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3>
그래도 내가 새댁일 때는 시아버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우리 며누리, 우리 복덩이’ 하면서 어찌나 예뻐하시던지. 시아버님 사랑은 며느리라는 말을 진짜배기로 믿었던 나는 몇 년 못가 시아버님 때문에 경기를 일으켰다. 시아버님이 달라지셨던 것이다.
“간도 하나 제대로 못 보나. 못 배운 티 내나? 이기 소태제 음슥이가. 다시 맹글어 온나. 집안에 여자 하나 잘 들어오고 못 들어오는 것에 따라 살림살이가 달라진다. 니가 뒷구녕으로 빼 돌리는 거 내가 뻔히 안다. 오데서 거짓말을 하노.”
“아부님 살림 빼 돌린다는 말씀은 마세요. 데름과 고모 학비랑 생활비 보내기도 허리가 휘는데.”
처음에는 시아버님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몇 년을 나는 시아버님의 말도 안 되는 행동거지를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 냉가슴을 앓으며 참았다. 40대 초반에 홀로 된 시아버님이 불쌍했다. 옛날처럼 과수댁을 보쌈이라도 해다 방안에 넣어드리고 싶었다. 시아버님께 호되게 당한 날은 눈물콧물 닦았다. 그는 말없이 품어주었다. 그랬던 나도 살림때가 묻으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는 못 살아.’오기가 생겼다. 시아버님께 대들었다. 솔직히 맞장을 떴다.
“할배요. 술 묵고 깽판 부릴 심으로 논에 나가서 나락이나 베소.”
“이기 시애비를 핫바지로 아나. 니 머라캤노? 암탉이 울모 집안 망한다 캤다이”
“할배, 망한 집안 요만큼 키운 것도 내 덕이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쇳소리가 울을 넘나들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시아버님의 기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내 편도 시아버님 편도 못 들고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착한 남자였다. 호사다마라 했든가. 가을이었다. 우리 집 삼형제가 초중학생이 되었을 때다.
“아버님 밥 잡수로 오이소.”
새벽밥을 차려놓고 시아버님을 불렀다. 감감무소식이었다. 시아버님은 자는 잠에 가셨다. 50대 초반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심장마비였지 싶다.
그러나 산 너머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동생과 시누이였다. 남매는 법무사에서 받아온 문서를 내 놓고 자기네 몫의 재산을 달라고 했다. 대학물 먹은 시동생은 배운 티 폴폴 내며 형을 코너로 몰았다. 맏아들이라고 부모님 재산을 다 차지할 수 없다면서 법 조항을 조목조목 따지는데. 무식한 우리는 할 말이 없었다. 생전에 시아버님이 남매에게 구두로 유산분배를 해놨다는 것이다. 방앗간만 우리에게 물러주셨다는 것이 아닌가. 금시초문이었지만 어쩌랴.
“더럽고 치사해. 줍시다. 주고 나머지 가지고 여길 뜹시다. 다시는 당신 동생들 안 보고 싶소. 나도 우리 애들 대학까지 보내고 싶단 말이오. 인자 농사지을 논밭도 없고, 가정용 정미기가 보급되면서 방앗간도 문 닫아야 할 지경 아니오. 이참에 다 정리하고 도시로 뜹시다. 무슨 짓을 해서든 먹고 살 길은 있지 않겠소. 당신만 따라주시면 나는 살아낼 자신 있소.”
그렇게 해서 시동생과 시누이 몫으로 논밭을 나누어 주었다. 그들에게 만정이 떨어졌다. 내가 거두어 키우고 공부뒷바라지 한 공은 어디에도 없었다. 믿었던 그들이 내 등에 칼을 꽂았던 것이다. 재산 앞에서는 형제도 자매도 남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기업에서 형제자매끼리 재산 싸움을 하는 것을 볼 때는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럴 수 있나.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돈도 많으면서 왜 저럴까. 한심했었다.
그러나 쥐꼬리만큼 남긴 시부모님의 재산 때문에 당한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무식한 내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때 결심했다. 비록 나는 못 배웠지만 공부하겠다는 자식이면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뒷바라지 하겠다고 다짐했다. 마침 M시 변두리 저자거리에서 기름집을 운영하는 이모의 친척형님이 있었다. 이농을 하고 싶다고 의논을 드렸다. 형님은 첫 마디에 고개를 흔들었다.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 생활 하겠나? 고향에 살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한데. 도시는 안 그렇다.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다. 어수룩했다간 쌈짓돈도 뺐기는 곳이 도시다. 텃세는 또 얼마나 심한지. 시장은 토박이들 텃세가 무섭다. 나도 자리 잡기 참 힘들었다.”
