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1>
1.
‘일을 해야지. 좁쌀을 뿌린 것처럼 돋아나는 저 생명을 봐. 빈틈을 찾을 수가 없어. 너무 질겨. 질겨서 넌더리가 난다구. 뽑고 또 뽑아도 다시 솟아나는 저 억센 심줄. 저 풀처럼 잎눈처럼 나도 단단한 땅심을 뚫고 올라가야 해. 언제까지 조각난 그림을 맞추고 앉아 세월만 낚을 수 없잖아. 뭐든지 해야겠어. 묵정이가 된 밭에 김도 매야 하고 텃밭에 거름도 내야잖아. 오이씨도 넣고, 호박씨도 넣어야지. 작두날을 파랗게 벼려서 논 가운데 놓아두자. 그가 오면 천지개벽할 일이 생긴 줄 알게 움직여야 해. 몸을 움직이는 것은 건강에도 좋잖아. 뭐든지 해야지.’
마음은 종종걸음 치고, 두루마리를 엮건만 나는 앉은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끝 하나 놀리기 싫다. 그가 떠났다. 나는 그의 행동이 반란이라 생각한다. 바랑 한 개 달랑 메고 집을 떠나는 출가자처럼 가방 하나 들고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일주일 예정이지만 어떻게 될지 몰라.”
“나 혼자 두고?”
“당신 그 꼴 더 이상 보기 싫어. 이젠 이해하란 말도 듣기 싫어.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나잇살이나 먹은 여편네가 언제까지 그 모양으로 지낼 거야? 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그래 애들 보기 부끄러운 여자라면 예전에 정신 들었겠지. 제정신 가진 여자라면 당신처럼 그러지 않아. 봄만 되면 저거 에미 살짝 도는 거 애들도 안다구. 범이도 연이도 이젠 어린애 아니잖아. 진작에 무슨 사달을 내야 했어. 당신은 넋을 재 먼당에 던져 놓고 몸만 사람 행세를 하는 사람이야. 오죽하면 내가 이러겠어. 나도 이젠 진절머리 난다. 당신 말마따나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교육이라니 예전 같으면 당치도 않지. 하지만 나도 숨통 좀 틔우고 살자. 농촌 여자들이 당신 같은 줄 알아? 일은 고사하고 밥이나 제대로 챙길 줄 알아야지. 한다는 짓이 하루 종일 마당가에 앉아 풀꽃만 들여다보다 해 떨어지지. 안 그러면 미친년처럼 온 산을 쏘다니다 돌아와 끙끙 앓아눕기나 하지. 내가 없어져야 이 꼴 저 꼴 안 보겠지.”
“당신 없으면 난 어떡해.”
“알게 뭐야. 그런 애처로운 얼굴 짓지 마. 그 무심한 얼굴에 속아 산 햇수가 얼만데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아. 당신 편한 대로 살아봐.”
“나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는데.”
“그래. 알지 알고말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니까 이젠 혼자 살아 보라구. 도대체 뭐가 문제야? 부부라는 게 뭔데. 암튼 소나 굶기지 말고 잘 돌봐. 짚 하고 사료는 넉넉히 준비해 두었으니까 때 굶기지 말고 주기라도 해. 범이한테도 말해 두었으니 알아서 하겠지. 당신한테 말해 봤자 소용없는 줄 알지만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해. 당신은 그래도 나 보다 소를 더 아끼니까. 그 점은 내가 믿지.”
“많이 성났구나 당신.”
“하루 이틀 겪는 일이라야 성이 나지.”
‘그래 지내보는 거야. 이젠 잊을 때도 됐어. 잊고 싶어. 아니 잊고 있다가도 꽃 소식만 들리면 미치겠는 걸. 미치도록 미웠던 사람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거야. 그도 잘 참아 주었지. 그런데 갑자기 왜? 왜? 갑자기가 아닌지 몰라. 나와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한 적이 여러 번이잖아. 내가 전생에 당신에게 빚을 많이 졌나 보다는 말도 했어. 다 내 탓이야. 내 탓인 줄은 알지만 나도 나를 모르겠는 걸. 이럴 땐 어머님이 계셨으면. 어머니, 어머니.’
신혼 초였던가.
“아가, 니는 통 친정 이약을 않는구나. 한창 친정부모가 그리울 긴데. 시에미가 아무리 잘해 줘도 친정 옴마만 하것나. 내 눈치 보지 말고 친정 가고 싶거든 언제든지 댕겨 오거라. 알라가 생기모 두 번 갈 것도 한 번 밖에 못 가게 되니라. 너거 아부지가 엔간히 니를 예삐했는 모양이더마.”
