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회화가 어렵게만 느껴지는 이유

by 통역사 J

여러분이 공원에서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외국인이 다가오고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어… 음…”


여러분 앞에 멈춰 선 외국인은 잠시 혼자서 할 말을 정리하는 듯 하더니, 이내 힘겹게 입을 열고 무언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화자실… 차자요”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대부분은 이 외국인이 화장실을 찾는 중이라는 걸 이해하고 곧장 화장실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려고 할 겁니다. 물론 이 외국인의 형편없는 한국어 실력에 혀를 끌끌차면서 ‘이 사람은 한국어 발음이 엉망이네. 거의 못 알아들을 뻔했잖아. 게다가 “화장실 차자요”라니? “화장실이 어디에 있을까요?”처럼 자연스러운 표현은 모르나보군. 한국어를 별로 못하는 사람이네’ 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 수 있겠지만, 아마도 굉장한 소수에 불과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 사람, 한국말 꽤 잘하네?’ 라는 반응을 보일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말이라도 통한 게 어디예요, 그렇죠?



Aim for the Moon…?


저는 한국어-영어 통역사입니다. 직업 때문에 특히나 더 그런건지는 몰라도, 영어 회화에 관심있는 분들을 일상 속에서 마주칠 기회가 예전부터 꽤나 많았습니다.


그 중 일부는 취업용 스펙으로 회화 실력을 쌓고 싶어하는 대학생들이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영어로 기본적인 수준의 대화라도 해보는 게 소원인 직장인 및 어르신들이었죠.


그런데 그분들과 함께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졌던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영어 회화”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높은 기준을 갖고 계신 경우가 많았다는 겁니다. 영어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문법도 정확해야 하고, 단어도 많이 알아야 하고, 원어민이 쓰는 자연스러운 표현들도 입에 붙여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다수였죠.


“높은 기준을 가지면 그만큼 열심히 공부할테니 좋은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회화에 대해 과할 정도로 높은 기준을 세우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는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로 말하기”를 넘어 “영어 마스터하기”가 목표인 사람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대다수의 학습자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영어 전문가 되기”가 아니라 “영어로 일상 대화하기” 정도입니다. 그리고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일상 대화 수준의 영어에서는 엉터리 문장을 사용하더라도 거의 아무런 문제 없이 성공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잘 안 믿기겠지만 정말로요.



맥락의 힘


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대방과 오해 없이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문법, 유창성, 발음, 어휘와 같은 것들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들은 메시지 전달이라는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멋진 어휘를 써가며 정확한 문법과 발음으로 말을 한다 하더라도, 만약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실패한다면 결국 반쪽짜리 문장이 되어버리죠.


그렇다면 아까 여러분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봤던 외국인의 경우는 어떻게 된 걸까요? 문법도, 유창성도, 발음도, 어휘도 엉망이었던 그 외국인의 메시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던 거죠?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맥락” 덕분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맥락에 의존해서 문장을 해석합니다. 맥락을 분명하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문장 속 단어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수고로움 없이도 그가 의도한 바를 상당히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습니다. 엉터리로 짜여진 문장을 보고도 많은 경우 큰 어려움 없이 메시지를 해독해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죠. 물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복잡할수록 맥락에만 의존해서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문장 자체도 훨씬 정교해져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화가 뻔한 레파토리로 흘러가는 일상 대화에서는 딱히 그렇지 않죠.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맥락의 힘은 정말 강력합니다. “밥”이라는 단어로 예를 들어 볼까요? 맥락이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밥”은 그 단어 자체가 지닌 고유한 의미 외에는 거의 아무런 메시지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길을 걷던 도중 남루한 차림의 행인이 다가와서 “밥”이라고 말을 건넸다면, 그때부터는 꽤나 분명한 메시지가 생기게 됩니다. 아마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좀 달라거나, 아니면 근처에 끼니를 해결할 만한 장소의 위치를 물어오는 것일 확률이 높겠죠.


이번엔 좀 더 복잡한 예시로 바꿔서, 여러분이 뉴욕 한복판에서 지나가는 시민을 붙잡고 “Where’s subway?” 라고 물어보는 상황을 떠올려봅시다. 문법적으로 따지고보면, 원어민 입장에서 Subway라는 단어 자체는 지하철(the subway)이 아니라 샌드위치 체인(Subway)으로 인식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지하철을 정관사 없이 “subway”라고만 부르는 게 굉장히 어색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완벽한 원어민 바이브를 풍기면서 저런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상대방은 여러분이 샌드위치 가게(a Subway)를 찾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확률이 높습니다.


반면 여러분이 여행객 차림을 한 채 어눌한 발음으로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요? 그땐 여러분이 지하철(the subway)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겁니다. 이미 여러가지 맥락을 종합해본 뒤 여러분이 a Subway와 the subway의 차이를 모르는, 비영어권 국가에서 온 여행객일 것이라고 판단했을 테니까요.



과정보다는 목적에


앞서 말했듯 대화의 본질은 상대방과 오해없이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공원에서 “화장실이 어디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앞으로 30m 직진한 뒤 우회전을 하시면 정면에 보이는 편의점 옆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손가락으로 화장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저기요” 라고만 대답하는 편이 훨씬 좋을 수도 있습니다. 대화에서 맥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반칙이 아니라 현명한 전략입니다. 대화라는 건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교류의 장이지, 내 문장의 정교함을 뽐내기 위한 무대가 아니니까요.


결국 “영어로 말을 할 줄 안다”는 건 실력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부끄럼없이 영어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당당함, 그리고 그것을 다양한 비언어적 요소(표정 및 제스쳐 등)와 결합시킴으로써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문법 지식”이나 “아는 단어 3만 개 이상” 같은 게 아니라요.


문장 속 사소한 실수 하나가 대화를 망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압박에 사로잡혀 있을 땐 누구나 입을 여는 게 두렵습니다. 실수 좀 하더라도 대화의 궁극적인 목적인 “메시지 전달”에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해야만 저런 압박을 떨쳐내고 비로소 자신감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대화를 하고 싶다면,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집중해보세요. 영어 회화의 핵심은 영어로 “멋진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두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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