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네 비르 〈버드 박스〉(2018) 리뷰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는 일은 세계와 맞서 싸우는 일과 같다. 대개 재앙과 인류 멸망이 그려진 영화들에서, 사실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간 괴생명체나 바이러스와 같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버드 박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는 형체가 없는 무엇인가('그것')를 본 사람들이 곧바로 자살을 하게 되거나, '그것'을 아름답다며 타인에게 강제로 보게 하려는 정신 착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 그 형체가 무엇인지, 어떠한 방식으로 세계에 출현하게 된 것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지점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각박해진 세계에 홀로 남은 이가 고군분투하며 가족을 지키기 위한다는 점이다. 자식을 위하여 '세계-나'의 투쟁을 그려낸 영화는 많고,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구도 자체가 클리셰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버드 박스〉의 스토리가 변별점을 가지는 지점은, 홀로 지내는 것을 택했던 맬러리가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게 되며, 자신의 아이들을 자식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개개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에 놓여져 있다.
맬러리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동생은 그런 언니인 맬러리를 걱정해 식료품을 사다준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보는 맬러리의 질문에 동생은 대답한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데, 모두 아주 외로워." 그러자 맬러리는 대답한다. "외로움은 부수적인 거야.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야." 맬러리의 대답에 동생은 진지하게 대답한다. "아이가 있으면 달라. 바로 사랑에 빠진다고."
그러나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맬러리는 자신의 뱃속에 있는 생명체를 '어떠한 것'쯤으로 치부하며, 제대로 임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인정하기보다는 '콩알'이라고 태아를 지칭한다. 그러자 부인과 의사는 '콩알'이 아니라 아기 이름을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과 함께, 곧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진정으로 아이가 필요한 다른 이들이 있으니 입양 절차에 대한 팜플렛을 주기도 한다. "임신 사실을 무시하고 아기가 사라질 거라고 바랄 순 없어요." 진료를 마친 맬러리는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한다.
임신은 가장 육체적인 행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임신을 한 주체- 맬러리는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하게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에 존재하는 맬러리의 안에는 또 다른 생명체가 있다. 이 생명체를, 우리는 임신과 동시에 하나의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체로 여기며, 고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해 마지 않아야 하는 것을 불문율으로 여긴다. 그러나 동생의 이야기처럼, 아이가 있다고 해서 바로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일은 본능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가 거의 종교적인 사상과 동일하게 여기는, 생명을 잉태한 모성이 모든 이에게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임신과 임신한 여성이 아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맬러리에게 임신이란 이미 벌어진 어떠한 하나의 사건에 가까웠고, 이제 그 사건에서 비롯하여 세상에 태어날 한 생명체를 끌어안는 일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부인과에서 돌아오던 길에 운전을 하던 동생은 '그것'을 보게 되고, 맬러리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게 된다. 혼자 남은 맬러리를 구해주려던 이 역시 그 과정에서 '그것'을 마주하고 불이 붙은 차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 여성의 가족들의 집에 피신하게 된 맬러리는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톰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임산부였던 올림피아와 같이 출산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전투가 벌어진다. 결국 그곳에 남게 된 최후의 사람들은 맬러리와 톰, 그리고 맬러리의 자식과 올림피아의 자식이었다. 네 명은 이 사건 이후 5년 간 가정을 이루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서사에 필수적인 것은 분명 맬러리와 아이들이 남는 일이었으리라. 예상과 같이 톰은 '그것'을 봐야한다며 사람들의 눈을 억지로 뜨게 만드는 집단인 '사이코'의 습격을 받아 자살하게 된다.
