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8. 다시, 또 - 3

by 소라게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 밤이 깊도록 가이드북을 읽었다. 한참을 읽다가, 어느덧 한국어 도서보다 영문 도서를 읽는 것이 더 익숙해졌음을 깨닫고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인간의 적응력은 매번 놀랍다.


새벽 4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가 3시간 만에 깼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멍하니 생각한다. 오늘 할 일이 뭐더라…… 그래. 일단 이집트행에 필요한 물건을 사고, 빌렸던 중고책들을 서점에 반납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자. 이집트에 가겠다면 기함하겠지만, 뭐 어쩌겠어……


씻고 나자 어영부영 9시가 넘었다. 인근 인터넷 카페를 찾아 메일을 확인하니, 모처럼 엄마에게서 메일이 와 있다. 그런데 내용이 정말 뜻밖이다.


「 너 괜찮니? 어제 카트만두에 폭탄 테러가 있었다면서! 」


그 밑으론 내 안위를 염려하는 내용이 죽 이어진다. 그러나 첫 문장이 워낙 충격적이라 다른 내용이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카트만두에 테러라고? 대체 언제?


황급히 한국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뒤졌다. 검색어에 네팔, 테러라고 치자, 바로 어제 일자의 인터넷 뉴스가 줄줄이 뜬다. 카트만두, 폭탄 테러, 힌두교도 집단 테러, 등등의 단어가 어지럽게 얽힌다. 폭탄이 터졌다고 보도된 장소는 숙소와 불과 1km 이내인 내게도 익숙한 곳이다. 문득 어제 아침의 그 평소와 달랐던 미묘한 거리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아, 그래서였나……!


‘나는 괜찮으며, 테러가 있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리고 안심해도 좋다. 내일모레, 나는 네팔을 떠나 이집트로 간다. 도착하면 다시 메일 보내겠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마주친 사람마다 테러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눈만 동그랗게 뜬다. 역시나(?) 지혜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다.


“마침 주시하고 있었어요. 왕궁 앞에서 시위도 빈번히 있으니까요. 이번 테러는 힌두교도들이 꾸민 짓이래요. 왕정 철폐와 공화정 도입에 반대해서요. 그들에게 왕은 신의 대리자다 보니까, 왕이 사라진 세계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해요. 공화정치를 신성모독의 일부로 보고요.”

“넌 대체 그런 이야기를 다 어디서 듣니?”

“이거요.”


지혜가 내민 것은 영자로 발행된 네팔 타임스다. 여기 와서 까지 신문을 이렇게 사서 챙겨보다니. 흠잡을 데 없는 신문방송학과 학생이다……! (앞서 밝힌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혜는 신방과 학생이다)


“이런 건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어?”

“카트만두에 도착해서부터요.”

“왜?”

“도보 여행 때의 전복 사고요. 그 사고 사후가 궁금해서 신문을 구해서 보기 시작했거든요.”

“...... 뭐라던?”


지혜의 낯빛이 검게 어두워진다.


“꽤 많은 승객이 사망했어요. 지붕에 타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죽거나 중상을 입었고, 버스 안에 있던 어린아이와 엄마도 죽었대요. 중상자가 대부분이고요.”

“……”

“……”


우리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는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몸이 깊게 깊게 가라앉는 것 같다. 버스 지붕에 앉아 우릴 향해 환히 웃던 소년들의 미소가 선명도 하다……


나는 애써 가벼운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나, 내일모레면 이집트로 떠나는 거 알지?”

“그럼요.”


지혜의 얼굴 가득 서운한 기색이 내비친다.


“준비는 잘 돼가요?

“준비랄 게 뭐 있어. 그냥 있는 짐 싸서 가면 되지.”

“비자는요?”

“입국 비자. 공항 도착해서 받으면 돼. 여긴 이집트 영사관이 없으니까.”

“가이드북은 구했어요?”

“오늘 아침에. 너는 언제까지 카트만두에 머무를 생각이야?”

“이번 달 말까지요. 네팔이 공화정으로 바뀌는 순간은 꼭 목격하고 싶어요. 굉장하잖아요. 우린 지금 한 국가의 체제가 바뀌는 역사의 현장에 와 있는 거라고요.”

“그렇지.”

“그거 알아요? 언니가 떠나는 5월 29일이 네팔이 공식적으로 왕정을 폐하고 공화정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거.”

