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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r 08. 2024

어머니의 잠

<손바닥 소설>

<손바닥 소설>     

           어머니의 잠

              박래여     


 칠월에 시작된 장마는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물건도 사람도 물 먹은 솜처럼 축축하게 젖거나 늘어졌다. 이유 없이 짜증 난다. 시도 때도 없이 늘어져 자는 아내도 못마땅하다. ‘일어나 봐라. 뭐 좀 먹어야 살지.’ 마루에 큰 대자로 누워 코를 고는 아내를 툭 찼다.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고추 따 왔소. 잠 좀 잡시다.’ 아내는 성질을 버럭 내며 돌아눕는다. 마침 손전화가 시끄럽게 울린다. 전화를 받았다.

 “저기 김 상범 씨 댁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분자 할머니 보호자 되시나요?”

 “예”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도 모르게 손에서 전화기가 스르륵 빠져나간다. 전화기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아내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뭔 일이래?’ 묻는다. ‘어머이가 돌아가셨단다. 빨리 가봐야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마루에 퍼질러 앉아버린다. 아흔두 살의 어머니는 산송장이셨다. 어떤 약도 소용없었다. 삶의 의지를 모두 놓아버린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는 잠만 잤다. 숨만 꼴딱꼴딱 쉬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신기하게도 끼니때가 되면 부스스 일어나 앉아 주는 대로 받아 드셨다. 그것도 몇 년 지나자 혼자 일어나지도 못했다.  

 “가지.”

 아내와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과 달리 40여 년을 사셨다. 어머니는 환갑도 누워서 맞이했다. 온종일 잠을 잤다. 눈을 뜨고도 잠을 잤다. 어떤 의사표시도 없고 말하는 기능도 잃어버렸다. 집에 있을 때는 벽에 기대놓고 밥을 떠먹였다. 밥은 잘 드셨다. 아내는 어머니의 기저귀 수발을 십 년을 했다.

 넋이 빠져버린 어머니를 더는 집에서 돌보기 힘들 즈음 이웃에 노인 요양원이 생겼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숲 속 요양원은 쾌적하고 좋았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시면 금세 돌아가실 줄 알았지만 장장 30년을 사셨다. ‘참 명도 길지. 이제 울 엄니도 편하시겠네. 한이 많아서 죽지도 못하시더니 어째 가실 생각을 하셨을까. 우리 생각도 좀 해 주시지. 다 같은 아들인데 맏이만 자식인가.’ 올 것이 오긴 했지만 실감 나지 않는지. 아내의 한탄도 맥이 빠졌다.

 “막상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니 형수님이 생각나네. 통 소식 못 들었지? 어머님 요양원 보낸 후부터 소식 없었지 아마. 그전에는 가끔 어린 미림이 데리고 와서 울고 갔는데. 재혼해서 잘 살겠지. 식도 못 올리고 애 엄마 된 형님도 참 불쌍해.”

 아내는 혼잣말처럼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미림이는 형님의 유일한 혈육이다. 조카딸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승을 떠난 아버지를 알기나 할까. 내가 형수라고 부르는 박민정은 마산 문과대학생이었고 그 학교 복학생이었던 형에게 첫눈에 반했단다. 형과 형수는 대학에서 학생회를 이끌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정점을 이루던 시기였다. 전국에서 독재타도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대학생들이 있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대학생과 시민들로 구성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데모대는 ‘유신 정권 물러가라.’ ‘정치 탄압 중지하라’ 등의 슬로건을 내 걸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 여파는 마산과 진주까지 확산되었다. 훗날 이 데모를 부마민주항쟁이라고 불렀다. 그 시위대의 중심에 형님과 형수가 있었다. 형수는 뱃속에 형의 씨가 든 줄도 모르고 형과 함께 시위 현장에서 뛰었다.  

