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거 하나만 있으면
영화 “설국열차”를 보신 분들이라면 등장인물들이 소통을 위해 사용했던 조그마한 통역 기계를 기억하실 겁니다. 사용자가 뱉은 말을 원하는 언어로 빠르고 자연스럽게 번역해주는 마법의 기계. 만약 온 세상 사람들의 손에 그런 기계를 하나씩 쥐어줄 수만 있다면,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않을까요? 그런 세상이 온다면 이제는 정말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가 전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12년 전 영화 개봉 당시만 하더라도 공상에 불과했던 통역 기기는 어느덧 거의 손에 잡힐듯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미 AI는 대부분의 인간 통역사가 흉내내기도 힘들 정도의 훌륭한 퀄리티로 통역을 해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은 단순히 기억하는 것조차 버거운 복잡하고 긴 문장을 사소한 디테일 하나 누락시키지 않고 완벽하게 통역해내는 GPT를 보고(또는 듣고)서는 ‘나는 왜 통역사의 길을 택했던 걸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에 빠져본 게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완전한 현실”이 아니라 “거의 손에 잡힐듯한 현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변수가 통제되지 않은 환경에서는 여전히 인간 통역사의 퍼포먼스를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구조의 문장을 또렷하게 발화하는 연사에 한해서는 AI가 인간 통역사보다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일 확률이 매우 높지만, 말을 굉장히 조그맣게 하거나, 발음이 명확하지 않거나, 주제와 상관없는 말을 하거나, 또는 여러 명이 동시에 발화를 하는 상황 등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러한 환경에선 AI 통역의 기복이 굉장히 심해집니다. 문장의 상당 부분을 누락시키거나, 원문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자연스럽게 읽히는 문장을 반복적으로 내놓는 등의 현상이 발생하죠. 물론 비슷한 조건이라면 인간 통역사 역시 어려움을 겪긴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 통역사들은 악조건 속에서도 최소한의 의미 전달은 해낼 수 있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에 큰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 자체는 더 적은 편입니다. 퍼포먼스의 상방만 보자면 이미 AI가 인간 통역사를 능가하지만, 전반적인 안정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인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즉, 설국열차에 나온 장면처럼 대화 속 변수(인물들의 발음, 볼륨 등)를 통제하기가 힘든 상황 속에서는, 제아무리 GPT라 하더라도 매끄럽고 정확한 통역을 제공하기 힘들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뭐, 일단 당장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AI의 발전 속도가 너무나도 빠르다보니, 혼돈의 카오스 같은 환경 속에서도 AI가 인간 통역사보다 더 정확하게 통역을 해낼 수 있는 날이 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듭니다. 가까운 미래에 기술의 성능과 접근성이 보완되고 나면, 그때는 정말 모두가 저렴하고 성능 좋은 미니 통역기(또는 스마트폰 내의 앱/어시스턴트 형태로)를 하나씩 보유하게 되겠죠.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하나도 없는 세상이 오겠군요. 사실 굳이 배워서 뭐하겠어요? 당장 일반 성인이 1년 내내 죽어라 영어 공부를 해도, 3년 전 출시된 GPT-3.5가 지녔던 언어 실력의 발끝에도 못 미칠 텐데. 그렇게 생고생하며 직접 영어를 배울 바에, 차라리 원어민보다 뛰어난 어휘력을 지닌 최신 챗봇을 잘 활용하는 법을 연습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벽은 무너지지 않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설국열차에 등장한 것과 같은, 혹은 그보다 더 훌륭한 AI 통역 기기가 등장하더라도 언어의 장벽을 허물 수는 없다는 사실이죠.
이는 AI의 한계라기 보다는 “통역”이라는 서비스가 지닌 본질적인 한계와 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생각해보시면, 통역은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는 서비스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통역은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인부의 역할보다는 장벽 너머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배달부의 역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아직까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국어를 직접 공부하는 것뿐입니다.
외국어 공부를 통해 한번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린 사람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기타 정치적인 이유로 통역을 활용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반면 어떤 형태로든 통역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 사람들 중 절대 다수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외국어로 소통을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통역의 힘을 빌려서 장벽 너머로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AI 통역기가 그러한 서비스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고 비용을 낮추는 데에는 획기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태생이 “배달부”에 불과한 통역의 본질까지 바꿀 수는 없습니다. AI니 어쩌니 해도 결국은 “통역” 서비스에 불과하니까요.
