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셰이프 오브 워터〉(2017) 리뷰
“순수지각은 대상 속에서 우리를 위치시켰고 그 기회에 대상을 지각에 참여하게 했다. 이것은 긴장의 작용을 매개로 해서, 정신과 물질이 서로 만난다는 것이다. 지속에는 고유한 리듬과 긴장이 있다. 색깔을 지각한다는 것, 지속 속에서, 그 지속을 구성하는 수많은 진동들을 압축하는 것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예를 들어 깨달았던 두 색깔의 환원 불가능성이 의식의 한 순간에 행사되는 수 조兆의 진동들이 압축되어 있는 짧은 지속에 기인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서로 다른 종으로서의 육체를 가지고 있으나 서로를 받아들이기를 선택한 엘라이자와 ‘그’.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대개 많은 작품들에서 괴물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인간과 다른 육체적 차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있어 두려움 혹은 동경의 대상이 된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의 이름이 사실은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그는 괴물을 만든 창조주의 이름이다.) 그저 괴물인 것도 그가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그’는 후자에 속하는 유형인데, 인간과 다른 생김새와 상처를 치유하는 특수한 능력 때문에 그는 원주민에게 신으로 추앙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특이성 때문에 연구 소재로 ‘사용되기’ 위하여 실험실에 잡혀든다. 서사는 실험실 청소부인 엘라이자가 그를 ‘사랑하기’를 선택함으로써 벌어진다. 물론, 엘라이자가 그에게 호감을 표한 것에서 사랑을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비약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것은 언제나 비약의 논리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차원의 문제다.
엘라이자의 일상은 반복된다. 출근을 위해 맞춰둔 알람시계 소리에 잠에서 깨고, 달걀을 삶는 그 사이에 타이머를 맞춰둔 채 물이 가득 찬 욕조에서 자위를 하며, 구두를 닦고, 출근을 한다. 그런데 이 일상에 변화가 생긴다. 그가 실험실에 잡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갇혀 있는 그를 처음 본 날, 엘라이자는 눈을 떼지 못하고 유리 너머에서 시선을 준다. 이어 표면을 살며시 손끝으로 두드려보기도 하는데, 그가 과격한 반응을 보이자 실험실에서 내쫓긴다. 실험실 밖을 나서면서도 엘라이자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엘라이자는 어떠한 이유를 덧붙이기도 전에 그에게 끌린다. 어릴 적, 물에 버려졌고 목에 긁힌 흉터가 있으며 말을 할 수 없는 엘라이자의 과거는 그에게 이끌리게 만들었다. 그가 죽임당할 위기에 처하자, 실험실에서 그를 빼내올 계획을 세우며 자신의 친구인 자이슨에게 엘라이자는 온몸으로 호소한다. “그는 혼자예요. 아무도 없다고요. (…) 그렇게 외로운 건 처음 봤어요.”, “나는 뭐죠? 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뻥끗거리고, 나도 그 사람처럼 소릴 못 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내 모습… 내 인생 전부가 날 그 사람에게 이끌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다. 필요성과 유용성, 아름다움과 같은 기준에 앞서는 끌림이 존재한다. 이러한 끌림은 엘라이자의 아름다운 표현처럼 인생이 송두리째 누군가에게 가닿는 경험, 헤아릴 수 없는 파동들이 단번에 부딪히는 순간일 것이다. 그 찰나, 우리가 느끼는 파동- 떨림은 사랑이라는 강력한 감정으로 압축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괴물에게 반한 엘라이자는 빠르고 확실한 결정을 내린다. 그를 유혹하겠다는 결단이다. 괴물의 수조 앞에 앉아 삶은 달걀을 하나 조심스레 올려놓고 반응을 기다리는 엘라이자는 웃고 있다. 그에게 반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공유하기를 선택한 엘라이자 앞의 그는, 외로웠다. 평생 혼자였을, 혹은 주위에 누군가가 있어도 진정한 자신을 봐주는 것이 아닌, 신격화된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무리에 속했던 그에게 엘라이자의 호의는 운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느 날은 음악을 틀어놓기도 하고, 달걀을 여러 개 두기도 하며 엘라이자는 그와 교감한다. 둘 사이에 오고가는 언어는 없지만 엘라이자는 확실히 알고 있다. 자신이 건넨 호의와 이를 받아들인 그를. “그 사람은 날, 있는 그대로 봐요. 그 사람은 행복해요. 날 볼 때마다. 매일. 이젠 제 손에 달렸어요. 구하든지, 죽게 두든지.” 그리고 엘라이자는, 앎의 태도를 넘어서 그를 확실히 책임지고자 한다.
