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 〈박화영〉(2018) 리뷰
여기, 두 소녀가 있다. 소녀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아니한 어린 여자아이'를 가리키며, 한자로는 작을 소小에 여자 녀女자를 쓴다. 그러나 이곳에 존재하는 두 소녀는 결코 작은 여자아이가 아니다. 또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 '소녀'라는 단어에 투영되어 있는, 연약함이나 청순가련함, 여리여리함과 같은 편견과는 거리가 있는 유형의 인물들이다. 완전히 성숙하지 않으며 어리다는 것의 의미에는 적합하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완전히' 성숙한 여자 어른의 가면 속으로 숨어버려야 했던 여자들이, 여기 있다.
영화의 제목은 명료하다. '박화영.' 사람 이름을 적어놓는 것으로 어떠한 설명을 대체한 이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박화영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박화영을 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은미정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박화영은 가출청소년이다. 다만 다른 가출청소년들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화영은 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취방을 가지고 있는 가출청소년 박화영은 자유로운 공간으로써의 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기를 가지게 된다. 이제부터 이 무기를 권력이라 이름 붙이고자 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후드를 눌러쓴 채 점퍼를 입은 화영은 라면을 다량으로 구입한다. 집에 올 다른 가출청소년들에게 끓여주기 위해서이다.
다음 장면, 학교 선생의 등을 콕 찌르는 '은스타'가 있다. 은스타, 은미정은 예쁘다. 앞머리 없이 길게 내려온 생머리에 촘촘하게 마스카라칠 되어 있는 속눈썹, 오똑한 코와 틴트를 덧바른 도톰한 입술. 이러한 미정을 돌아보는 선생의 눈에는 아니꼬운 시선이 없다. 왜냐하면 미정은, 예쁘기 때문이다. 화보 촬영이라는 빌미로 학교를 빠지려 해도, 미정은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네 얼굴이 뇌물인데 뭐 이런 걸 가지고 와."라면서 미정을 바라보던 선생은 "아, 이뻐라."라며 본인의 휴대전화를 꺼내 셀카를 찍는다. 셀카를 찍음으로써 미정은 암묵적으로 조퇴를 허락 받는다.
미정은 소위 말하는 일진 중의 대장으로 군림하는 영재의 여자친구다. 이 사실이 미정에게 있어서는 가장 강력하며 또한 유일한 무기- 권력이 된다. 화영의 집에 모여 담배를 피는 다른 여학생들은 말한다. "영재 오빠 믿고 에바 싸지 않냐?"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말 그대로 영재의 권력을 등에 업은 미정의 앞이 아닌 뒤에서만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지점은 미정이 화영을 '엄마'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화영은 열여덟 살로 미정과 동갑이지만, 자신의 이름 그대로 박화영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엄마라는 호칭을 자처한다. 열일곱 살의 세진이 '언니'라는 말을 처음 입에 담자, 엄마라고 부르라며 거센 욕설과 함께 폭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이 호칭에 대한 화영의 집착을 알 수 있다. 엄마라고 명명됨과 함께 화영은 미정에게 집을 내어주고, 요리와 청소를 하며, 용돈을 쥐어준다. "니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말하자면, 화영의 권력은 집-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엄마라는 호칭과 그 위치에 달려있다.
