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8. 다시, 또! - 2

by 소라게




아침 일찍 서점을 찾았다. 이집트 출발까지 이제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차일피일 미루던 가이드북 이집트 편을 오늘은 꼭 구해야 한다.


이른 아침의 타멜은 낡고 빛바랜 역사, 그리고 화려한 색감의 현대가 교차하며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지런한 상점 주인들은 가게 앞을 쓸며 물을 뿌린다. 타멜 촉은 하수로 공사로 막혀 벌써부터 혼잡하다. 나는 곳곳이 깨지거나 움푹 파인 도로를 걸어 메인 로드로 향했다.


어제 필그림 북하우스에 가봤지만 이집트 편 가이드북은 없었다. 중고 서점도 가봤는데, 딱 한 권 발견했다. 그것도 3년 전 출간된 버전이었다.


그나저나 왜일까?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려운데, 거리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 이상한 느낌은 타멜 촉으로 나오자 더욱 또렷해진다. 승복 차림의 티베트 승려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좁은 거리를 줄지어 걷고 있다. 검붉은 색과 짙은 노란색이 교차하는 그들의 승복이 유독 눈에 띈다. 그들 중 몇 명은 손에 뭔가가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첫 번째 서점부터 네 번째까지 줄줄이 허탕이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다 뒤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타멜 서점이다) 히말라야를 그린 유화 액자와 엽서, 기념품을 동시에 파는 다섯 번째의 작은 서점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뭘 찾으시죠?”


서점 주인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다. 깔끔한 옷차림과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 때문에 사업가와 지식인의 냄새가 동시에 풍긴다.


“이집트 가이드북을 찾고 있어요. 가장 최근에 출간된 것으로요.”

“이집트 편이라면 제 서점에는 없습니다만.”


딱히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 기운이 빠진다. 여기도 없나. 한숨을 쉬며 카운터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그가 빙긋 웃는다.


“원한다면 아는 서점들에 전화를 넣어보죠. 혹시 모르니까.”

“정말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잠시만 기다려요. 참. 괜찮다면 차이 한 잔 하겠어요?”

“네? 아…….”


호의는 고맙지만, 그냥 얻어먹어도 되는 건가 싶어 망설여진다. 그러자 서점 주인이 거절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재차 권한다.


“손님이 오셨으니 대접해야지요.”


그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 마침 서점 밖 거리를 지나가던 소년을 불렀다. 소년의 손에는 빈 유리잔을 가득 얹은 쟁반이 들려 있다. 차이 가게에서 주문을 받아 주변 상가로 배달을 나가는 모양이다.


소년은 서점 주인에게서 주문을 받더니 곧장 서점을 나갔다. 그 후 주인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서점들을 뒤지느라 지친 나는 책이고 뭐고 들여다볼 기력도 없어 그저 멍해 있었다. 곧 주인의 잇따른 전화 문의가 끝나고, 소년이 차이를 가지고서 돌아왔다. 나는 서점 주인이 건네는 차이를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머금자, 혀가 얼얼할 만큼 강한 단맛이 느껴진다.


“다행히 내 친구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곧 이리로 가지고 올 겁니다.”

“감사해요. 시간은 오래 걸릴까요?”

“2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이름은 뭐냐, 국적은 어디냐, 직업은 뭐냐, 여행은 왜 왔느냐, 네팔에서 얼마나 있었느냐, 어디 어디를 가보았냐, 네팔의 인상은 어떠냐 등등. 내 대답을 듣던 주인은(그의 이름은 '람'이란다)은 ‘글을 쓴다’는 직업 항목에 이르자 눈에 이채를 띈다.


“그렇다면 지금 네팔 정세를 취재하러 온 건가요?”

“아뇨. 전 저널리스트가 아니에요.”

“저널리스트도 글을 쓰잖아요. 글을 쓰는 사람이면 저널리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사실 서점 주인은 지난번 만났던 마사지숍 사장처럼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지금 세계 각국의 외신들이 몰려와 있어요. 타멜이 어느 때보다도 많은 외국인들로 북적이는 게 다 그런 이유죠. 지금 네팔은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 있어요. 수백 년 간 지속되던 왕조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시작되려는 역사적 순간이죠. 왕은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절대군주라니, 시대착오도 정도가 있죠. 더욱이 좋은 왕도 아니었거든. 그야말로 악랄한 인간이에요. 즉위 이후 지금까지 사리사욕에 눈멀어 국민들을 약탈하고 수탈해왔죠.”


듣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진다. 사실 지난번 마사지숍 사장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들었던 의문이다. 하지만 순수한 기대로 가득 한 그의 표정을 보며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지 그냥 삼켜지지 않는다.


“네팔 국민은 공화 정치가 네팔에 새 시대를 열어줄 거라 기대하나요?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시대를?”


서점 주인이 나를 물끄러미 본다.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과연 이상적인 국가로 변할 수 있으리라 보나요?”


나는 답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변화에는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따르잖아요. 변화를 기대한 만큼 실망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서점 주인이 나직이 웃는다.


“당연한 말입니다, 마담.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 같은 사업가들은 생각이 달라요. 우린 기본적으로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아요. 하긴 요즘 같은 세상에 누군들 쉽게 믿겠습니까마는.”

“……”

“지금 네팔 정세는 중국과 인도에 의해 테라이 사이드와 힐 사이드로 양분돼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높으신 윗분들의 권력다툼이지, 막상 국민의 당장의 관심사는 아니죠. 평범한 사람들이야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바쁘지. 정권을 누가 잡건, 우리가 몹시 힘든 과정을 거쳐 안정기를 찾을 거란 사실은 똑같아요. 그걸 아니까, 돈 있는 일부는 이민을 선택하거나, 자녀는 먼 곳으로 유학을 보내죠. 아마 네팔의 내정은 오랫동안 시끄러울 겁니다. 그러나 외부의 대단한 이목은 끌지는 못하겠죠. 그게 약소국의 서러움이니까요. 우린 그저 이 혼란이 끝나고, 상황이 안정되는 시기가 최대한 빨리 오길 바랄 뿐입니다.”


그는 냉철하고 현실적이었다.


“어쨌든 시대의 변화를 막을 순 없어요. 걱정되는 건 대립하는 집단들 사이의 흉흉한 분위기지. 요새 영 심상찮거든요. 연일 신문에 나는 살인사건들도 대부분 마오이스트들과 관련이 있고. 게다가 오늘만 해도 힌두교도 집단들이…….”



그가 말을 이으려는데, 낯선 남자가 손에 뭔가를 들고 막 서점으로 들어온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익숙한 파란색 표지의 가이드북이다.


“이분인가?”


남자는 서점 주인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집트 편인가요?”

“그래요. 직접 확인해 보세요.”

“포장 뜯어봐도 돼요?”

“그럼요.”


내 손에 건네진 가이드북 표지에는 거대한 낙타의 상반신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다. 배경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사막이었다. 나는 포장을 뜯고 뒷장을 펼쳐 출판연도를 확인했다. 작년에 출판된 것이다.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저한테 정말 중요했던 거예요.”

“행선지가 이집트인 가요?”

“네.”

“먼 곳으로 가는군요.”

“그러게요.”


때마침 서점 앞으로, 릭샤 한 대가 따릉따릉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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