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시, 또! - 1
새 숙소 바로 옆은 작은 이슬람 사원이다. 덕분에 아침마다 기도 방송이 요란하다. 내가 투숙하는 객실 여닫이 창은 사원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매일 아침의 종소리와 새소리가 청명하다. 안뜰 한 구석에 우뚝 선 사원의 아름드리는 내 방 창가까지 가지를 뻗친다.
3층 객실 테라스에서는 사원 아름드리의 윗가지에 손이 닿는다. 타멜의 난리통에 시달린 날이면, 테라스 의자에 앉아 값싼 와인을 홀짝거리며 검고 울뚝불뚝한 가지들을 가만히 보았다. 이따금 날아온 새들이 가지에 잠시 앉았다가 어디론가 날아가곤 했다.
좋은 건 또 있다. 바로 새롭게 발견한 크로와상 맛집인 조그마한 카페다. 카페는 숙소에서 타멜로 나가는 골목 입구에 있다. 테이블은 딱 4개로, 2개는 건물 안에, 2개는 바깥에 놓아둔다. 테이블 화병엔 매일 다른 들꽃이 장식되고, 갓 구운 크로와상이 나오며, 신선한 과일을 즉석에서 갈아준다. 카페 직원은 모두 반듯이 다림질한 와이셔츠를 입고 일한다.
이 카페의 크로와상은 정말이지 훌륭하다. 파리에서도 이렇게나 맛있는 크로와상은 먹어본 적 없다고 생각될 정도다. 풍부한 버터향과 빵 특유의 냄새는 물론, 따끈하고 촘촘한 속살은 찰지고 부드럽다. 한 조각 뜯어서 입에 넣고 씹으면 그 향이 눈 밑까지 확 퍼지며 행복이 눈가까지 넘실넘실 차오른다.
이곳에서 과일을 넣은 그리스식 요거트나 커피를 곁들어 크로와상을 먹는 것이 요즘의 내 아침이다. 나는 거의 매일 여기서 아침을 먹고 책을 읽었다. 숙소 1층엔 가든하우스처럼 책이 진열된 작은 선반이 비치되어 있어서, 주로 거기서 책을 꺼내온다. 또는 최근 우연히 발견한 타멜의 한 중고서점에서 빌린 한국 도서를 읽는다. 운이 좋으면 갓 출판된 신간을 발견하는 일도 있다.
카트만두 탐험에 푹 빠진 지혜 대신, 나는 새로 사귄 여행자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파키스탄으로 넘어가기 위해 네팔 주재 영사관에서 비자 발급 수속을 받고 있는 수현이, 아기 사슴을 꼭 닮아 우리끼리 ‘밤비’이라 부르는 연우 언니, 머리를 빡빡 민 페드로, 어릴 적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한국말이 서툰 지연, 지영 자매들.
이들과 어울리는 않을 때에는 로컬 지역을 산책하며 길거리 음식을 사 먹거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라씨 가게에서 끝내주는 라씨를 사 먹기도 했다. 엽서를 사서 기억나는 모두에게 편지를 쓰는 날도 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밤마다 자기 전엔 세계지도를 펼쳐 본다. 여전히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면서.
오늘은 카페에서 크로와상을 포장해 와서 숙소 테라스에 앉아 먹었다. 손에는 어제 중고서점에서 빌린 ‘싯다르타’가 쥐어져 있다. ‘황야의 이리’를 시작으로 줄줄이 탐독한 헤세의 작품 가운데 ‘싯다르타’도 두 번째인가 세 번째 즈음에 끼어 있다. 그랬던 책을 서점에서 발견했다.
『(중략) ……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에 대하여, 싯다르타에 대하여 가장 적게 알고 있지 않은가!』
처음 읽었을 때는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앞마당에 새겨져 있었다던 고대 그리스의 격언을 빌린 것 같다고만 생각하고 넘긴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독 이 글귀의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나야말로 나에 대해 가장 적게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문장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이제야 절감한다. 나는 실로 나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여태 내가 생각한 ‘나’는 아마 소망의 결과물일 것이다. 박약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갑옷처럼 덮어 씌운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다’라는 소망. 그 마음은 나의 욕망이 취사선택한 ‘바람직한 나의 모습’들을 자석처럼 끌어모았고, 실제 ‘나’의 겉을 덧대었겠지. 그것이 진짜라고 착각을 일으킬 만큼 그럴싸하게, 하지만 정작 그 속은 텅 비워둔 채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나의 뭔가를 아는 것보다, 실은 내가 나에 대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그렇다면 세상일도 그렇겠지. 내가 나에 대해서도 까마득히 모르는데, 저 바깥은 얼마나 무한한 미지일까?
