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6. 보헤미안 하이웨이 - 7

by 소라게




카운터에 앉아있던 청년의 눈이 우릴 보곤 동그래진다. 주방 쪽으로 무어라 외치자, 또 다른 청년이 나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우릴 구경한다. 손님은 우리뿐이다.


우린 주방 입구 앞 테이블에 앉았다. 주방에서 나온 청년은 쭈뼛거리며 메뉴판을 내민다. 우린 감동하고 말았다. 일단 영어가 적힌 메뉴판이 있잖아……! 모르긴 몰라도 아주 행복한 식사가 될 것 같은 예감이다.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어.”

“팬케이크, 오믈렛, 감자튀김…….”


대충 결정을 하고서 아까의 종업원 청년을 다시 불렀다. 어느새 꼬마 여자아이와 중년 여자, 나이 든 할아버지까지 곁에서 우릴 구경 중이다. 다 한 가족인 걸까?


“나는 레몬 소다 한 병, 야채 볶음면 하나, 바나나 팬케이크 하나. 이쪽은 콜라 한 병, 오믈렛 하나, 스프링롤 하나.”


종업원은 메뉴의 영어를 읽을 줄 알았다. 메뉴를 적어갈수록 그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나중엔 진짜 이걸 다 먹을 수 있겠냐고 묻는 듯 동공이 흔들린다.


가장 먼저 음료가 나왔다. 우린 레몬 소다와 콜라 한 병을 단숨에 비우고 한 병씩을 추가 주문했다. 콜라는 차가운 것이 떨어져서, 종업원이 옆의 마켓으로 직접 사러 다녀왔다.


새로 주문한 음료수를 홀짝거리고 있을 때, 주문한 음식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야채 볶음면과 스프링롤이 첫 번째다. 나는 볶음면에 칠리소스를 가득 뿌려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지만 맛만큼은 꿀맛이다.


스프링롤을 잘라먹는 지혜도 마찬가지다. 큼직한 스프링롤을 몇 조각으로 잘라 뭉텅뭉텅 입에 넣더니 몇 번 씹지도 않고 삼킨다.

삽시간에 접시가 텅 빈다. 두 접시가 비워진 즉시 두 번째 음식이 나온다. 바나나 조각을 반죽에 넣어 구운 팬케이크와 야채 오믈렛이다. 물론 팬케이크와 오믈렛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별로 먹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여태 먹은 음식만 이미 4인분인데 말이다(심지어 음료는 포함하지도 않았다). 제대로 된 식사가 너무 오랜만인 위장은 어지간해서는 만족할 기미가 없다.


“아직도 배고파. 무슨 푸드 파이터도 아니고.”

“더 시켰다간 저 사람들 대대손손 우리 이야길 할 거 같아요.”

“에잇, 몰라. 당장 내 위의 안녕이 더 중요하다.”

“그건 그래요.”

“시키자.”

“시켜요.”


다시 종업원을 불러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종업원이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우린 두 가지 음식을 더 시켰다. 지혜는 바나나 팬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걸 하나 더 시켰고, 난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맥주만 있었으면 환상적인 식탁일 텐데.


3차 추가 주문 메뉴까지 몽땅 비우고 나자 겨우 만족스럽다.

더 먹으려면 먹겠지만, 이런 식이면 10인분도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동네방네 소문이 나겠지. 먹다 죽은 귀신이 씐 웬 낯선 여행자 둘이 나타났다고.


빈 접시를 거둬가는 종업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설 젓는다. 우린 부른 배를 두구당당 두드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러 다시 그 식당을 찾았을 때에는 문명인답게(?) 2인분만 주문했다. 종업원은 ‘어차피 너희 더 먹을 거잖아’ 하는 얼굴로 메뉴를 다시 내밀었다. 우린 짐짓 점잔을 빼며 메뉴를 도로 물렸다.






“언니는 왜 여행을 하나요?”


침대에 엎드려 일기를 쓰던 지혜가 불쑥 묻는다. 창가에 앉아 바깥 구경을 하며 맥주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지혜를 보았다. 지혜는 수첩을 덮고 몸을 일으키며 재차 물었다.


“여행을 그냥 오진 않았을 거 아녜요?”

“……”


순간 맥락은 없지만, 내게는 타당한 온갖 이유가 입안에 휘몰아친다. 하지만 쉽사리 이을 수 없는 문장들이다. 그래서 침묵으로 그 문장들을 곱씹어 보다가 문득 되물었다.


