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증명(證明)

by 권태윤

우리 국민은 소위 말하는 ‘사회지도층’들에게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나를 지도하는 자들이라면, 최소한 나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은 삶’이란, 보고 배울 게 있는 삶입니다. 누군가를 스스로 따른다는 행위의 바탕에는 존경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우리 사회지도층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지도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지도하는 자리에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당연히 신뢰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존경심이 없으니, ‘믿고 따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습니다.


문재인정부 때부터 인사청문회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논문표절, 음주운전, 부동산투기 따위는 아무나 하는 일상적 범죄인듯 치부되었습니다. 의심은 비공개 라는 습지에서 번식합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의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백마디 변명보다 명확한 것은 한 장의 진실입니다. 인사청문회는, 오히려 그동안 말로만 보여준 자신들의 청렴한 삶을 입증시킬 멋진 기회입니다. 부디 기회를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론 마구잡이식 의혹 제기 행위가 온당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박근혜 전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불거진 숱한 의혹들.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스러운 숱한 ‘카더라’ 통신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런 폐언(廢言)들을 연일 쏟아내던 언론들은 지금껏 승자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명확한 증거도 없이 ‘뭔가 냄새가 난다.’고 지껄이는 ‘음모론자(陰謀論者)’에게도 혈세로 돈을 주는 나라입니다. 입만 열면 주술적 음모론을 펴는 이런 자들이 결국 ‘생사람’을 잡습니다.


공적 존재에 대한 의혹 제기는 정당하지만, 근거도 내놓지 않으면서 그 의혹을 부풀리는 행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입증책임(立證責任)이 의혹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네가 거기에 없었다는 것을 네가 증명해라.” 이게 바로 야만(野蠻)이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언행입니다. “네가 거기에 없었다는 것을 네가 입증하지 않으면, 너는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법이 살아있는 상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은, 하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면 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 보라고 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은 끝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없다는 것을 없다고 증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악마의 증명(devil's proof)'이라고 합니다.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아주 비합리적인 논리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선거를 앞두면 특히 온갖 음해와 모략이 판을 칩니다. “네가 죄가 없다면 네가 증명하라.”며 온갖 의혹을 퍼뜨리고 비난하는 몰상식한 요구가 당연시됩니다. 상대의 유죄(혐의) 또는 의혹을 입증할 책임은, 제기하는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법률 소송상에서도 입증책임이 있는 자가 이를 증명하지 못할 경우 법률적 판단에서 불이익, 즉 패소의 부담을 갖습니다. 공적 존재에 대한 의혹 제기가 일정 부분 용납된다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線)은 있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명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특히 사회지도층이라면, 누가 요구하기 전에 자신의 도덕성을 스스로 입증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 노력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 성실히 소명하려는 자세는 권리가 아닌 의무입니다. 자기 도덕성의 붕괴에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은폐하고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 인간에게는 더이상 기대할 것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의혹에 대한 성실한 소명과 입증은 대중의 신뢰를 확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리노이 출신 정치가인 링컨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1858년 어느 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환경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만큼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도덕적 세계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아마 영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행위와 진실의 증명은 리더 스스로가 살고, 공동체가 함께 성장하기 위한 가장 신실(信實)한 행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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