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끝>
한참 동안 수다를 떨어놓고 숙이는 갔다. 해리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엄마가 있다. 중학교 1학 년 때 돌아가신 엄마다. 술고래 아버지의 주먹질에 피멍 가실 날 없었던 엄마는 일찌감치 떠나셨다. 해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해리는 엄마에게 미안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계모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가출도 안 했을까. 엄마의 빈자리는 짧았다.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온 여자는 처음부터 해리를 반갑잖은 물건 취급했다. 고깃배를 탔던 아버지는 고깃배를 타지 않는 날은 선주의 덕장에서 일했다. 엄마 역시 선주의 덕장에서 일했다. 계모는 바닷가 횟집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횟집에 갔다. 엄마는 복어의 피를 먹고 자살했다. 해리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겉늙어버렸던 엄마가 거울 속에서 마주 본다. 해리는 죽음을 택한 엄마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말한다. 남편이 아버지 같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엄마, 돈 좀 줘.
아들이 현관을 열고 들어온다. 아들은 남자를 닮았다. 부지런하고 생활력 강한 어미보다 게으르고 생활력 없는 아비를 빼닮았다. 이런저런 운동에 목숨 거는 것도 아비와 똑같다. 아들은 대학진학에 미역국을 먹었다. 재수를 한다지만 공부보다 친구들과 휩쓸려 노는데 더 재미를 붙였다. 툭하면 사라졌다가 며칠 만에 나타나서 해리에게 돈을 요구한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착한 아들, 효도하겠다던 아들은 어디 갔을까.
아들은 해리의 품에서 젖을 빨았다. 해리와 눈 맞춤 하는 깊은 호수 같은 눈빛의 아들, 방긋 웃는 웃음, 젖을 꼭 잡고 빨던 아들, 너는 후제 뭐가 될래? 장군감이라던 아들, 아들을 위해서 이사를 했다. 음식점을 열면서 그 아들을 밖으로 내 돌린 것이 문제였을까. 사춘기, 아들이 밖으로 도는 줄도 모르고 밥장사에만 매달렸다. 알뜰살뜰 보살펴 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서 돈으로 보상했다. 아들의 간을 키운 것도 해리다. 남자의 간을 키운 것도 해리다. 해리는 거울에 희망이란 단어를 써 본다. 희망이 없다. 변하지 않는 남자와 아들, 늘 반복되는 일상, 다툼과 화해조차도 불필요하다. 해리는 벙어리가 되었다. 무슨 일에도 놀라거나 호들갑조차 떨지 않는다.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반응은 시큰둥하다. ‘당신 좋으실 대로’ 아들에게도 역시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부탁인데 엄마만 귀찮게 하지 마. 돈? 거기 있어. 필요한 만큼 가져 가. 없다고? 없으면 없는 거지. 알아서 해.’ 이런 일상어도 시간이 지나자 고갯짓만 까딱하거나 손가락질로 그친다.
엄마, 고마워. 친구들과 여행 가는데 며칠 있다 올 거야.
아들은 휘파람을 불며 카운터 서랍에서 푸른 지폐를 꺼낸다.
에게, 겨우 이거야? 꿍쳐둔 거 더 없어?
철 좀 들어라. 너도 양심이 있으면 생각 좀 해라. 엄마도 자꾸 힘들어.
해리는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한다.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억양으로. 아들은 해리를 슬쩍 쳐다보고는 돈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고개를 숙이며 현관을 빠르게 빠져나간다. 해리는 아들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남편의 등을 쏙 빼닮았다. 이십 년 전에 평소와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혼자 장미다방을 찾아왔던 남자, 진심이라고, 청혼하러 왔다던 남자,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자 남자는 슬픈 눈으로 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장미다방 문을 열고 나갔었다. 두두룩하게 수그러진 어깨가 어찌 그리도 안쓰러워 보이든지. 젊은 남자가 어깨가 처져 보이는 것이 불쌍했었다. 그 순간 해리는 그 어깨를 쭉 펴게 해 주고 싶었다. 아무도 펴 줄 수 없는 저 어깨를 펴 줄 수 있으리라. 적어도 가실마을에 들어가 살던 몇 년은 남자의 어깨가 쭉 펴졌다고 생각한다. 당당하고 힘차 보였다. 아이 어미가 될 때까지만 해도 해리는 믿었다. 장밋빛 인생을. 부질없는 짓이다. 인간은 스스로 바꾸고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바뀔 수도 고칠 수도 없는 존재다.