“공교롭게도 그렇다고 들었어.”

“언니는 보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을?”


지혜의 두 눈동자가 반짝인다. 문득 그 눈동자에 페와 탈의 로잉보트를 젓던 사공을 바라보는 른진의 시선이 겹친다. 그녀의 것은 참 어둡고 무겁더랬다.


“……어제 있었던 폭탄 테러로 충분했다.”


지혜는 알겠다는 듯 웃었다.


“어쨌든 네팔 다음은 어디로 갈 생각이야?”

“꼴까따로 가서 봉사활동 마친 다음에는 미얀마요.”

“바쁘네.”

“그나저나 언니는 난데없이 이집트라니. 아예 본격적인 세계 여행이라도 할 생각이에요?”

“설마. 그냥 이대로 귀국하자니 마음이 좀 어중간해서 멀리 가보려는 것뿐이야.”

“그럼 이집트 다음은요?”

“그건 모르지. 귀국할 수도 있고. 일단 거기 가서 결정할래.”

“알긴 했지만, 언니는 참 즉흥적이네요. 그나저나 좋겠다. 이집트라니. 나도 가보고 싶었는데.”

“여기 남아있는 동안 조심해. 잘못하다가 소동에 말려들지 않게.”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방을 나가기 전, 지혜가 다시 나를 불러 세운다.


“아침 비행기죠? 나 꼭 깨워요. 언니 가는 길은 배웅하고 싶어요.”


난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만두에서의 마지막 날은 시끌벅적했다. 낮에는 타멜 거리를 걸으며 그곳만의 혼잡을 만끽했다. 아마 앞으로도 오래도록 다시 보지 못할 테니까. 이때만큼은 흙먼지도, 소음도, 릭샤꾼의 경적과, 상인들의 호객도 불쾌하지 않았다.


가든하우스에 들러 마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밤엔 늦게까지 숙소 사람들과 펍에서 술을 마셨다. 펍은 천장이 좁고 붉은 등을 켠 낡은 바였는데, 젊은 서양인들 일부가 옆에서 쉬지 않고 물담배를 피워댔다.


숙소로 돌아온 뒤, 이미 싸 두었던 짐을 확인했다. 혹시 빠트린 중요한 물건은 없는지도(예를 들어 휴대폰이나 노트북 케이블, 여권 등). 모든 확인을 마치자 어느새 새벽 5시다.


내가 탈 비행기는 7시 30분에 네팔을 떠난다. 그리고 인도의 델리 공항에서 내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떠나는 비행기로 트랜싯 해야 한다.


창밖으로 어두운 밤을 뚫고 푸른 새벽의 여명이 스며든다. 나는 침대를 나와 문가에 세워둔 배낭을 짊어졌다. 한국을 떠나온 지 한참이 지난 지금, 짐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나와 지혜의 방 앞에 섰다. 노크로 지혜를 깨우는 대신, 어제 이메일 주소와 함께 미리 편지를 써둔 엽서를 문틈에 밀어 넣었다.


그 사이 숙소 밖은 훨씬 밝아져 있다. 시간은 5시 20분. 미리 불러둔 택시가 밖에서 대기 중이다. 운전기사가 졸음 겨운 눈을 비빈다. 나를 태운 택시는 즉시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골목길을 덜컹거리며 빠져나온 택시가 타멜을 지나 카트만두 시가지를 관통한다. 도시는 동이 터오는 새벽에 어른어른 잠겨 있다. 일찍 깨어난 작은 빛들이 곳곳에서 반짝인다.


불현듯 네팔에서 보낸 나날이 떠오른다. 이곳에서 좋든 싫든 여러 일을 겪었고, 숱한 사람을 만났다. 게 중에는 스치듯 짧은 만남이었지만 평생 가슴에 남겠구나, 하는 사람도 있었고 입에 담기조차 싫은 사람도 있었다.


여하간 많은 일이,

있었다.


어쩐지 목이 멘다. 무엇이다,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마음이 먹먹히 차오른다. 나는 아마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이곳을 그리워할 것이다.


운전기사의 콧노래가 나직이 들려온다. 타멜 거리를 걸을 때면 온종일 들려오던 그 노래. 레썸 피리리. 저 멀리 카트만두 국제공항이 보인다.


오늘 나는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 1부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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