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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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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Sep 26. 2024

맞춤형 글쓰기

맞춤형 글쓰기     



 수필이든 소설이든 원고청탁을 받으면 첫 물음이 ‘주제가 정해져 있나요?’ 묻게 된다. 주제는 자유선택이라 하면 휘파람을 불지만 정해진 주제에 맞춘 작품을 원할 때는 고민하게 된다. 나는 정해진 주제에 맞춘 글쓰기를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작가의 의도대로 자유로운 글쓰기를 해도 된다는 허락 하에 쓰는 글도 원고를 보내면 이런저런 토를 달고 바꿀 곳, 뺄 곳, 고쳤으면 싶다고 지적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글이 아직도 습작 수준을 못 벗어난 것인가. 퇴고를 했는데도 지적받을 정도로 사족이 많은가. 자괴감이 든다. 내 작품에 대한 가지치기 정도라면 괜찮다. 원고청탁 지면의 의도대로 글을 써 달라할 때는 그냥 ‘다른 작가에게 청탁하세요.’ 딱 잘라버리고 싶다. ‘선생님, 죄송해요. 저는 선생님 작품이 너무 좋은데 윗선에서 이 부분을 고치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청탁자가 울상을 지을 때 차마 거절을 못하고 다시 퇴고를 한다. 어떤 분야든, 글은 흡입력이 있어야 읽힌다. 내 글쓰기는 사설에 맞지 않다. 육하원칙에 맞춤 글쓰기는 머리에 쥐 난다.  


 영혼이 자유로운 작가에게 맞춤형 글쓰기는 그 작가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다. 원고료를 책정해 주는 청탁일 때는 더욱 갈등하게 된다. 작가도 생활인이다. 적당한 선이란 없다. 한국사회에서 원고료 수입만으로 생활고를 면하는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나머지 작가는 직업전선에서 뛰면서 글을 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본업이지만 생활인으로서 글쓰기는 부업이기 일쑤다. 고정수입이 없으니 가족의 부양을 책임질 수 없다. 인간은 어떤 부류에 속하든 모두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돈의 노예가 되기 싫어도 돈은 필요하다. 최소한의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본업에 충실할 수 있다. 인간은 살기 위해 태어났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생존은 본성이다.


 그렇다면 생존본능은 무엇인가. 의식주라고 본다. 입고, 먹고,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물론 자유의지에 의한 독창적인 글쓰기보다 육하원칙에 맞춤형 글쓰기를 잘하는 작가도 있다. 이렇게 써 달라. 저렇게 써 달라. 청탁자의 요구대로 틀에 맞춘 글쓰기가 편할 수도 있겠다. 나는 정해진 틀에 못 견뎌하는 천성을 가졌다. 신혼 초에 남편은 내게 상식적인 여자가 되라고 했었다. 농촌에 살려면 농촌의 틀에 맞추라는 것이었다. 남의눈을 의식하라는 것이었다. 행동 하나, 옷 입는 것,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것, 맞춤형 글을 원하는 청탁자와 같다. 


 물론 노력했다. 상식적인 촌부가 되도록 나를 죽이다 보니 내가 없어졌다. 나는 옆구리 터진 김밥처럼 마음의 병을 앓았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오기마저 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쓰기 싫은 글을 써 달라는 청탁에는 망설이지 않고 NO라고 할 수 있어야 내가 살 것 같았다. 나는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가족과 이웃이 똘똘 뭉친 완벽한 김밥이라면 나는 그중 하나 옆구리 터진 김밥이다. 옆구리가 터진 김밥은 완벽한 김밥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똑똑한 척하기보다 모자란 척하는 것이 편했다. 물론 글쓰기 초기에는 육하원칙에 맞춤형 글쓰기 연습도 했다.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거듭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육하원칙에 맞춘 글쓰기는 가지치기하기도 좋다. 딱 거기까지였다. 