어느 날, 작업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밥을 먹으러 왔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라 해리는 설거지를 해 놓고 식당 구석에 앉아 <미스틱 리버>를 읽는 중이었다. 세 남자의 사랑과 우정, 살인에 관한 스릴러 물, 데니스루헤인의 추리 소설이다.
아줌마, 시골밥상 돼요?
작업복남자의 목소리는 저음이다. 해리는 읽던 책을 상 위에 엎어놓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조기 한 마리를 굽고, 뚝배기에 된장을 끓이고 미역국을 데우는 사이 둥근 쟁반에 식탁을 차렸다. 김치, 고사리, 시금치, 무채나물 등 접시에 담았다. 그 사이 물수건과 물과 컵을 챙겨다 손님 앞에 놓았다.
맥주도 한 병 주시오.
해리는 맥주 한 병과 컵도 챙겨다 주었다.
남자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맥주뚜껑을 따서 맥주를 잔에 따른다. 해리는 주방으로 갔다. 해리는 음식을 챙겨 쟁반에 담아다 남자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남자는 맥주를 마셨다.
갈증 날 때는 맥주가 최고지. 크윽! 시원하다.
작업복 남자는 맥주 안주로 나물을 먹는다.
음, 맛있네.
작업복 남자는 밥을 먹는다.
해리는 식당 구석으로 가서 다시 책을 편다.
남자가 밥값을 계산을 한다. 해리는 기계적으로 돈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를 한 다음 다시 식당 구석에 가서 앉는다. 현관문을 밀고 나가던 남자가 돌아서서 해리를 본다. 잠깐 해리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가 웃는다. 해리도 웃어준다.
그 소설 재미있지요? 나도 좋아하는 작가라오.
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날마다 남자는 온다. 늘 작업복 차림이다. 가끔 색깔만 바뀔 뿐 군청색 바지나 얼룩무늬 바지에 G 건설 마크가 찍힌 윗도리를 입고 있다. 하루, 이틀, 사흘, 남자는 딱 그 시간, 일부러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간만 찾아오는 것 같다. 남자는 해리에 대해 궁금해한다. 해리도 남자에 대해 조금 궁금하다. 사적인 짧은 대화를 나눌 때도 있다. 뜨내기란 것은 명찰을 달지 않아도 안다. 읍내 옆에 신시가지를 건설 중이다. 작업복 남자는 그 건설현장에서 일한단다. 가끔은 긴 대화를 할 때도 있다. 주로 책에 관해서다.
책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한 때 책벌레 소릴 들었는데. 스릴러 물 좋지요. 시간 때우기 좋고, 몰입도도 높으니까. 아주머니 나이에 책을 읽는다는 것이 좀 별나 보입니다.
그냥 아무 책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요. 무료한 시간 때우기죠.
책은 주로 어디서 빌립니까?
요 앞에 도서관이 있어요. 짬 날 때 가서 한 보따리 빌려다 놓고 봐요.
아, 그래요. 나도 그래야겠네.
남자는 슬쩍 해리의 눈을 본다. 해리는 빙긋 웃는다.
첫서리가 내렸다. 아침은 추웠다. 해리는 집을 나설 때부터 기분이 꿀꿀하다. 남편은 친구들과 등산을 간다 했고. 아들은 며칠 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로변은 온통 칙칙한 가랑잎이 떼를 지어 굴러다니다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앉았다. 굴러다니거나 구석에 처박히거나 가랑잎이 해리 같다. 가랑잎을 보는 사람마다 표현이 다를 수 있지만 해리는 자신의 인생 역시 가랑잎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온정 읍이란 구석에 처박힌 꼴이라니. 해리의 기분이 자꾸 가라앉는다. 음식점 문 열기가 싫다. 어딘가 달아나고 싶다. 마음뿐이고 해리는 기계적으로 식당 문을 연다. 단골로 오는 손님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식당 문은 열어놨지만 정성껏 만들던 시골반찬도 대충대충이다.
아주머니 무슨 일 있어요?
음식에 간이 덜해요.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표정입니다.