화영과 미정은 엄마와 (누군가의) 여자친구로서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이 '진짜' 권력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 영화를 관통한다. 이러한 권력은, 혹은 권력이라 믿고 있는 이 무언가는, 진정한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어떠한 역할놀이에서 수반되는 것이다. 진짜 '나'를 버림으로써 이들은 어떠한 '내'가 된다. 혹독한 점은 이 역할놀이가 성性적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화영을 비추면서 두 가지 다른 외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머리가 짧은 모습(숏컷)의 화영이고, 다른 한쪽은 단발 머리의 화영이다. 외형이 조금 변한 것뿐이지만 둘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태도적인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숏컷의 화영은 막무가내다. 그는 자신의 엄마 집에 찾아가 도무지 혈육에게 하는 것이라고 믿기지 않은 험악한 욕설을 퍼붓는다. 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화영은 지나가는 시민들은 물론 자신을 저지하러 온 경찰들에게도 흉기를 휘두른다. 그러나 화영의 직접적인 무기는 흉기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붙잡고 포획하는 경찰에게 "만졌냐?"라는 말과 "야, 한번 대줘?"라며 스스로 바지를 벗으려 한다. 몸을 이용해 최대한의 난동을 부린 화영에게 엄마의 문자가 도착한다. "돈 보냈다." 그제야 화영은 엄마의 집앞을 떠나 경찰들과 같이 자리를 벗어난다.
몸을 활용하는 것. 이 말이 직접적이며, 부정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에게 이 방식이 무엇보다 확실한 생존수단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화영과 미정, 그리고 미정의 남자친구인 영재를 '뺏는' 세진, 이 세 명의 여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처절할 정도로 육체를 활용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차이점이 생기는 부분은 그들이 외적으로 아름답냐 아름답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어리고 예쁘고 가난한 미정과 세진은 또래 남성들, 혹은 이제 막 중학교에 올라온 것으로 보이는 모르는 남자아이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에게 '육체'로써 존재하며 권력을 쥐려 한다. 영재의 아이를 임신한 것 같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임신테스트기를 미정과 화영의 눈앞에 들이미는 세진은 이러한 점에서 인상적이다. "너 또라이니?" 미정의 말에도 세진은 임신- 근본적으로 영재라는 남성을 빼앗았다는 점을 과시한다.
어리고 가난하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미의 기준에서 벗어난 몸을 가진 화영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그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경찰들에게 본인의 몸을 스스로 성적대상화하며 하나의 무기로 만들어버린다. 아니면 자신의 집에 오는 가출청소년들 앞에서 얻어맞음에도, 배를 때려야 한다며 더한 폭력의 대상으로 기꺼이 위치한다. 아예 더러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아이들의 담뱃재를 온몸으로 받아내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화영은 영재에게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육체 폭력을 당한다. "숨쉬지 마." 영재의 이 대사는 화영을 향한 것이지만, 전체적인 서사 내에서 미정과 세진을 향한 것이기도 한다. 영재는 자신의 여자친구인 미정에게 "생리하냐?"는 말을 지겹도록 반복하며 미정의 말과 생각을 틀어막으며 오직 육체로써 자신 앞에 존재할 것을 강요한다. 좁고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이뤄진 세진과의 성관계를 굳이 하나의 장면으로 담아낸 것은, 영재라는 실질적인 권력의 소유자 앞에서 이들은 그저 대상화된 육체 그 이상으로 존재하지 못함을 시사한다. 화영, 미정, 세진이 무리 내에서 권력을 얻는 방식과 누군가에게서 돈을 얻어내는 방식은 그들의 몸이 성적으로 대상화되었을 때뿐이다.
이 영화의 서사가 완성되는 지점은 후반부에 놓여져 있다. 다시 영재를, 정확히는 영재의 여자친구라는 권력을 되찾고자 미정은 모텔로 모르는 남자를 부르고 이를 영재에게 말해 그가 찾아오게 하여 재결합 하려 든다. 그러나 여기서 일이 꼬인다. 모르는 남자가 휘두르는 육체적인 폭력 앞에서 미정은 두려움과 위험에 노출되고, 화영이 이를 온몸으로 막아낸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랐던 것처럼, 화영은 성폭행 당한다. 모텔에 찾아온 영재는 분에 이기지 못하고 그 남자를 죽여버린다.