 독보적인 글쓰기는 나만이 가진 창의력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안목과,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용기, 맞춤 틀에 길들어가는 나에 대한 두려움, 뛰어넘어야 하는 벽이 존재하는 삶, 그 모든 것이 잡지든 언론이든, 그 지면에 맞는 맞춤형 작품을 원하는 청탁자와 같다. 어떤 글이든 작가의 영혼이 깃들어야 독자의 마음을 잡는다. 작가의 마음이 깃들지 않은 글, 청탁자의 의도대로 언어유희를 한 글은 독자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


 나는 자유의지로 내 삶을 엮어가는 작가다. 겉치레는 진작 벗어던졌다. 내 곳간은 속이 꽉 찬 알곡으로 채워놓고 싶다. 물론 작품마다 가필정정이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할 수는 없다. 내가 쓴 글을 여러 번 퇴고해도 며칠 지나 다시 읽으면 눈에 보이지 않던 티가 나온다. 이번에도 원고 청탁을 받고 작품을 썼다. 나와 그 신문사의 인연에 대한 글이라 쉽게 생각했다. 어떤 글이든 작가의 진솔한 마음이 담겨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내가 쓴 글에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독자도 만족시키기 어렵다. 


 문제는 농촌현실에 대한 문제점과 희망을 제시하라는 요구였다. 촌부로 사십 년이 되도록 살아왔으니 우리 동네 변천사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것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피력할 수는 있지만 농촌 부흥에 대한 문제점을 공론화시킬 합당한 선을 찾지 못하겠다. 일단 내가 문제점으로 봐 왔고, 그 문제점에 대한 내 나름의 해결책을 생각한 것이 있어 썼지만 신문사가 원하는 내용에는 못 미치는 모양이었다. 농사꾼이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청년들이 귀농해서 잘 사는 농촌을 구사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한 때 전원생활 붐이 불었고, 전원주택지가 우후죽순으로 생길 때가 있었다. 오지의 다랑이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가 있었다. 복부인이 들락거리며 싼 값에 산 묵정이나 다랑이를 몇 배의 이득을 취하며 되팔기도 했다. 어찌 소문이 돌지 않겠나. 그 땅을 싼 값에 매각한 촌민은 속병을 앓고, 안 팔고 버틴 촌민은 일확천금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몇 해 지나자 부동산 시장이 곤두박질치고, 전원주택의 붐도 한 풀 꺾였다. 제 때 비싼 값 받고 땅을 판 촌민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값이 더 오를 것이라 믿었던 촌민은 울상이다. 전원생활의 낭만과 꿈에 젖어 귀향했던 도시사람들도 몇 년 못 버티고 다시 도시 아파트로 떠나는 것을 봐 왔다. 전원생활도 잠깐 나들이에 그쳤다. 나처럼 산골에 인이 박힌 사람은 묵묵히 살아간다. 귀촌했다가 몇 년 못 버티고 다시 도시로 나가는 젊은이의 변명은 타당한 점도 있다. 애들 교육 문제로, 농사지어 먹고살기 힘들어서, 벌레가 많아서, 산짐승이 무서워서, 풀이 무서워서, 친구가 없어서 떠난다고 했다.


 농촌은 불편하다 생각하면 불편한 것 천지다. 그 불편조차 감수해야 전원생활을 할 수 있다. 귀농청년을 유치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농사를 짓겠다고 들어온 청년에게 농토나 농가주택 구입자금, 농기계 등, 구입자금을 보상과 자부담으로 대출해 주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자리 잡기 힘들다. 몇 년 거쳐 몇 년 상환이라는 것도 빚이다. 초보 농사꾼이 농사를 잘 짓기도 어렵지만 그 농산물 판매로 매년 대출 이자 갚아내기도 어렵다. 돈이 청년의 목을 조르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 청년이 농촌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몇 년간 매달 최소한의 기본 생계비는 지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를 썼지만 내 바람일 뿐 실효성이 없어 보였다. 결국 지면이 축소되면서 그 부분을 빼라고 했다. 오히려 속이 후련하다. 나는 작가지 기자가 아니다. 농촌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다. 작가의 눈으로 보는 농촌, 내가 희로애락에 잡혀 살아온 농촌을 좀 더 깊고 세밀하게 그려내고 싶을 따름이다. 


 이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은 맞춤형 글쓰기도 배워야 할 분야라는 거다. 육하원칙에 의한 글쓰기는 사족을 빼고 뼈대만 남길 수 있다. 작가로서 기본기를 익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탄탄한 기본기가 서야 폭넓은 가지를 키울 수 있다. 나는 아직도 습작기에 머문 글쟁이 같다. 부끄럽지만 어쩌겠나. 죽을 때까지 배우고 분발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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