해리는 대꾸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점심 손님이 떠난 직후에 음식점 문을 닫고 쪽지를 붙였다. <개인사정으로 저녁 장사는 안 합니다.> 해리는 맥주를 갖다 놓고 안주도 없이 혼자 마셨다. 맥주만 마시자니 싱거워서 소주 한 병을 첨가했다. 알딸딸하다. 남자도 이런 기분에 취해 술을 마시지. 해리는 히죽히죽 웃는다. 소주를 탄 맥주도 오줌이다. 오줌을 자꾸 홀짝홀짝 마신다. 오줌이 마렵다. 화장실에 가는 것이 귀찮아 다용도실 하수구에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갈긴다. 속이 후련하다. 울고 싶다. 컥컥 목이 메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조금 더 강하게 더 강하게. 나중에는 쿵쿵 두드리며 아주머니를 외친다. 해리는 비틀거리며 나가서 문을 연다. 작업복 남자가 서 있다.
오늘 장사 접었는데요.
그냥 왔으니 술이나 한 잔 주소.
아저씨도 나만큼 꿀꿀한갑네. 술친구도 괜찮지요.
해리는 혀가 꼬부라진다.
작업복 남자와 대작을 한다.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술잔만 거푸 비운다. 맥주를 따른 컵에 소주 한 잔을 첨가해서 쭉 들이킨다. 해리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의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와요? 무슨 일 있는 교?
별로
사는 일은 고해의 바다라고 합디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다 떠나는 거지요.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해 보이소. 저야 뭐 귀는 열려 있으니까.
여기 드나든 지 제법 됐지요? 두세 달 됐나?
세월 참 잘 가네요.
여기 일이 대충 마무리 돼서 다른 곳으로 갑니다.
언제요?
내일 새벽 첫 차로 떠날 예정입니다.
어디로?
일단 서울 본사로 가야지요.
정들자 이별이네요.
정이 들었습니까?
그런 셈이죠.
잘 됐네요. 아주머님이 제게 통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요. 마침 장사도 접었고, 쓸쓸했는데. 잘 됐다. 준비 됐으니 쏘세요.
해리는 눈을 껌뻑거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안주를 내왔다. 남자가 좋아하는 산나물 무침이다. 남자는 산나물을 찍어 맛있게 먹는다.
맥주에 산나물 안주도 괜찮다는 것을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해리가 웃었다. 남자도 웃었다.
나는 서울 토박입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재산을 좀 물려받았지요. 부모님이 남긴 유산으로도 사는 일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건축계에 발을 대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 여자를 찾고 있지요. 너무 오래되어 내 머릿속에 각인된 얼굴은 희미하지만 그 여자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늙어 있어도 만나면 첫눈에 알아볼 것 같은 마음이지요. 30년을 전국 구석구석 안 돌아본 곳이 없지만 아직 여자를 만나지 못했답니다.
행복한 여자군요. 어쩌다 잃어버렸어요?
해리는 술이 깨는 느낌이다. 한 남자의 순정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해리도 한 때 한 남자를 지독히 그리워한 적이 있다.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그 남자가 그럴 리 없다고 철썩 같이 믿으며 기다렸던 적도 있다.
내가 버렸어요.
참 웃기는 아저씨네. 자기가 버린 여자를 왜 찾아요? 가정도 가졌을 법하건만. 그 여자를 찾아 뭐 하게요. 다 늙어 꼬부랑 할미가 되었을 수도 있고, 죽고 없을 수도 있는데. 포기하는 게 상책 같네요. 아직 아저씨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살 여자는 없어요.
결혼을 한 적도 있지만 이혼한 지도 오래됐습니다. 자식은 없어요. 젊어서 워낙 개망나니 짓을 많이 했으니 벌을 받아도 싸지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여자를 만나면 꼭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를 빌고 싶어요. 순수하고 맑았던 아이, 참 예쁜 소녀였는데. 내가 그녀를 못 쓰게 만들어버렸어요. 우리는 서울 역에서 만났지요. 짓밟힐까 두려워 달달 떠는 야생화 한 포기 같았지요.
그때 남자는 고등학생이었고 유도 도장에 다녔다. 남자는 학교에서는 우등생, 집에서는 도련님이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두 분이 다 모 은행의 간부급이었다. 부모는 그를 사랑했고, 사랑의 방식이 돈이었다. 품어주고 안아줄 수 없었던 부모는 모든 것을 돈으로 보상했다.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따뜻한 애정이 담긴 사랑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채워주지도 못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부가 챙겨주는 밥을 먹고, 운전기사가 태워주는 승용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끝나면 운전기사가 데리러 왔다. 과외를 하고 바이올린, 피아노를 배웠다. 고등학생이 되자 정적인 악기 대신 동적인 운동을 택했다. 도장에 다니면서 그는 달라졌다. 명훈이라는 친구를 알았다. 명훈이랑 휩쓸려 다니면서 술과 담배와 여자를 알았다.