“그럼 넌 왜 여행을 해?”

“나야…… 대학 졸업하기 전에 좀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서요. 4학년 되고 졸업해버리면 진짜 밖으로 나가볼 기회가 없잖아요.”

“어디 어디 간다고 그랬더라?”

“일단은 인도하고 네팔, 그리고 미얀마요.”

“미얀마? 거기는 왜?”

“그냥요. 꼭 가보고 싶거든요.”


머릿속의 세계지도를 더듬어봤다. 미얀마가 어디 붙었더라? 불현듯 네팔 옆에 자그마하게 붙은 부탄이 떠오른다.


“보통은 라오스나 베트남에 많이 가더라만. 미얀마는 가기 쉽나?”

“아뇨. 불교가 주종교인 데다, 공산주의 국가라서 까다로워요.”

“위험하진 않대?”

“그렇진 않을 것 같아요. 아무렴 중동보다 위험하겠어요.”

“뭐, 어쨌든 더 넓은 세계가 보고 싶었다는 거지?”

“음……, 그것도 있고. 가족들한테서 떨어져 있고 싶었거든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아?”

“그보다는……, 부모님하고 좀 안 맞아요. 동생 하고는 잘 지내지만.”


지혜는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었다. 난 천장을 올려다본 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널 보면서 부러운 게 하나 있어.”

“네?”


지혜가 이쪽을 쳐다본다.


“난 지쳐서 목소리도 잘 안 나오는데, 넌 잘도 웃고, 현지인들과 인사하고, 대화하고 그러더라.”

“…….”

“사소한 것에도 호기심 만만이고, 기뻐하고, 신기해하고. 그런 열정이 부러워.”


지혜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나는 사실 퍽 무심한 성격이라, 여행 중에 맞닥뜨리는 낯선 것들에 대해 크게 호기심도 거부감도 없거든. 흥미야 있는데, 너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여행을 나왔다고 원래 성격이 어디 가겠니. 아무튼 같은 여행을 해도 네가 나보다 몇 배는 더 만끽하는 것 같아서 부럽더라고.”

“그럴 수도 있군요. 난 보는 것마다 다 신기하던데. 사람들 생긴 것도 신기하고, 이 사람들 먹는 것도 신기하고, 말하는 거, 보는 거, 심지어는 그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여긴다는 것까지도 신기해요. 언니는 아니구나.”


그렇게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던 지혜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굳이 여행을 할 필요가 있나요? 여행을 하지 않을 때와 할 때의 마음이 그리 다르지 않다면?”


난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내 여행은 뭐랄까… 경험보다는 벗어나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봐야지.”

“벗어나기요?”


지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운다. 나는 그때까지도 머리 한쪽으로는 맥주를 사러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 중이었다.


“응. 관계로부터.”

“관계?”

“사람들이며 그들과 얽힌 상황에 치이는 게 싫어서.”

“여행할 때도 치이는 것 같잖아요.”

“다르지. 여행할 때 치이는 사람이나 상황은 내게 낯선 것들이잖아.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과 치이는 게 진절머리 날 때가 한 번씩 있더라고. 또 여행하다 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산뜻하게 그곳을 떠나 버리면 그만이잖아. 하지만 어딘가에 뿌리내린 채 살 때는 그게 참 어렵지. 싫어도 계속 마주쳐야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하고 등등.”


지혜는 알 듯 말 듯하다는 표정이다.


“언니는 오래 사귄 사람들이 싫어요?”

“어떻게 싫기만 하겠어. 싫어지지가 않은데 지긋지긋할 때가 생기니 문제지. 그리고 나만 그렇겠어. 아마 저쪽도 내가 그럴 때가 있을 거야. 말하자면 이래저래 복잡한데, 그래도 지금 내 상태를 아주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표현이 하나 있긴 하지.”

“그게 뭔데요?”


마음의 결정이 끝났다. 나는 이 말을 끝으로 맥주를 사러 나갈 것이다.


“나는 도망치는 중이라는 거.”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지갑을 들고 맥주를 사러 가겠다며 객실을 나왔다.


두 사람이서 마실 맥주를 몇 병 사서 돌아온 뒤, 우린 이야기를 이어갔다. 수다는 새벽녘에야 끝났다. 각자가 살아오며 겪은 지극히 단편적인 것들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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