“제 집은 여긴걸요. 어머니 딸이잖아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다만......”
그렇게 말해 주시던 시어머님이 그립다.
‘왜 그렇게 빨리 가셨어요? 더 사시지 않고, 제가 어머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아셔요? 미치겠어요. 이젠 그이도 가 버렸어요. 저를 더 이상 못 견디겠데요. 이 봄이 너무 잔인해요 내겐. 어쩌죠? 나 혼자 어떡해요 어머니.’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흐트러진 밥상을 치울 생각도 않는다.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왼팔을 받치고 그 위에 목을 얹은 상태로 앉아 오른손만 상위에 올리고 손톱으로 밥그릇에 붙은 밥알을 뗀다. 말라붙은 밥풀은 손톱으로 긁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겨우 떼어낸 밥풀대기를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는다. 이미 반찬 그릇도, 국그릇도 말끔하다. 거식증에 걸린 여자처럼 먹고 또 먹어도 허기가 지는 봄. 나에게 봄은 잔인하다. 사계절 중에서 봄만 쏙 빼다 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입안으로 들어오는 갈기가 심한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빗질을 해 본 지도 여러 날이 되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딸이 머리를 빗겨주려고 했을까.
“엄마, 내가 머리 빗겨 줄게.”
“싫어.”
“왜?”
“머리 밑이 아파. 불에 덴 듯 화끈거려서.”
“안 아프게 살살 빗겨 줄게.”
“관둬.”
“아빠가 안 빗겨 준다고 삐졌지?”
“아니, 아주 오래전에 너 보다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지.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늘 아이의 머리를 빗겨주곤 했어.”
“아버지가 그 애를 많이 사랑했나 봐.”
“그래, 그랬지. 아침마다 참빗으로 긴 머리를 빗겨 갈래머리로 쫑쫑 땋아 주셨지. 사람들은 길게 땋아 늘어뜨린 아이의 머리를 보고 달비로 팔면 돈 좀 하겠다고 부러워했지.”
“달비가 뭐야?”
“긴 머리카락을 잘라 묶은 단을 달비라 그래. 사극 보면 여자들이 머리에 따래 틀어서 올린 머리 봤지? 요즘처럼 인조 가발이 없었어. 그때만 해도 머리숱이 작은 여자들은 남의 머리를 사서 그렇게 얹었어.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솎아서 팔기도 했지. ‘달비 삽니다.’ 하면서 방물장사들이 농촌 구석구석을 다녔지. 엄마가 너만 할 때는 달비 장수가 우리 집을 들락거렸어.”
“엄만 왜 외갓집 안 가?”
“없으니까.”
“거짓말.”
“너 학교 안 가니?”
“참 학교 가야지.”
“아빠는 언제 오실거래?”
“며칠 걸리겠지.”
“걱정 마 엄마, 내가 있잖아.”
딸은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다 학교엘 갔다.
아직도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석상처럼 그냥 앉아 있을 뿐이다. 나의 눈앞에 펄럭거리며 떨어지는 하얀 꽃잎과 연등 속의 촛불만 붉게 타고 있다.
‘망경 스님,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지도 않을지 몰라요.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겠죠. 베일 속에 묻어둔 기억을 꺼내어 생채기 내는 짓은 하지도 않았겠죠. 아버지께 몹쓸 짓을 했다는 자책감을 아시나요? 평생을 두고도 용서받을 수 없는 나의 한을 아시나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내 인생을 송두리 채 흔들어놓고. 내 이름석자 기억이나 할까요. 이제 난 젊지 않은데. 내 기억은 이 봄 어디쯤에서 멈추어서 움직이지를 않아요. 허깨비처럼 그 시점을 찾아 심한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왔죠.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야 할지.’
“모진 년. 참말로 독하고 모진 년. 내 죽기 전에는 니꼴 안 보끼다. 내 살밖에 들어설 생각 마라. 내가 니한테 올매나 모지고로 했다꼬 너거 아부지 잡아묵노. 사람을 구하모 앙물을 한다쿠더이 내가 그 짝 났다. 그 잘난 년 땜새 내 인생 종 친 거라. 니도 내 맹키로 살아봐라. 니 속 짚어 내 속 알 날 있을 끼다.”
친정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발딱 일어났다.
‘일을 해야 해. 난 일을 해야 해. 난 살고 싶지 않아. 그래도 난 억척스럽게 살아내야 해. 그게 내 몫이잖아.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날 거두어주고 사랑한 죄 밖에 없는데.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주섬주섬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끝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