이때, 미정은 선택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엄마'- 즉 화영이 뒤집어 써주기를 종용하는 것이다. "엄마, …… 엄마가 엄마라며. 아니야?" 영재는 이 장소에서 도망쳐버리고, 미정과 화영 둘만 남게 된다. "엄마. 엄마면 이 정돈 덮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엄마잖아." 화영은 넋이 나간 듯 미정을 바라보다가 웃어버린다. "은미정. 쪽팔리게." 모든 것을 자신의 몸으로 뒤집어 쓰기로 결심한 화영은 말한다. "야, 은미정. 빨리 집에 가." 이는 그간 화영의 '집'에서 생활하던 미정이 진짜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큰 변화를 나타낸다.
전환된 화면에는 성인이 된 듯한 미정과 화영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디 살아? 뭐하고 살아?"라며 SNS을 통하여 화영에게 만남을 요구한 미정에게서 과거의 은미정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숏패딩을 벗고 코트를 입고, 영재의 오토바이 뒷자리 대신 택시를 불러 타고 떠나는 미정은 이전의 은미정과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화영에게 "넌 진짜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그대로야."라고 말하는 미정은 달라져 있는데, 이는 과거의 '은미정'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은미정'이 된 셈이다. 입버릇처럼 욕을 하던 미정이, 욕설을 내뱉는 화영에게 한 "욕은…."이라는 말은 실상 화영에게 가 닿은 것이 아닌, 과거의 자신을 철저히 배제하기 위한 발화다.
화영의 모습은 영화에서 과거의 화영을 비출 때와 동일한, 단발머리의 화영이다. 단발머리의 화영은 숏컷의 화영에 비해 항상 어딘가 의기소침해 보이며, 타인에게 보이는 반응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숏컷의 화영은 과장되어 있고, 힘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예 다른 인물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화영은 미정에게 담배를 건네지만 미정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한다. 혼자 담배를 피던 화영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근데 옛날 때, …… 우리 옛날 때, 엄마, 아이… 야 어떻게 생각하냐?" 미정은 모르는 듯이, 혹은 모르는 척 하는 듯이 "엄마? 무슨 엄마?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잘 지내. 엄만 무슨 엄마…."라는 대답을 끝으로 택시를 타고 이 영화에서 퇴장한다.
과거의 은미정을 대표하는 가장 큰 수식어는 '영재의 여자친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영재의 여자친구를 벗어난, 그 수식 자체를 버려버린 은미정은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아예 다른 모습의 성인이 되었다. 이 변화의 계기는 영재의 살인, 화영의 누명, 그리고 그렇기에 진짜 엄마가 존재하는 집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미정은 새로운 은미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영은 끝끝내 '엄마'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화영은 새로운 가출청소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단발머리 '가발'을 벗어버린다. 이 가발이 어느 시점부터 '가짜'였는지, 언제는 '진짜'인 적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고 정확히 말하자면 알 필요가 없으리라. 확실한 것은 화영은 가짜 박화영이 되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라는 호칭 아래서만 화영은 달콤한 가짜 권력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무수한 것들이 있다. 이미 내가 눈을 떴을 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옭아매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 화영에게도 박화영이라는 이름, 자신의 엄마를 포함한 가정 같은 것은 선택할 기회가 없이 그냥 주어진 것들이었다. 미정은 이러한 '그냥 주어진 것들'의 세계로 돌아가 '은미정'이 되기 위한 빠른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옳고 그르고, 혹은 더 행복하고 불행하고의 문제를 떠나 확실히 빠른 길이다. 그러나 화영은 '박화영'이 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이 되었다. 비록 엄마라는 호칭 아래에 존재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진짜가 아닌 가짜 권력이지만 그럼에도 화영은 무언가가 '되었다.' 화영은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폭력 앞에서 무릎을 꿇고(영재가 보는 앞에서 세진에게 사과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었었다.) 손바닥을 싹싹 빌며, 경찰에게 하지도 않은 살인죄를 고백한다. 확실히, 화영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의 인물이며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영을 손가락질하기에는, 단지 '됨'의 상태가 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너무나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시간을 들여 그 얼굴들을 하나씩 헤아린다면, 당신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그 무리 속에 섞여 있는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