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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Sep 17.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3. 메세타의 나비 - 3 



테라딜로스 데 로스 템프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로 향하는 길가, 수풀이 우거진 어느 그늘 아래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필립이다. 바람둥이 예술가 필립.


“재인. 오랜만이야.”


머리만 한 헤드폰을 낀 채, 신발과 양발을 벗고서 땅바닥에 철퍼덕 앉은 그의 발이 처참하다. 터지거나 곪거나, 이제 막 생긴 물집이 줄잡아 대여섯 개는 된다.


“스테파니아는?”


한동안 그와 붙어 다니며 소소한 로맨스 버라이어티를 찍던 오스트리아 아가씨에 대해 묻자, 필립의 어깨가 가볍게 올라갔다 내려온다. 


“글쎄. 벨로라도Belorado에서 헤어진 뒤론 만나지 못했어.”


벨로라도라면 그가 스테파니아와 함께 밤을 보냈다고 순례자들 사이에 소문이 짜하게 퍼졌던 곳 아닌가? (새벽 일찍 길을 나선 순례자들이 같은 호텔 객실 베란다에 자다 일어난 차림으로 같이 담배를 피우던 두 사람을 목격했다) 그럼 원나잇 후 바로 쿨하게 각자 갈 길 갔다는 건가? 

뜻밖의 문화충격(?)에 대꾸가 궁색하진 날 대신해 필립이 말한다.


“하룻밤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서로 좋은 추억을 남겼으면 된 거야(이 대목에서, 정말로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듯 보였던 어느 이스라엘 순례자 얼굴이 기억을 스쳤다). 우린 각자의 역할이 있어 이 길을 왔으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과제에 충실해야지 않겠어. 난 순례를 위해 왔지, 연애를 하려고 온 게 아니야.”


그래. 그래서 순례 중에는 연애 말고 원나잇만 하기로 했나 보지.

거참 알뜰살뜰한 순례다.  


스테파니아가 얼마나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인지 곁에서 본 만큼, 필립의 수작이 썩 달갑지는 않다. 어쩐지 약해진 사람의 약점을 파고드는 인간 같아서. 머릿속에 ‘저놈의 아랫도리는 낄 데 안 낄 데를 모르냐 ‘는 말이 입술 바로 앞에서 울렁이지만, 어금니로 꾹 씹어 삼킨다. 


날은 무덥다. 차가 다니는 포장도로의 아스팔트는 녹아내릴 듯이 걸쭉한 검은빛으로 일렁인다.


“너 뭐 하는 사람이랬더라? “ 

“나? 사진작가.”


나는 그의 행색을 훑어본다. 어디에도 사진기는 없다. 일회용 카메라조차도 없다. 그는 내 시선을 알아차린 듯 씩 웃으며 윙크를 한다.


“사진기가 왜 필요해? 내 눈으로 찍으면 되는 걸.” 

“사진작가라며.”

“맞아. 하지만 뭐 때문에 굳이 이곳에서 예술을 조장하려고 애쓰겠어. 이 길을 걷는 자체가 어떤 예술보다 심오한데. 삶이 그런 것처럼 말이야. 뭔가를 찍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내 눈이 받아들이는 그대로 겸허히 수용하는 것이 이번 여정의 목적이라고.”


입에 기름칠을 해도 저보다는 덜 미끄럽겠다. 나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의 청산유수 궤변이 웃기기도 해서 깔깔 웃었다. 필립이 묻는다. 


“재인은 뭐하는 사람이지?”

“글을 써.”


”예술가 동지가 또 있었군.”이라고 말하는 필립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나는 굳이 그와 동지로 묶이고 싶진 않았지만, 내버려 두었다. 그보다도 그가 한 ‘또’라는 표현에 방점이 찍혔다. 


“또 누가 있어?”

“부르고스를 지나면서 만난 사람이 한 명 있었지. 스트리트 아티스트래. 거리에서 그림을 그려주는 것으로 먹고사는 화가 말이야.”


누구지? 모르는 사람이다.


“슬쩍 봤는데 작품이 근사하더라고. 특정한 양식은 없지만,  거칠고 자유스러운 점이 마음에 들었어. 거리의 정신 그 자체? 학교에서 배우진 않고 독학했다더라고.”

“……”

“사조가 불분명한 예술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 굳이 순수예술이니 대중예술이니 구분해가면서 말이야. 그런데 결국 그런 기준은 시대마다 다르잖아.”

“……“

“사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예술이 뭔지 좀 고민해보고 있어. 그래서 사진기도 아예 두고 온 거야. 나는 예술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지만, 졸업할 즈음엔 엄청나게 후회했어. 배운 만큼 뭔가 빼앗긴 것 같더라고. 스스로 깨닫지 못한 사이, 이미 어떤 틀 안에 갇혀버렸으니까.”

“그걸 또 깨고 나와서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해나가는 예술가들도 있잖아? 틀 안에 갇힌 적 없는 것보다, 틀을 깨고 나와본 쪽이 더 대단하다 싶은데. 이런 말 하는 나도 대단치는 않지만.”

“호오.” 

“성장은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여러 패턴의 연속이라고 생각해. 예술에서도 삶에서도. 우린 항상 정형화된 어떤 패턴을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그래 봐야 넘어가는 것은 탈패턴화가 아닌 새로운 패턴으로의 이동인 것 같아. 나는 탈패턴화도 결국 하나의 패턴이라 생각해. 자유롭기 위해 애쓸수록 자유 자체에 얽매이게 되는 것처럼.”

“뭐야, 그럼. 인간은 영원히 자유롭긴 글렀나?”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거야, 대단히 절망적인데. 대안은 없어?”


나는 조금 생각하다 대꾸했다. 


“기껏해야 내가 받아들이고서 살아갈 수 있는 패턴을 선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정도겠지. 그마저도 극히 소수나 가능한 얘기고.”


듣고 있던 필립은 길고 높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더니 아무래도 좋다는 듯, 기지개를 쭉 켰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죽는 순간까지 징검다리 건너듯, 이 패턴과 저 패턴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다가 끝나겠군. 그래도 뭐, 좋아. “

”……“

“그저 가만히, 멀거니 한 자리에서 염세하는 것보다야 훨씬 즐겁고 설레지 않겠어.”

“……그야 그렇지?”


한바탕 우다다를 해대다 불쑥 널브러진 고양이처럼, 이 대화에 흥미를 잃은 필립은 다시 헤드폰을 귀에 얹는다.  그것을 신호로, 나는 잠시 어깨에서 내려놓았던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섰다. 


“부엔 카미노.”

“부엔 카미노!”


그는 노래하듯 대꾸하며 손을 흔든다. 

나는 미련 없이 그를 등지고 다시 메세타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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