 우리 집은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다. 지리산 골짝에서 풀뿌리로 연명했다. 공부는 언감생심이었지만 형은 어려서부터 영재였다. 40리를 걸어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다녔던 형은 학교에서 전교 1등을 도맡아 하고 온갖 상을 휩쓸어오면서 우리 집안의 자랑이자 동네의 자랑이 되었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당께. 상철이는 대처에 내 보내 공부를 시켜야 혀. 판검사는 따 논 당상잉께. 우리 동네에서 판검사만 나와 봐. 집안의 가문에만 그쳐. 대대손손 우리 고장의 자랑이제. 자네와 동상들이 희생을 쪼매 하더라도 상철이 뒤를 닦아야 혀.’ 나와 여동생 셋은 형님의 공부 뒷바라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중학생이 되면서 마산으로 유학을 떠났다. 두 여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마산의 자유수출에 취직을 하고 두 칸 자리 방을 얻어 형님 뒷바라지를 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지리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캤다. 나는 일찌감치 장가를 들었다. 아내는 이웃 동네에 사는 여동생 친구였다. 어머니와 나는 돈이란 돈은 알뜰살뜰 모아 형님의 학비와 용돈을 보냈다. 형의 생활비는 두 여동생이 책임졌다. 형은 우리 면내에서 유일한 대학생이 되었다. 우리 집의 기둥이자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형은 대학 2학년 때 학생시위를 이끌다가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불온서적을 읽고 학생들을 선동하는 불순분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 와중에 지병을 앓던 아버지께서 충격을 받고 돌아가셨다. 형은 아버지의 초상도 못 치렀다.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 형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형은 복학을 했지만 공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였다. 술 먹고 뻗기, 학생 시위대에 앞장서기, 경찰에게 쫓겨 도망 다니기가 주 특기가 되었다. 

  1979년 10월 18일과 19일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였다. 학생과 시민이 거리행진을 시작했고 무자비한 경찰진압이 시작되었다. 학생과 시민, 경찰과 형사, 군인들이 맞붙어 좌충우돌하기에 이르렀고, 거리는 최루탄 가스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경찰은 거리에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을 무조건 데모대로 보고 두들겨 패는 것은 약과였고 반항하면 강제연행을 했다. 마산시내는 난장판이 되었다.

 나는 형이 학생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독재정권은 무너져야 한다고 믿는 탓에 형의 행로에 딴죽을 걸 필요조차 못 느꼈다. 형을 만날 때면 ‘형, 조심해. 자칫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려 개죽음당할 수 있어. 알지? 우린 지리산 따라지야. 조심해야 해. 세상이 개떡 같아 보여도 사람은 다 살아가잖아. 난 형을 믿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지리산 골짝은 바깥소식조차 멀었다.  

 그리고 며칠 뒤 10.26 사건이 터졌다. 그날은 우리 면내 오일장이었다. 형의 한 달 치 방세와 용돈을 보낼 때가 되어 면소재지에 나갔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동창들도 여럿 만나 실비 집에서 돼지고기 두루치기 한 접시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참이었다. 

 오후 서너 시경이었나.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습니다. 면민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집안에서 조용히 방송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면사무소에서 확성기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전쟁이 난 겨? 또 빨갱이가 쳐내려 온 겨? 갑자기 뭔 소리야?”

 실비 집에서 뛰쳐나왔지만 거리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위가 조용했다. 흥청거리던 저잣거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좌판만 널려있고 사람은 모두 숨어버렸다. 오후 늦은 시간에 계엄령이 해제되었다는 동네 방송이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대통령이 흉악범의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뒤숭숭한 며칠이 지나가고 있었다. 동네에 유일한 전화기는 이장 집에 있었다. 형님이 걱정되어 여동생 회사로 전화를 했다. 여동생은 엄마가 걱정할까 봐 연락 못했다면서 나만 알고 있으란다. 형님과 연락이 끊어진 지 달포는 됐다고 한다. 경찰이 몇 번이나 와서 집을 뒤지고 갔단다. 형은 집을 나가기 전에 경찰이 찾으러 올 것이니 무조건 모른다고 잡아떼라고 하더란다. 

 “민정 씨에게 연락해 봤어? 형님 친구들에게도 연락해 봐.”

 “언니는 아직 집에 감금당한 채 문밖출입도 못한다는 것 같아. 아버지가 경찰이잖아. 오빠 친구들은 거의 잡혀 들어가 있다네. 소식 들리는 대로 전화할게.”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형의 소식은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숨어 있겠지. 나라가 안정되면 제 발로 찾아오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꿈자리가 사납다. 아무래도 너의 형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경찰서랑 학교랑 가서 찾아봐라. 내가 왜 이리 불안한지 모르겠다. 잠을 통 못 자겠다. 어젯밤에는 너의 아버지가 보이더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가더라. 너의 형이 잘못되면 나는 못 산다. 가아 목숨이랑 내 목숨은 하나다. 너의 아버지와 조상님 뵐 면목도 없어 죽지도 못할 거다.’ 염불을 했다.