외로웠던 그의 불완전한 부분을 어루만진 엘라이자는 도망치지 않는다. 방관하지 않고 핑계를 대지도 않는다. 다만 신중하게, 어쩌면 무모한 계획을 세워 그를 실험실에서 구하고자 한다. 그 계획은 성공하는데, 실험실의 간부들은 모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10명 이상의 특공대가 벌인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소행을 엘라이자와 친구 자일스, 직장동료 젤다와 연구원이었으나 그를 하나의 생명체로 인정하게 된 호프스테틀러 박사, 단 네 명의 힘으로 실행시킨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스트릭랜드(실험실 간부)는 그를 되찾고자 호프스테틀러 박사를 고문하며 특공대의 이름과 위치, 계급을 대기를 종용한다. 이에 박사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이름도 없고, 계급도 없어. 청소부들이니까. (no names, no ranks, they just clean.)”
그를 선택함으로써 엘라이자가 지게 된 책임은 한 사람의 몫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선택한 일임에도 엘라이자는 자일스가 되물어볼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다. 왜냐하면 엘라이자 스스로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를 버리는 것은 마침내 자신을 져버리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구하는 것은 엘라이자 스스로를 구하는 일이 되기도 한 셈이다. 그를 어루만진 엘라이자는, 그의 마른 가슴팍에 귀를 대고 떨림을 느끼며 호흡한 엘라이자는, ‘달걀’과 ‘당신, 그리고 나, 함께.’를 표현하는 수화를 그에게 배우게 한 엘라이자는, 자신의 일부를 떼어다 그의 비어있는 부분을 채운 것이기에 사랑은 속수무책과도 같은 일이 된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엘라이자와 그를 쫓는다. 비가 오는 날, 부둣가에서 그를 보내주어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고자 결심한 엘라이자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러던 중 부두에 도착한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와 그를 총으로 쏜다. 이 총성으로 엘라이자는 숨이 끊어진다. 상처 자생 능력이 있어 다시 일어선 그는 스트릭랜드를 공격하고, 뒤늦게 도착한 경찰과 엘라이자의 친구들을 뒤로 하고 엘라이자를 안은 채 바다로 뛰어든다.
영화의 시작이 자이슨의 내레이션이었던 것처럼, 끝도 동화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그 후로 둘이 행복하게 살았다고? 그랬다고 믿는다.” 동화의 전형적인 해피엔딩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인 사람이지만, 그러나 이 영화의 숭고한 지점은 이들이 영원히 행복했느냐의 문제에 달려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엘라이자가 그를 선택했고, 그는 엘라이자를 받아들였으며, 엘라이자는 그의 받아들임과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엘라이자는 한 번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물속에서 그가 키스를 하여 능력으로 상처를 회복해줌에 따라 다시금 숨을 쉬게 된다.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이 탄생한 것이다. 말하자면 엘라이자가 그를 구했기 때문에 그도 엘라이자를 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구함 이후의 구함이 존재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유일한 일은 아니다. 만약 엘라이자가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 해도, 이후의 인생에 있어서 다른 이에게 반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수로 존재하는 ‘반함’의 체험에 있어서, 우리가 그 사람을 책임지기로 선택하는 문제는 언제나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엘라이자는 한 번의 선택을 했고, 한 번의 죽음을 맞았으며,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시 삶을 얻게 되었다. 사랑의 숭고함은 영원성이나 유일함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일이 우리를 파괴하기도 하나 이러한 모든 과정이 끝끝내 성장을 초래한다는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대의 모양 무엇인지 알 수 없네,
내 곁에는 온통 그대 뿐.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마음 겸허하게 하네,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I find you all around me.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It humbles my heart,
For you are everywhere.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중에서
* 《처음 읽는 베르그송》 121쪽, 바르텔르미 마돌, 동녘, 2016.
** 위의 저서, 121쪽,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