물론 단순히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 자체가 유일한 목적인 상황에서는 통역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통역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차치한다면요). 예를 들어 내가 영어로 말을 잘 못하는데 당장 외국 바이어와 협상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직접 영어를 공부해서 협상에 임하려는 건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겠죠. 그렇게 당장의 메시지 교환이라는 단기적인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직접 외국어를 공부하기보다는 통역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문제는 정말로 메시지 교환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대화 자체가 드물다는 거죠. 대부분의 대화에서는 상대방과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 역시 메시지 교환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목적으로써 취급됩니다. 방금 언급드렸던 예시에서도 역시 예외가 아니죠. 단기적으로는 어떻게든 말만 잘 통해서 바이어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하면 끝이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방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만 있다면 장기적으로 큰 이득을 얻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해당 바이어와의 다음 협상 역시 잘 흘러갈 확률이 높아질테고, 그 바이어가 업계 관계자들에게 우리 회사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으니까요.
통역은 “메시지 교환”이라는 영역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만, “유대감 형성”에서는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벽을 허물어뜨리지 않고 그 너머로 메시지만 전달해주는 “간접 경험”을 제공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감을 형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어떻게든 이 장벽을 허물어뜨려서 대화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유대감 형성이라는 측면만 고려한다면, 전문 통역사를 고용해서 정확하고 격식있는 표현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보다 유치원생 수준의 영어를 구사해서라도 상대방과 직접 대화를 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인 선택입니다. 물론 계약에 대한 논의를 할 때처럼 모든 숫자와 단어를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야하는 상황에서는, 내가 영어로 말을 좀 할 줄 알더라도 통역의 힘을 빌리는 편이 안전하겠지만요.
대안이 아닌 임시방편
저는 다양한 회의를 오가며 많은 유저분들에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영어에 지레 겁을 먹어서 통역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유저들이,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영어 말문이 트이게 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회의 시작 전 영어로 간단한 일상 대화를 주고받는 정도로만 시작했다가, 이후 조금 더 마음이 편해지고 나면 회의 도중에도 점점 영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거죠. 물론 그 과정에서 유저들의 영어 실력이 드라마틱하게 성장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처음에나 나중에나 여전히 단순하고, 어색하고,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을 구사하시는 건 대부분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단 한 번이라도 직접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뜨려보는 경험을 하게 되면 다시 통역이 제공하는 간접 경험만으로는 만족이 안 됩니다. 내가 뱉은 말이 통역사라는 필터를 한 번 거쳐 정제된 문장으로 전달될 때보다, 내 입을 통해 상대방에게 직접 전달될 때가 훨씬 강력하고 재미있다는 걸 깨닫게 되거든요. 심지어 그 대상이 한번 보고 말지도 모르는 외부 바이어도 아니고, 매일매일 얼굴을 보며 소통해야 하는 팀원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허술한 영어로라도 직접 소통하시는 분들이 통역을 이용하시는 분들에 비해 유대감 형성에 있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됩니다.
대화에서 상대방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통하는 대상은 단순한 정보 처리 노드가 아닌 감정과 생각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 정보 교환만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를 넘어 상대방과 진정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직접 소통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전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AI 시대에도 외국어 공부를 멈춰선 안 됩니다. 외국어 공부란 저 너머에 있는 상대방을 직접 마주보기 위해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뜨리는 행위이거든요.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리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그 높이를 깎아내어 까치발을 들고서라도 장벽 너머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거든요.
언어의 장벽 너머에는 통역이 전달할 수 없는, 단순한 메시지 이상의 것들이 있습니다. 장벽 너머의 서로를 직접 바라보고 있을 때에만 공유할 수 있는 미묘한 감정 변화와 같은 인간적인 요소들처럼 말이죠. 시간이 지나면 외국어를 전혀 공부하지 않고도 저런 인간적인 요소들까지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는 혁신적인 AI 서비스가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그 주인공이 AI “통역기”는 아닐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나 AI가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전의 세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 하에 당장이라도 외국어 공부를 포기하려는 분들이 계신다면… 아직, 아직입니다. 성급하게 결론짓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물론 기다리는 동안 조금씩이라도 외국어 공부를 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