 그날도 나는 약초를 캐러 지리산 골짝을 헤매다 다 저녁때 집에 왔다.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어머니는 넋이 빠진 얼굴로 축담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 엄니,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내 손을 꽉 잡은 어머니는 눈동자가 풀리면서 맥없이 쓰러졌다. 동네 이장이 내 어깨를 짚었다. 

 “그게 말이여. 형사들이 댕겨 갔는데 상철이를 찾았다더마. 마산 자유수출 후문 옆에 있는 개골창에서 발견했디야. 지갑에서 학생증이 나왔디야. 보호자는 낼 다섯 시까정 마산경찰서로 오라하더마. 자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실신을 해부렀고, 경찰은 할 수 없는지 내한테 일임해 놓고 갔어. 시신이 맞는지도 확인해야 허고, 맞으먼 시신을 거둬야 한다더마.”  

 그렇게 형은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형은 온전한 뼈마디가 없었다. 그동안 어딘가에 감금당한 채 구타를 당한 것이 역력했다.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풀려난 것인지. 숨이 끊어지자 누군가 끌어다가 다리 밑의 개골창에 떨어뜨린 것인지. 경찰에서는 타살이 아니라 했다. 경찰에서는 실족사로 처리했다. 나는 형의 초상을 쳤다. 어머니는 그 길로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온종일 형의 무덤 앞에 가 앉아 있기 일쑤 더니 얼마 못 가 자리보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말문도 닫고 이만 뽀독뽀독 갈았다. 어머니의 이빨은 그렇게 오랜 세월 갈아서 사라졌다. 

 이듬해 오월,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졌지만 나라 소식에 문을 닫아버린 나는 일만 죽으라 했다. 그런 유월 어느 날, 형수가 갓난쟁이를 안고 찾아왔다. 산송장처럼 누운 어머니 앞에서 오열했다. 갓난쟁이가 형님의 딸이라고 했다. 미림이란다. 조카를 안았다. 형님을 쏙 빼닮았다. 어머니의 눈에 빛이 보인 것도 잠깐이다. 어머니는 아이의 손가락을 조몰락거리다 돌아누웠다. ‘민정 씨, 형님은 잊고 새 출발 하이소. 미림이는 우리가 맡지 예.’ 간곡히 부탁했지만 형수는 ‘형님께 속죄하는 길은 우리 미림이를 잘 키우는 길입니다. 지켜 봐 주세요.’ 미림이를 안고 떠났다. 

 형수는 잊을만하면 찾아와 자리보전하고 누운 어머니를 보고 갔다. 요양원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아내와 나는 요양원에 도착했다. 마지막 어머니 모습을 봤다. 핏기하나 없는 모습이지만 깨끗하고 편안해 보였다. 코로나 사태가 아니어도 어머니는 자식들로부터 잊힌 존재였다. 생존해 계시다는 것, 매달 요양비가 통장에서 빠지는 것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40여 년을 악착스럽게 잡고 있던 삶의 끈을 놓아버린 이유라도 있을까. 나는 잠깐 울었고 장례 치를 준비를 했다. 장례식장에서 어머님의 시신을 모시고 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요양원 원장을 만났다. 

 “오랫동안 어머님을 돌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머니는 좋은 곳에 가셨을 겁니다. 편안하게 떠나셨어요. 참 박민정 그분과 어떤 관계세요? 사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다녀가시는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지요. 엊그제도 모녀분이 다녀갔어요. 할머니 목욕 시켜드리고 전복죽을 끓여 와 먹여드리고 가셨어요. 이젠 할머니 뵈러 올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따님 따라 이민 가신다고 들었어요. 그분이 가시고 할머님은 잠드셨는데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이것은 할머님의 유품입니다. 여기 그분이 놓고 가신 서류도 있습니다.”

 요양원에서 30년 동안 모은 어머니의 유품은 종이박스 하나뿐이었다. 종이박스 안을 뒤적거리던 나는 관공서에서 쓰는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속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에 관한 문서와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 회복 심의 위원회>에서 보낸 형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금 관련 내용이 들어있었다. 형에 대한 모든 피해증빙자료는 형수에 의해서 작성됐고 형수가 발로 뛰어 얻어낸 결과였다. 나의 형 김 상철은 부마민주항쟁의 희생자였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의 잠은 이유 있는 잠이었다. 이제 영원히 잠 속으로 빠지셨으니 행복하지 않을까. 잠 속에서 형님을 만나 ‘너 장하다.’ 칭찬하지 않으실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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