그의 탈선을 알게 된 아버지는 매를 들었고, 그는 가출을 했다. 학교를 때려치우고 명훈이네 껄렁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소위 깡패라 부르는 집단에 들어갔다. 다섯 명의 불량청소년, 그들과 손목을 끊어 의형제도 맺었다. 패싸움을 하러 다니고, 또래의 멍청한 것들에게 삥도 뜯었다.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온실 안 개구리였던 그에게 세상은 혼돈이자 재미였다. 그러던 차 서울 역에서 한 여자 아이를 봤다. 틀림없이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가출 소녀 같았다. 그는 찍었다. 여자는 순수하게 그를 믿고 따라왔다. 그들이 머무는 여관까지. 여섯 명이 되었다. 여자는 그들과 같이 지냈다. 다섯 명이 가위보로 결정했다. 여자의 속옷을 가장 먼저 벗긴 것은 그였다. 여자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다섯 명은 동거를 했다. 그는 여자에게 물었다. 무엇이 필요한지. 여자는 아무 책이나 좋다고 했다. 그는 만화책도 구해다 주고, 가끔 예쁜 머리핀도 사다 주었다. 고급 빵도 사다 주었다. 여자는 고맙다고 했다.
너, 바보 같은 저 년을 좋아하지?
어느 날 명훈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돌림 빵에 익숙해진 년이야. 우리 팔아버리자. 돈도 없는데. 얼굴이 반반해서 제법 받을 거야. 내가 다 알아봤으니까 너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었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팔려갔다. 여자가 떠나는 날 그를 바라봤다. 처연하고 슬픈 눈이었다. 믿음을 상실한 체념의 눈이 푸르고 깊었다. 그는 여자의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수렁에 떨어졌던 자신을 건져 올려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착한 아들이 되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여자의 그 깊고 푸른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잊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는지 모른다. 스카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아내도 얻었다. 갑자기 유럽 여행을 떠났던 부모님이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순간 깨달았다. 순수한 한 영혼을 파멸로 이끈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그는 아내와 이혼했다. 그녀를 찾아 용서를 빌어야 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낮에는 현장에 있지만 밤이 되면 술집이나 다방을 뒤지는 것이 습관이 되었지요. 전국의 도시와 읍, 면을 다 돌아봤어요. 처음에는 바닷가를 먼저 뒤졌었죠. 그녀와 내가 서로의 운명이라면 언젠가 꼭 만날 것이라 믿어요. 여기도 이젠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어디서 어떻게 살든지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남자는 술을 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식탁 가득 속을 비운 술병이 늘어섰다. 식당 안이 어둑어둑하다. 해리는 불을 켰다. 그 사이 해리는 술이 말짱하게 깼지만 남자는 술에 절었다. 남자가 식탁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해리는 콩나물 해장국을 끓였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가시려고요?
네에. 계산합시다. 얼마요?
해장국 끓이고 있는데.
고맙습니다.
남자는 물끄러미 해리를 바라본다.
해리는 부엌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콩나물 해장국을 말없이 먹는다. 국과 밥을 말끔하게 비운 남자가 일어서 현관으로 나간다. 해리는 가만히 앉아 있다. 남자는 현관 옆 카운터에 푸른 지폐 한 묶음을 놓는다. 해리가 일어서자 남자는 앉아 있으라는 손짓을 한다. 남자가 현관문을 밀다가 돌아본다. 그 눈빛이 처연하다. 남자가 현관문을 짚은 채 구부정하게 등을 보인 채 말한다.
그 여자애를 팔기로 한 날 밤에 나는 그녀를 데리고 나갔어요. 여자가 참 좋아하더군요. 오빠가 좋아. 오빠 때문에 나 참고 있었어.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 말을 하는데 돌아버리겠습디다. 그녀에게 마지막 증표라도 남겨야 할 것 같았어요. 그날 밤 나는 그 여자애의 불두덩에 사랑의 증표를 새겼어요. 어딜 가 있든 나를 잊지 말라고요. 언젠가 꼭 찾겠다고. 찾아내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내일 아침 첫 차로 온정 읍을 떠나지만 두어 달 혼자 참 행복했습니다.
현관문을 밀고 나가는 남자의 구부정한 어깨가 축 처져 보였다. 해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새벽 해리는 서울행 첫 차를 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