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는 고등학교 때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겨울,그 애의 이모가 있는 섬에 함께 갔다. 생전 처음, 추운 겨울에 배를 타고 만났던 바다와 섬은 넓고 깊었다. 우리는 목포에서 배를 탔는데 작은 배에서 만난 바다속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끝을 알 수 없었고 스무살의 나는 난생 처음 느끼는 두려움에 설레었다.
뒷날에 본 영화 <피아노>에서 여주인공이 영화 말미 뛰어들던 바다의 느낌을 느끼게 하던 검푸른 바다였다.
우리는 그 섬에서 일주일을 있었다. 섬은 한 시간이면 끝까지 가볼 수 있었고 두 시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었다.
섬의 날씨는 눈을 뿌리다 어느 순간 초록색이 완연한 보리밭을 지나게 해 주었다. 섬의 끝에는 모래사장과 바다가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고체연료로 커피를 마시고 파도 소리를 듣다가 돌아오곤 했다.
때로는 아무 것도 못하고 검푸른 바다에 내리꽂히는 눈을 보기만 하다 눈을 맞으며 돌아오기도 했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두 시간을 가고 오는 바닷길을 날마다 걸었다.
야학을 알게 된 내가 그 애를 불렀고 그애는 늘 그렇듯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리고 야학의 선배와 사랑에 빠졌다. 그애의 집들이에 가서 조그만 씽크대, 그렇지만 반짝이던 새씽크대에 찌개를 끓이고 그 찌개가 넘친 것을 닦아주며 나는 이제 그 애를 만날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을 때처럼 헤어졌다.
내가 다시 그 애를 만났을 때 그 애는 많이 아팠고 그리고 아프던 그 애가 떠나갔을 때, 남해의 섬에서 만났던 이모는 문상객의 신발을 정리하고 있었다.남겨질 사람을 위해 떠나는 그 애의 뒷모습은 섬에서 내 앞을 걸어가던 모습처럼 조금은 쓸쓸하지만 담담했다.
독문과를 간 그 애가 부르던 노래와 그 애의 독일어 연극을 기억한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짧은 단역이 그 애에게 주는 빛을 느끼며 그 애야말로 우리 중에 가장 대학생 같다고 생각했다.
그 애만이 입을 수 있던 바바리코트를 기억한다. 늘 나보다 차갑고 담담했지만 나보다 더 뜨겁게 가슴으로 안고 살던 친구였다.
어느 순간 그 애는 불처럼 그러나 아닌 것처럼 사랑을 하고 자신의 삶을 오롯이 감당하며 살았는데 그 애가 섬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그렇게 살았는데 나는 그걸 몰랐다. 내가 제일 그 애를 몰랐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다가 그 애와 갔던 섬을 떠올렸다. 기사를 찾아보니 그 섬에는 이제 다리가 놓였다고 한다. 좀 더 찾아보니 2020년 1월 문화일보에 이 섬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 실려있다. 이 기사의 제목이 '별것 없는 섬이 주는 특별함'이라고 하니 오랜 시간이 흘렀고 다리가 놓였지만 섬은 여전히 내가 생각하는 그 섬인가 보다.
그 애와 갈 수 있다면 벌써 한 번은 가봤을까. 언젠가 가보려던 그 섬을 이제는 영영 가볼 수 없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