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에 나와 마누라는 인천공항에서 중국 사천성 성도시 쌍류 공항으로 입국하였다.우리 집은 연길에 있기에 가까운 심양으로 입국하면 많이 편리하였지만 그 당시 국내 각 지방마다 코로나 방역정책이 서로 달랐다.심양으로 입국하면 심양에서 집중격리 두주일, 다음 연길에 돌아가서 집중격리 한주일,그리고 다시 집에 들어 가서 두주일을 하여야 하였다.하여 나는 여러모로 알아 본다음 마지막에 사천성 성도시로 입국하기로 하였다.
그때 성도시의 코로나 상황은 비교적 좋은 편이였다.나와 마누라는 두주일간 화려한 호텔에서 격리하고 새해 전날에 아들 집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주간의 주택 격리를 하게 되었다. 격리가 끝나 세주일 만에 밖으로 나온 나는 바깥 세상의 황홀함을 심심이 느꼈다. 길에 다니는 많은 사람을은 마스크도 쓰지 않고 자유스럽게 거리를 다녔다.
나는 어떻게 연길로 돌아가는 방법을 여러방면으로 연구하였다. 그때 제일 편리한 수단은 성도에서 료녕성 영구시를 거쳐 연길로 가는 방법이였다.그런데 내가 정작 항공권을 예약 하려고 하니 하루 밤새에 그 항공편이 없어졌다.영구에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였다. 다시 다른 항공편을 찾아보니 대련을 거쳐 연길로 가는 항공편이 있었다. 그러나 대련에도 코로나 환자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었다. 재수가 없으면 대련을 거쳐서 연길로 가도 다시 격리를 해야되지 않을가 근심 되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상해에 있는 딸이 우리를 해남성 삼야에 가서 음력설을 지내자고 하였다.하여 우리는 삼야에서 한달반이란 유유한 휴식을 지냈다.난생 처음으로 풍경이 아름답고 겨울에 바다가에서 수영도 하면서 잊을수 없는 나날을 보냈다. 삼야가 그처럼 유혹적인 도시이지만 오래 지낼수는 없었다.삼월초에 우리는 딸과 외손녀와 함게 상해로 가려고 준비하였다. 상해로 가기전에 우리는 해구시에서 사일간 유람을 하고 떠나려는 전날에 상해에서 코로나가 터졌다.우리는 상해로 갈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거의 상해와 비슷한 시간에 길림성에서도 코로나가 터져 버렸다. 나는 상해의 상태가 한주일 열흘 정도면 나아질것이라고 생각하고 해구에서 민속집을 찾아 상황을 지켜 보기로 하였다.그러나 현실은 나의 생각과 완전히 상반대 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상해나 길림이나 코로나 상황이 하루하루 엄중해졌다.
이렇게 우리 네 사람은 해구시에서 한달을 지내게 되었다.상해는 갈수 없고 해구시에도 계속 있을수 없었다.다시 성도에 있는 아들 집으로 돌아 가고 말았다. 아들 집에서는 유유한 사간을 보내면서 상해나 길림의 코로나 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우리가 한국에서 일을 하는 십여년간 우리 네 식구는 세곳에 갈라져 살면서 함게 만난것은 아마 십여년도 넘었다.
하루하루 상해나 길림의 코로나의 변환점을 기다리면서 성도의 아들집에서 두달을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 지금 연길로 갈수 있어요.》
오월 말에 길림성의 코로나가 점차 좋아지기 시작하자 매일 언제 집으로 갈수 있는가를 주시하던 딸이 마침내 격동된 목소리로 환호하였다. 거의 반년을 거쳐 연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연길에서 마음 편하게 한달가량 놀려고 생각하던 딸과 외손녀는 겨우 반달을 지내고 상해의 코로나 상황이 점차 좋아지기 시작하니6월 말에 장춘을 거쳐 시집이 있는 산동 연대로 가게 되었다. 장춘에서 사일간 유람할때 장춘의 유명한 정월담 풍경구에서 우리 넷은 공원의 깨끗한 널판자 오솔길의 그늘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정월담으로 오기전에 길옆 슈퍼에서 준비한 간이 음식들이다.우리 넷이서 화창한 봄날의 아늑한 그늘에서 한참 희희닥 거리며 식사를 하는데 간혹 삼삼오오 유람객들이 옆을 지나다가 우리를 바라 보면서 《정말 행복하네요.향기가 넘치네요》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이 몇달간 딸과 외손녀를 데리고 수없이 야외에서 이런 시간을 보냈었다.그러나 그때는 우리가 행복속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기실 행복이란 자기가 스스로 감수하여야 하는것이다.세상에 영원히 행복한 사람이 없으며 영원히 불행한 사람도 없다.그 누구도 행복한 시절,행복했을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감지하지 않으면 알수가 없는것이다.
다음날 장춘에서의 사일간 유람을 마치고 나와 마누라는 딸과 외손녀를 비행장까지 바래다 주었다.딸과 외손녀를 보내고 연길로 오는 고속열차를 타러 가는데 딸에게서 문자가 날아 왔다.
《웨웨가 외할머니를 볼수 없다고 울고 있어요.》
나도 코 마루가 시큼해 났다. 반년간 코로나로 하여 여기저기 피난 다니면서 수없는 불편은 껶었지만 다른 한 방면으로는 코로나로 하여 딸과 사랑스러운 외손녀와 매일 화기애애한 기분 속에서 거의 반년이란 긴 시간을 보내왔다.코로나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였다.
《우리 한국에 가요?》마누라는 언녕부터 한국에 돌아가서 일을 하자고 졸라댔다.
《힘이 없어 이젠 일 하기가 싫은데.》나는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 자신도 집에서 아무일 없이 보내는것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하여 한국에서 귀국한지 열한달 만에 다시 한국으로 떠났다.
여동생 집에서 매일 호의호식 하고 한국에 십여년간 있었지만 가보지 못한 아버지의 고향 청주에도 가 보면서 열흘을 보냈다.
이렇게 매일 지낼수는 없지 않아?원래하던 간병일은 어느 때든지 할 생각만 있으면 할수 있었다.그러나 한국의 코로나가 또 다시 상승세를 보이고 특히 요양병원에 들어가면 그 곳은 코로나가 떠나지 않는 상황이라 인차 코로나에 걸릴수 있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코로나를 피하려고 집에 그냥 박혀 있을수는 없었다.
끝내 한국에 입국한지 열하루 만에 다시 요양병원에 간병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간 요양병원에는 그냥 코로나 환자가 있다고 하였다.
요양병원에서 일을 시작한지 열흘만에PCR검사에서 코로나에 감염되었다는 결론을 받았다. 다행인것은 아무런 증상도 없고 병실에서 환자를 돌보면서 문 밖을 못나가는 조건으로7일간 격리하였다.
팔일째 되는 날, 격리가 해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