맬러리는 문득 무전기로 릭이라는 사람에게 전달 받았던 정보를 떠올리게 된다. 릭은 단지 같은 곳에 있는데 그곳은 생필품도 풍부한 곳이라는 정보였다. 공동체로 모여 살며, 안전하다는 곳은 강 아래에 있다. 가장 빠르게 도착하려면 강의 급류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아이들이 있으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한 릭은 덧붙인다. "제대로 봐야 해요. … 봐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나 이 세계에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이는 곧 자살을 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이를 봐야한다며 정신적인 착란 상태로 빠지게 되는 일을 뜻한다. 하지만 급류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물살이 흐르는 방향을 봐야 노를 저어 공동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톰을 잃고, 이제 두 명의 어린아이들을 홀로 이끌어야 할 맬러리는 결심한다. 강을 따라 공동체가 있는 단지로 여정을 떠나는 맬러리는 아이들에게 무척 강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아이들에게 각자의 이름은 없으며, 다만 '걸'과 '보이'라는 호칭이 주어졌을 뿐이다. 또한 톰이 언젠가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던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며 이 때문에 결국 죽게 될 것이라 걱정했었다. 맬러리에게 최우선인 것은 살아남는survive 일이지 사는live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맬러리는 여정 도중 걸과 보이를 잃어버리는데, 가까스로 보이는 구하게 되지만 걸은 찾지 못한다. 이때 보이는 맬러리에게 걸이 맬러리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생존을 우선시하던 맬러리는 통제적이었고, 언제나 강압적인 태도로 아이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맬러리는 걸 앞에 진심을 내려놓는다.
정말 미안해, 얘야.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잘못했어. (…)
톰이 커다란 참나무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을 봤어.
수백 명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봤지.
수백 명이었어.
새들도 봤어.
갖가지 화려한 색깔의 새들 말이야.
그리고 우리도 봤어.
꼭대기에서 우리를 쳐다봤어.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봤어.
그래서 우린 함께 있어야 해.
이건 그냥 얘기가 아니야.
아니고 말고, 너희들에게 보여줄 게 너무 많아. (…)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내게로 와, 제발.
나한테 와.
얘야, 어서 와.
―영화 〈버드 박스〉 중에서
또한 맬러리에게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 급류 앞에서 누가 눈가리개를 벗고 '그것'에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냐는 것이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인 보이와 올림피아의 아이였지만 자신이 돌보게 된 걸 앞에서 맬러리는 마침내 선택하게 된다. "아무도 안 볼 거야." 아무도 보지 않음을 통해 맬러리는 아무도 내치지 않는 일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죽음이 닥치더라도 두 아이를 완전히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말이다. 길고 불가능할 것 같은 여정의 끝에 도착한 단지는, 시각장애인 학교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애초에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은 평화로웠다. 또한 눈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을 감지하는 새들을 풀어놓았기 때문에 그들 역시 안전한 상태였다. 그곳에 도착한 맬러리는 여정을 하며 '그것'을 감지하기 위해 박스 안에 숨구멍만 뚫어 넣어두었던 새들을 아이들과 함께 풀어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부인과 의사의 앞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준다. 자신이 사랑했던 '톰'을 보이의 이름으로, 다정함을 나눴던 '올림피아'의 이름을 걸에게 지어준다. 이 이름을 지어줌과 동시에 영화는 막을 내린다.
누군가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중에서도 아이의 보호자가 된다는 일은 또 다른 특수성을 갖는 일일까. 〈버드 박스〉는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퇴색되어 버린 이야기를 건넨다. 새를 상자 안에 가두는 것은 그 새를 도구적으로 쓰는 일임에 불과했던 것처럼, 정말로 그 새를 기르기 위해서는 상자 밖으로 꺼내줘야 한다는 것이다. 뚜껑을 덮고, 상자의 옆면에 숨구멍만 몇 개 내주는 일은 새를 '살아있게'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정말 '사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맬러리는 자신의 모든 행동과 결정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을 톰에게 했던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것,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것이 생존율을 높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끝내 맬러리는 받아들인다. 결국 이 아이들을 살게 하는 것은 꿈을 가지게 하는 일이며, 각자의 이름을 가진 채 독립된 사회구성원으로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일임을. 새로운 공동체에서 맬러리와 아이들은 행복했을까? 영화는 끝나버렸기에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맬러리가 진심을 어린 올림피아의 앞에 토해내었을 때 그들이 진심으로 포옹을 했던 것처럼, 다정한 포옹을 나눈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서로를 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