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이 만든 족쇄

by 드타


더 잘 살고 싶다.

지극히 당연한 바람이다. 더 나은 직장, 더 높은 연봉, 더 안정적인 삶. 우리 모두가 원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그 욕심이, 오히려 우리를 묶고, 삶의 주도권을 잃게 만든다면?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면서도, 점점 삶의 여유를 잃는다. 물리적인 시간뿐 아니라 정신적인 공간도 좁아진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더 큰 책임이 따라오고, 더 많은 기준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욕심은 분명 원동력이지만, 방향을 잃는 순간, 족쇄가 되기 시작한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 만드는 역설


처음에는 단순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월급, 조금 더 괜찮은 환경, 조금 더 인정받는 삶을 꿈꿨다. 그런데 ‘조금 더’는 어느 순간 기준이 되어버린다. 3,000만 원이 4,000만 원이 되고, 연봉 5,000만 원이 7,000만 원이 되어야 만족하게 된다. 높아진 기준은 한때의 목표가 아니라, 새로운 생존 조건이 된다.


욕망은 인간을 전진하게 만들지만,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은 서서히 바깥으로 밀려난다. 선택은 내 것이지만, 실질적인 결정의 기준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에 맞춰지기 시작한다.


‘불안’이라는 그림자


욕심은 단지 욕망의 표현이 아니다. 그 밑바닥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무능력하게 보일까 봐, 사랑받지 못할까 봐. 이 두려움은 욕망이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의 행동을 조종한다.


조금 더 벌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이 정도는 가져야 남들이 무시하지 않겠지.

지금 포기하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아.


이런 생각들 속에는, 우리 삶을 스스로 평가할 수 없고, 외부 기준에 매달려야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즉, 욕심은 불안을 덮기 위한 방어기제다. 그리고 그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 또 다른 욕심을 키운다. 악순환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주도권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을 ‘내가 결정했다’고 느끼지 못한다. 회사가 시키는 일, 가족이 기대하는 역할, 사회가 요구하는 성취 기준에 맞추느라, ‘나는 지금 왜 이걸 하고 있는가’를 놓친다. 바쁘게 살고는 있지만, 자기 삶을 살아가는 느낌은 점점 옅어진다.


욕심은 점점 나를 타인의 기대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거기엔 늘 비교와 경쟁이 따라붙는다. 더 이상 내가 삶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욕심이 나를 끌고 간다. 결과적으로, ‘더 잘 살기 위한 선택’이 오히려 나를 을의 자리에 세우는 셈이다.


욕심에서 해방된다는 것.


욕심을 완전히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건 ‘어디서 오는 욕심인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 욕망인지.

지금 하는 일이 나를 살리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지우는 일인지.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주도권은 돌아오기 시작한다. 욕심의 방향을 점검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중심을 되찾는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이 불안한가?

이 욕심은 진짜 나의 것인가?

내가 포기하고 있는 것들은 정말 가치가 없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은 때로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지나야 비로소 삶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내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결국 삶의 주도권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내가 기준이 되면 욕심은 방향이 되고, 타인이 기준이 되면 욕심은 족쇄가 된다.

욕심은 멈추지 않지만, 내가 그것을 다룰 수는 있다.

욕심을 줄이려 하지 말고, 기준을 바꿔야 한다.

남이 아닌, 나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으로.


그러면 어느 순간, 욕심은 더 이상 나를 얽매는 족쇄가 아니라, 삶의 연료가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진짜 주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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