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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 앤 본: 링 안에서의 삶

자크 오디아르 〈러스트 앤 본〉(2013) 리뷰

by 도경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영화 러스트 앤 본에 대한 평론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씨네21, 2013)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1)



마음을 울리는 이 미문에서, 우리는 사랑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논리가 결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포스트에서는 ‘없음-결여’가 아닌 ‘있음-충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러스트 앤 본의 한국 포스터에는 “이 사랑, 다시 나를 살게 한다”는 캐치프레이즈가 쓰여 있다. 홍보사에서 핵심으로 잡은 키워드가 사랑과 구원이라는 뜻인데, 나는 이 영화가 구원까지의 논의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과 정직한 대답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있음과 충족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알리는 어린 아들(샘)과 함께 기차를 타고 있다. 아들은 극심한 허기를 느끼고 아버지인 알리에게 배고프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알리에게는 고정된 급여가 나오는 직업도,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감자칩을 포함해 승객들이 먹고 남은 음식들을 주워 먹고 아들에게도 건넨다. 기차를 타고 내려서는 한 가게에 들어가 소매치기를 하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들은 맥도날드의 포장 봉투를 뒤집어 쓰며 해피밀 장난감으로 추정되는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아내와 결별한 알리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누나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알리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복싱과 킥복싱을 꽤 오래 배웠던 알리는 클럽 경호원 일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테파니라는 한 여성을 만나게 되고, (아마 성적인) 호감을 느껴 번호를 남기게 된다. 스테파니는 당시 연인으로 보이는 한 남성과 동거 중이었으나 범고래 조련사로 일을 하던 도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양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사고로 양쪽 무릎 아래를 잃은 스테파니가 문득 예전에 번호를 남겼던 알리에게 연락을 하며 시작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삶의 의욕을 잃은 스테파니는 밖에 나가는 것조차 거부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수영을 하는 알리를 보고 다리를 잃은 이후 처음으로 수영을 한다. 스테파니는 갈증이 났던 자유를 맛보게 되고, 이후 혼자 있는 방에서도 음악을 듣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샤워조차 버거워 포기해버린 채, 무기력한 모습이었던 스테파니의 이전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알리는 돈을 벌기 위해 도박에 가까운 복싱 싸움에 참가하게 된다. 링은 없고, 보호구도 없으며, 한 사람이 죽기 직전까지 다른 한사람을 패는 것이 경기의 룰이다. 고작 500유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스테파니는 이해하지 못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파니는 의족을 차게 되고, 다시 수영을 하자는 알리의 말에 의족을 찬 채 옷을 벗을 용기가 없어 그러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스테파니가 알리와 시간을 보내며 점차 바지를 걷어 자신의 의족으로 된 종아리를 드러낸 채 클럽으로 향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클럽에서 알리는 예쁜 다리를 가진(영화에서는 자신의 다리를 가진 채 춤추는 젊은 여성들의 하체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여성과 밤을 보내려 나가고, 스테파니는 이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다음날, 알리에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라며 마음을 표현한다.



인간답게 사는 것



이 영화의 중요한 대사는 스테파니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한 문장이다. 이어지는 장면 역시 이 한 문장으로 귀속되는 것을 보아 이 대사가 갖는 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스테파니를 만나기 전, 그리고 스테파니를 만난 이후 어느 지점까지도 알리는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과 관계를 맺는 삶에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극도로 서툰 사람인 것처럼, 그리고 또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아끼던 개가 팔려나가는 장면을 보고 이성을 잃고 만 아들의 머리를 가구에 박아버리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도박 복싱으로 번 돈으로 해피밀 장난감 따위가 아닌 근사한 자동차 장난감을 사주는 것으로 화해를 건네는 것을 보니 그러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또 주체할 생각도 그다지 없어 보인다. 스테파니의 감정의 토로에 대한 대답이 섹스를 은유하는 “나 ‘출장’ 가능한데”인 것을 보면, 알리에게 삶이란 먹고 배설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의 가치도 아니었다.


참 희한한 사실은 도박 싸움을 스테파니가 관리하게 되면서, 오히려 스테파니는 이로부터 자유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점이다. 바지 아래로 의족을 드러낸 채 투기금을 걷고 세는 스테파니는 다리에 ‘DROITE(오른쪽)’이라는 타투를 새긴다. 타투를 새김으로써 스테파니는 양쪽 다리를 잃은 자기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새로운 육체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게 된 셈이다.