“그래도 형님, 자리하나 봐 주이소. 애들 갈치려면 촌보다 도시가 낫지 예. 그동안 국가 빚쟁이로 시동생과 시누이 뒷바라지 했습니다. 방앗간도 옛날 말이지 예. 방앗간 돌리 봤자 빚 이자 갚기도 심듭니더. 싹 팔아서 빚 탕감하고 나모 남는 것도 없지만 우짭니꺼. 형님 덕 좀 보입시더.”
“심들것네. 내가 자리는 알아봐 주께. 니는 장사하모 잘 하끼다.”
그렇게 M시로 스며들어 도시 서민으로, 장사꾼으로 30년을 살았다. 나는 주변에서 악착스러운 여편네 평을 들었고, 그는 법 없어도 살만큼 선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나는 성격이 직선적이다. 무슨 말이든 속에 담아두지 못했고 바른 소리를 잘 했다. 수틀리면 안면 몰수하고 상대방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채 패대기치는 몰상식한 여자이기도 하다.
시장에서 수리엄마로 통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도 식품 가게를 했다. 우리 가게를 찾는 손님이 늘자 수리엄마는 시샘을 했다. 장사꾼의 시샘은 무섭다. 처음 몇 번은 그 여자가 우리 손님을 낚아채고 내 험담을 해도 모르쇠 했지만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그 시간이면 나는 상점을 그에게 맡기고 먼저 퇴근을 했다. 애들 저녁밥 때문이었다. 삼형제가 중 고등학생이었다. 챙겨야 할 집안일이 산더미 같았다. 하필이면 쌀 배달로 늦을 거라고 했다. 무릎도 아프다고 했었다. 마음이 아팠다. 배달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해 놓고 나도 일찌감치 반찬거리를 챙겨 가게를 나섰다.
그 여자네 가게 앞에 있는 둥근 탁자에 앉은 서너 명의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장 통에서 잔뼈가 굵은 여자들은 하루 일과를 끝내면 여자들 끼리 모여 술 한 잔 하기 일쑤다. 나는 인사나 하고 지나가려고 다가갔다. 그 여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게 등을 보이고 상가 앞의 의자에 앉은 여자, 귀가 솔깃해졌다. 수리엄마였다.
“그 무식한 여편네가 곱상한 샌님 끼고 사는 것 보소.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지 싶어. 기갈은 올매나 드센지. 그 아저씨가 꼼짝을 못한다니까. 그 아저씨 빼짝 마른 거 보소. 서방 일찍 잡아 물 여자라요. 이런 말 하모 안 되것지만 밤일은 오지게 볼힌다는 소문이라요. 두고 보소. 그 아저씨 오래 몬 살기요.”
“머가 어째? 이 년이 째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모 돼는 줄 아나?”
순식간이었다. 내 몸이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이 앞섰다. 나는 선걸음에 달려가 그 여자의 파마머리를 한 옹큼 잡아 젖혔다. 눈이 휘둥그레진 수리엄마랑 눈이 딱 마주쳤다. 이글거리는 내 눈길을 피하며 여자는 소리소리 질렀다.
“옴마야, 이 여자가 사람 잡네.”
나는 수리엄마를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래, 오늘 너 임자 만났다. 이기 보자보자 하니 내가 보재긴 줄 아나. 내 서방한테 알랑방구 뀌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니년은 오다가다 만난 남자랑 산다 쿠데. 지 버릇 개 못 준다. 오데서 잡소리고.”
나는 길바닥에 넘어진 수리엄마를 걸터앉아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뺨을 때려줬다.
함께 있던 여자들이 달려들어 나를 뜯어말렸다.
“당신들도 똑 같아. 촌년이라고 괄시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내 욕 하는 거는 괜찮지만 내 서방 욕 하모 내 꼭지가 확 돌아 삔다. 당신들이 뭘 알아? 그라고 수리엄마, 당신 그러면 안 돼. 남의 남자 뺏어 산다는 거 이 시장 통에서 모르는 사람 없어. 너만 모르지? 너 때문에 박살난 가정이 한두 집도 아니라매? 아랫도리 잘 근사해. 그러다 칼부림 당해. 너 벼르는 사람 많더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