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촌부 일기

꽃다발을 받고

by 박래여

꽃다발을 받고


꽃병의 물을 갈고 다시 꽃을 꽂았다. 하얀 안개꽃이 장미를 받쳐준다. 장미송이는 꼭꼭 싸매고 있던 꽃잎을 살짝 열었다. 입을 맞춘다. 꽃잎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이 꽃다발 속에 앉아있다. 설에 인사를 온 며느리 될 처녀가 안겨준 선물이다. 꽃을 선물하는 처녀의 마음이 꽃처럼 예쁘다. 때 묻지 않은 맑은 눈빛이 반짝였다. 우리 가족이 되어 줘 고맙다. 아들과 사귄 지 한 달 만에 저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는 처녀, 둘이 몇 년째 결혼자금을 모은다고 하더니 결혼자금이 마련된 것일까.


젊은 연인이 주고받던 눈길이 꽃에 머물러 있다.

불쑥 기억 하나 찾아온다. 데이트를 하던 중, 잠깐 기다려 달라며 어딘가 달려갔던 남자, 안개꽃 사이에 흑장미 한 다발을 꽂아 쑥스러워하며 내밀던 남자, 결혼해 달라고 했었다. 나는 결혼 생각 없다고 잘랐지만 안개꽃 속의 흑장미가 매혹적이었다. 그 남자와 사십여 년을 살고 있다. 두 아이의 어미가 되고, 중년이 되었을 때도 그는 가끔 꽃다발을 내밀었다. 나는 꽃 사는 돈으로 책이나 사 주면 어디 덧나느냐며 꽃다발을 반기지 않았었다. 쓸데없는 돈 쓴다고 불퉁거렸다. 가끔 그때 생각을 하면 미안해진다. 그것도 잠깐인데 왜 그랬을까.


남매가 성인이 되자 결혼기념일이나 생일도 남매가 챙겨준다. 대부분 신간 책을 선물 받는다. 가끔 주말이 걸리면 케이크와 꽃다발을 안고 다녀가기도 한다. 아이들이 주는 꽃다발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꽃은 화사할 때도 잠깐이고 질 때도 잠깐이다. 예비 며느리에게 받은 화사한 꽃다발이 새삼스럽게 과거를 소환한다. 내 욕심만 채우고자 애썼던 젊은 시절, 아집 강한 나를 돌아본다. 이제 나는 지는 꽃이다. 다 내려놓고 추하지 않게 지고 싶을 따름이다.


꽃철이 돌아오면 산골은 화사해진다. 무심하게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눈여겨보면 예쁜 들꽃 천지가 된다. 지금은 겨울이라 꽃이 없는 철이다. 매화 피기를 기다린다. 매화는 늦은 한파에 한껏 움츠려 있다. 꽃이 그리울 때 꽃다발을 받았다. 그 꽃이 소중하다. 날마다 꽃병의 물을 갈아주며 지저분한 꽃잎과 시든 꽃잎을 골라낸다. 의외로 장미와 안개꽃은 오래간다. 바깥이 시끄럽다. 그는 고장 난 에스에스기를 손보고 있다. 털 털 털 떨다가 조용해지는 기계음조차 살아있는 리듬 같다. 나잇살 늘면서 남자는 가끔 매혹적인 흑장미와 안개꽃 대신 들꽃 한 아름을 안기곤 한다. 삽짝의 매화가 피면 그는 매화꽃가지를 꺾어 와 슬그머니 식탁에 놓아줄 것이다.


소소한 일상이 거듭나는 나날이지만 감성이 살아있는 남자랑 사는 여자는 행복한가. 나는 유자차를 따끈하게 데워 나간다. ‘다 고쳤어요?’ ‘일단 작동은 한다만 조만간 공장에 가져가야 할 것 같다. 부품이 낡았어.’ 그가 유자차를 마시는 동안 나는 집 아래 저수지를 바라본다. 저수지에 은비늘이 반짝인다. ‘겨울 다 갔나 봐. 내일은 비나 눈이 온다지요?’ ‘와 봐야 알지. 일기예보 믿을 수 있나.’ 꽁꽁 얼었던 저수지도 많이 풀렸다.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청둥오리가 보일 똥 말똥 하다. 그는 찻잔을 내게 건네고 에스에스기를 몰고 나무하러 간다. 나는 꽃병을 쪽마루에 내놓고 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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