의 어순으로 조합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고, 그렇다보니 머릿속에 번역할 한국어 원문을 먼저 준비해두지 않은 상태에선 기본적인 영어 문장조차 내뱉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합니다. 머리를 쥐어짜내더라도 "follow me"처럼 한국어로도 자연스럽게 직역이 되는 뻔한 구조의 문장들만 제한적으로 떠오르게 되죠.
어떤 단어나 표현의 의미를 암기했다고 그게 실제로 내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유창하게 활용하고 싶다면, 사전적 의미만 암기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사용되는 패턴을 익혀야만 합니다. 패턴을 익히지 않으면 의미를 알고도 잘 활용할 수 없으며, 기껏 활용하더라도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결과물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또한 특정 단어가 지닌 패턴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지닌 패턴을 파악하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외국어로써 영어를 공부하는 학습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영어 단어를 모국어에서 흔히 등장하는 패턴대로 끼워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완전히 새로운 하드웨어(단어)로 교체하면서 소프트웨어(패턴)는 전혀 업데이트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죠. 이를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고치려들지 않는다면 영어를 사용할 때마다 항상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단어가 아니라 패턴을 암기하면 되는 건가요?"라는 의문을 품으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영어의 패턴이라는 것은 맥락에 따라 굉장히 다양하게 바뀌는 데다가 딱히 직관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암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패턴은 체득해야 합니다. 암기를 통해서 체득하는 것도 분명 가능은 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패턴을 효과적으로 체득하기 위해선 적절한 인풋에 대한 노출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여기서 '적절한 인풋'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보자면, 우선 '이해 가능한 수준의, 잘 쓰여진 영어'여야 합니다.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영어 뉴스를 아이패드로 하루종일 틀어놓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린이 동화라도 좋으니, 한번 들었을 때 70-80%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인풋을 찾아야 합니다. 영화, 드라마, 소설, 에세이 등등, 텍스트건 오디오건 상관 없으니 최대한 많이 읽고 들어야 합니다. 들은 내용을 직접 입으로 따라하며 활용해본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싶다면, 입이 아니라 귀를(텍스트라면 눈을) 먼저 열어야 합니다.
적절한 인풋의 두 번째 조건은 바로 '몰입할 수 있는 영어'여야 한다는 겁니다.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문장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지루해서 집중이 잘 안 된다면 좋은 인풋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문장을 꼼꼼히 해석하지 않고도 인물들의 표정이나 목소리만으로도 대화의 흐름이 이해가 되는 수준의 몰입을 목표로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소설이 있다면 그걸 매일매일 돌려봐도 상관 없습니다. 인물들의 대사를 독해하듯 분석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보다는 그 대사가 어떤 상황에서 나온건지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문장의 문법과 구조에 신경쓰기 보다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특정 문장이 전달하는 느낌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패턴을 파악하는 데에 훨씬 유용합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학습자들은(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말하기 전에 깊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생각없이 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암기한 단어들을 기억속에서 끄집어내고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하는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수없이 많은 인풋에 대한 노출을 통해 영어 속 패턴을 체득했기 때문에 그냥 '어떤 느낌의 문장'을 뱉어야 하는지 아는 것 뿐이지, 여러분보다 암기력이 좋아서 더 많은 문장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머릿속 단어장을 뒤적거리며 문장을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계. 암기한 지식을 꺼내 쓰는 것이 아니라, 체득한 감각으로 말하는 단계를 목표로 달려보세요. 단어 하나를 외울 시간에, 그 단어가 들어간 적절한 난이도의 문장 열 개를 간단하게 훑어보세요. 표현 하나를 암기하는 대신, 그 표현을 이야기하는 인물이 처해있는 상황 또는 그 감정에 집중해보세요. 비록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암기가 아닌 체득을 목표로 꾸준히 나아가다보면, 언젠가 여러분도 깊이 고민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영어를 내뱉을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