반면 알리는 자유를 잃어가며 역설적으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찾게 된다. 마트의 직원을 감시하는 불법 카메라를 다는 일에 애매하게 가담한 알리 때문에, 해당 마트의 캐셔였던 누나가 직장에서 잘리게 되고, 이로 인해 누나의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초반부터 나오듯 알리의 누나는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들을 가져와 먹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알리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려 하지만, 의도가 어찌되었건 알리는 멀쩡한 누나의 직업을 잘리게 만든 장본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혈육에게 내쳐진 알리는 아들조차 두고 떠난 채 스테파니에게 연락하지 않고, 북부 스트라스버그로 떠난다. 그곳에서 알리는 복싱 연습을 하며 대회 준비를 한다. 그곳에서 잠시 아들과 재회한 알리는 새하얗게 눈이 온 곳을 아들과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얼음이 언 호수에서 미끄러지며 놀다가, 알리가 노상방뇨를 하던 도중 아들이 빙판 아래 구멍으로 빠져버린다. (이 영화의 다른 특징으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지점을 강한 사운드나 자극적인 장면 없이, 그저 가만히 비추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점이다. 이 장면 역시 알리를 비추고 있는 뒤로 아들이 구멍 아래로 빠지는 것이 어떤 충격음조차 없이 조용히 지나간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알리는 빙판을 머리와 손, 온몸을 이용해 피가 나도록 부순다. 다행스럽게도 알리는 아들을 구하고, 병원으로 이송한다. 알리의 아들이 의식을 되찾는 시간까지, 알리는 혼자였다. 비록 알리의 아들을 알리에게 데려와준 매형이 경과를 지켜봐주기 위해 와주지만, 자신의 작고 여린 아들이 다시금 세상에 ‘살아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그 영겁 같은 시간 동안 알리는 혼자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자, 이 영화의 없어서는 안 될 장면은 단언코 이때 걸려온 스테파니의 전화다. 매형을 통해 스테파니의 전화를 덤덤하게 받던 알리는 스테파니가 “네 마음 알아, 어서 쉬어.”라며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끊지 마.”라며 오열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BGM 중에는 이러한 가사가 있다. “Can't grow up in that iron ground.(Bon Iver의 Wash 중)” 강철로 된 땅이었기 때문에 자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강철로 이뤄진 것 같았던 알리라는 사람이 무너져 성장하는 장면이 바로 이 대목이다. 알리는 어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말한다. “나를 버리지 마. 사랑해.”


누나에게 내쳐지고, 순간 아들을 영영 잃을 뻔 했던 알리는 아들이 의식을 찾는 세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완전한 혼자로 존재했던 것이다. 혼자. 혼자라는 것은 자립이 아닌 고립이다. 이 세상에 나와 연결된 관계의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는(누나에게는 의절 당했기 때문에) 아들을 잃는 순간, 알리는 세상의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람, 즉 인간이 아닌 짐승의 세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 극도의 허무 앞에서 알리는 무너지며 오열하고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사랑을 말한 알리는 이 장면 이후 복싱 대회에 출전, 챔피언이 된 것으로 암시되며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채 아들과 스테파니와 함께 빛나는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토록 노골적인 엔딩에 조금 당혹스러운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감독이 시사하고 있는 바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링 밖에서의 삶을 살아왔던 알리가 링 안에서의 삶에 편입하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스테파니가 이야기 했던 ‘인간다운 삶’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야 말로 삶의 전부이며, 진정으로 숭고한 것이라는 듯한 느낌을 이 영화의 엔딩을 통해 받을 수 있었다.



나를 버리지 마



하이데거 철학의 전체론적인 위험성을 제하고서,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을 이야기 해보자. 하이데거는 존재(sein, be)와 존재자(seiendes, is-ness)를 구분했다. 즉, 존재란 어떠한 것의 ‘있음’- 사물조차 가능한 있음의 상태이지만 존재자의 경우 ‘그 무엇’, ‘있는 것’ 자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존재자란 존재의 실현이며, 이렇게 실현될 때 구체적으로 존재하기 되는데 이를 현존재(dasein)이라고 칭했다.


현존재의 dasein을 의미하는 da는 ‘거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현실의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며, 존재하는 특정한 방식 자체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세계-내-존재’가 아니고서는 현존재는 실현될 수 없다는 뜻이다.2) 그러므로 현존재는 그저 ‘살아 있음’의 상태를 뛰어넘는 ‘살아 있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스테파니에게 ‘사랑’을 고하기 이전의 알리는 그저 존재의 상태였다. 이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닌, 짐승이든 사물이든 누릴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사랑’을 고한 후의 알리는 전혀 다른 형태로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스테파니가 추구했던 인간다운 삶이란, 결국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정확히는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러스트 앤 본. 나는 처음에 이 러스트라는 것이 lust, 즉 욕망- 색욕을 이야기 하는 줄 알았다. 욕망과 뼈라니 참 근사한 제목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러스트는 rust, 즉 녹슮을 뜻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처럼 손가락 뼈는 인간의 다른 신체부위와는 다르게 다치고 나서도 저절로 회복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다침의 상태로, 손을 쓰면서(알리는 복서이기 때문에 손을 쓸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때마다 일정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존재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어떤 회복 불가의 상태임을 인정하고, 타인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자만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 이토록 무정하며 잔인한 영화의 다정한 결론은, “나를 버리지 마”라는 알리의 말에 대한 스테파니의 대답 한마디에 담겨져 있다. “늘 곁에 있을게.”









인간의 손에는 뼈가 27개.

그보다 더 많은 동물도 있는데 고릴라는 엄지손가락 뼈 5개를 포함, 총 32개다.

어쨌든 손 하나에 뼈가 27개나 붙어있다니.


팔이나 다리뼈가 부러지면 몸에서 나온 칼슘으로 저절로 뼈가 붙고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손가락이 부러지면 절대 완치될 수 없다.


펀치를 날릴 때마다 통증을 느낀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어느새 갑자기… 그 고통이 살아난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나를 찌르고 또 찌른다.


―영화 〈러스트 앤 본〉 엔딩 씬에서








1)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3779

2)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지금, 여기, 나… 이것이 ‘존재’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20309200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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