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막걸리 한 잔
왜 인간의 삶을 인생이라 하는가. 인생은 각자의 삶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걸어온 길은 사람마다 다르다. 길이 다르기 때문에 인생이라 하는가. 생명은 태어나면 당연히 살고 사랑하고 죽는 과정을 겪지만 사람마다 다르다. 똑같은 삶은 없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비극이거나 희극일 수도 없다. 보통의 삶, 평범한 인생이라지만 인생은 평범하지 않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온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답이 다를 것이다. 잘 살아왔다는 사람보다 후회스럽다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사람은 죽음을 앞두면 살아온 날만 반추하게 되는 것 같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 자신이 가진 것들, 소중한 것조차 모두 놔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 분노와 두려움은 극에 달하지 않을까. 그 분노와 두려움조차 시간이 해결해 준다. 결국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죽음을 거부하거나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
인간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다.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죽은 사람이 돌아온 적은 없다. 드물게 죽었다 살아났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후 세계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끝이다.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다. 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영혼 역시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도 산 사람의 몫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진리다. 삶은 산자에게만 해당되는 낱말이다. 내가 살아있어야 삶이니 죽음이니 논할 수도 있다.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이 인생일 따름이다.
그러나 티벳 불교에서는 환생 설을 주장한다. 환생자를 찾는 제도도 있다. 티벳불교에서는 환생자를 지칭하여 뚤구라고 한다. 뚤구는 깨달음을 얻은 존재를 말한다. 일상에서는 린포체라고도 한다. 흔히 환생자라면 달라이라마를 연상하지만 일반 중생도 깨달음을 얻으면 환생을 한다고 믿는다. 육체를 떠난 망자가 저승길을 갈 때 건너야 하는 강이 있는데 그 강물을 마시면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하여 망각의 강이라고 한다. 그 강물을 먹지 않으면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이승에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그 강물을 마시지 않고 저승 강을 건너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잘 살고 있는가. 잘 죽고 싶은가. 잘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해 헤맨다. 잘 죽고 싶다고 잘 죽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죽음이 오면 편하게 받아들여야지. 사전 마음준비도 하고, 가진 것들 정리도 하고, 욕심도 내려놓아야지. 머리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과연 마음까지 그럴 수 있을까. 내게 온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죽음은 부지불식간에 올 수 있다. 내가 죽음을 받아 들이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올 들어 친인척 두 분을 저승길로 배웅했다. 일흔 하나의 친척 시동생과 아흔다섯의 외숙모님이 저승으로 떠나셨다. 다시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분들과 너나들이하던 과거사도 잠깐 소급되었다가 소멸될 것이다. 형제자매의 생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살아있다면 집안일이 있을 때나 잠깐 얼굴 보고 헤어질 것이고, 죽었다면 잠깐 떠올랐다 사라질 것이다. 내게 치명적이지 않으면 기억은 시나브로 희미해진다. 산자의 변명이고 진실이 아닐까. 내가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죽은 사람을 기억할 수 있을까. 요즘 들어 부쩍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잦다. 보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다. 꿈에서는 만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죽음의 실체다.
계절은 해마다 제 철을 맞이하고 또 보낸다. 꽃철이 시작되었다. 햇살도 포근해졌다. 길섶의 매화가 하루가 다르게 꽃잎을 연다. 산수유도 노르스름한 입술을 내민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꽃들이 한꺼번에 개화할 것 같다. 삭막했던 숲은 푸름으로 덮일 것이고 사람들 마음도 덩달아 들썩이겠지만 촌로는 땅을 뒤집고 씨앗 뿌릴 준비를 하기도 바쁘다.
일철이 시작되었다. 감나무 전지를 끝낸 농부는 매화와 모과나무도 깔끔하게 가지치기를 해 준다. 감자씨앗도 챙긴다. 텃밭도 뒤집었다. 과수원에는 거름더미가 놓였다. 반쯤 망해버린 고사리 밭에 굴착기가 골을 지르고 있다. ‘겨울 내내 처박아 두더니 뒤늦게 뭐 하는 짓이지?’ 고사리 밭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서서 고사리를 꺾겠다고 골을 깊이 판단다.’ 골의 흙을 고사리 두둑으로 퍼 올리면 고사리가 제대로 솟아날 수 있을까. 새싹은 뭐든지 힘이 장사다. 흙에 깊이 묻혀도 솟아날까. 고사리가 솟아날 때가 됐다. 뒤늦게 일을 벌이는 청년이 참 답답하고 안타깝다. 그렇다고 고사리 밭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다. 내 손을 떠난 고사리 농사다. 고사리 밭을 남의 손에 넘겼다. 몇 년째 농부가 멘토 노릇을 하지만 쇠귀에 경 읽기다.
“동서, 동서네 고사리 맛이 그립더라. 동서네 고사리 샀던 친구들이 지금도 그 고사리 맛을 이야기한다. 고사리 농사 다시 짓는지 묻더라. 고사리가 어쩜 그리 부드럽고 맛있는지. 요새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고사리였어.”
외숙모님 장례에 왔던 서울 외사촌 형님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오랫동안 우리 집 고사리 고객이었다. 주변에 팔아주기도 많이 했었다. 우리 집 고사리 맛을 잊지 못한다는 고객이 지금도 있단다. 이미 내 손을 떠난 고사리지만 나 역시 그 맛이 아쉽다. 올해는 야생 고사리라도 꺾어볼까. 우리 집 먹을 거라도 내 손으로 거둘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부질없는 짓이고 노탐이다. 내 손 떠난 것에 미련 갖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인생, 낱말 그대로 인간의 살아가는 길이다. 나도 살고 남도 살 수 있는 인생길은 어떤 길일까. 상부상조하고 살 수 있다면 태평성세가 가능하지 않을까. 현명한 지도층이 무엇보다 절실한 현실이다. 농부는 마당가의 나무를 다듬고 정리를 한다. 집 주변이 말끔하게 다듬어진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찾아 한다는 것, 그것이 천직이든 아니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살면 잘 사는 인생이 아니겠나.
막걸리 한 잔 안 주나?
이런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벌써 새참 때네.
나는 서둘러 막걸리를 꺼내고 막걸리 잔을 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