어쩌면 모든 것의 출발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깨달음.
“여기서 뭐해요, 언니?”
고개를 돌리니 수현이가 서있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살갗을 한 채 맨발로 복도를 쏘다니는 그녀를 보고 처음에는 남미 고원지대에 사는 소수민족인 줄 알았다. 한국인의 ‘ㅎ’ 자도 떠올리지 못했다.
“책 읽네? 무슨 책?”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아.”
심드렁하게 대답한 수현은 옆 의자에 앉아 다이어리와 엽서를 주르륵 펼친다.
“파키스탄 비자는 곧 나와?”
“어제부터 오늘까지 총 12시간 기다려서 겨우 신청서 넣었어요. 일주일 뒤에 찾으러 오래요.”
“왜 그렇게 늦는데?”
“제가 아나요. 아마 파키스탄이 분쟁지역이라서 그렇겠죠. 심사도 까다롭고. 그런데도 왜들 그렇게 못 가서 안달인지.”
그러는 너는? 이라고는 묻지 않고, 그냥 피식 웃어넘겼다.
“여기 오기 전에는 인도에 있었다고 했나? 얼마나 있었어?”
“3달.”
“집에는 안 가?”
“그러는 언니는요. 저번에 세계지도 보고 있던데. 집에 갈 사람이 세계지도를 볼 리는 없을 테고. 다음은 어디예요?”
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기지개를 쭉 켰다.
“글쎄. 아직 어디로 갈지 못 정했어.”
“그럼 이집트는 어때요?”
수현의 무심한 말에 귀가 솔깃하다.
“이집트?”
수현이 말했다.
“포카라에서 만난 톰인가 잭인가, 하여간 걔가 그랬는데, 인도에서 이집트로 200불 정도면 갈 수 있대요.”
순간 입이 떡 벌어진다.
“거짓말! 비행기 값이?”
수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에어아라비아 알죠? 아랍 에미레이트 계열의 저가항공사요. 인도 델리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잇는 노선이 에어아라비아에 있어요. 사무실은 카트만두에 있고요. 그걸 타면 편도가 200불 정도래요.”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200불에 이집트라니! 말도 안 돼! 너무나 현실적인 숫자가 툭 던져지자, 갑자기 눈앞에 모험과 미스터리가 살아있는 나라, 여행가라면 대개가 한 번쯤 꿈꾸는 사막과 피라미드의 나라가 환상처럼 펼쳐진다.
이집트는 고등학교 때부터 가보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절친 한 명이 10대 때부터 유명한 고대 이집트 역사문화 덕후였고, 어울리던 나도 저절로 흥미가 깊어졌다. 그렇지만 한국-이집트 항공비용이 비싸서 감히 엄두를 못 냈다. 그런데 그런 나라를 (편도지만) 단돈 200불에 갈 수 있단다!
“델리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서 트랜싯이 가능할 거예요. 굳이 인도로 들어가지 않고도 공항에서 뻗대다가 가면 될 걸요.”
“정말?!”
“그 친구 말은 그랬는데, 혹시 모르니까 한번 자세히 알아봐요.”
나는 당장 인터넷 카페로 달려갔다. 그리고 영문, 한글 할 것 없이 검색 사이트며 에어아라비아 홈페이지까지 샅샅이 뒤져 수현이 알려준 정보를 확인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델리 공항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국제공항으로 가는 에어아라비아 저가항공편이 떡하니 존재했다!
내적 댄스를 추면서 숙소로 돌아온 나는 세계지도를 펼쳐 <Egypt>에 핑크색 형광펜을 쭉 그었다. 그러자 세계 각지의 크고 작은 지명으로 어지러운 지도 위에 이집트란 글자가 또렷이 도드라진다. 가슴이 기대감으로 빠듯하게 부푼다.
드디어 정해진 것이다. 이다음의 목적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