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나는 건담을 처음 만났다

25년째 내 손톱을 다치게하는 나의 첫사랑

by 해바라기

1999년 여름, 중학교 2학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길고 뜨거웠다.

매미 소리와 시멘트 바닥의 열기, 학원 가방의 무게, 모든 것이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었다.


그날은 친구 생일이었다.

엄마가 쥐여준 만 원짜리 한 장을 꼭 쥐고 선물을 사러 문방구에 들렀다.

그런데 결국 그 돈으로 내 것을 사고 말았다.

진열장 맨 구석, 먼지 낀 투명 박스 안에 놓인 HG 1/144 RX-78-2 건담. 가격은 8,900원이었다.

(이제와 이 건담을 보면 건담의 베이스가 되는 기초 건담으로 흔하디 흔한 모델이다.)


나는 남은 1,100원으로 친구에게는 300원짜리 얼어있는 화인쿨이랑 아폴로 등 불량식품을 생일 선물이라며 이것저것 사줬다.

친구는 그날 나에게 꽤 서운해했지만, 나는 그 서운함을 감수할 만큼 건담이 간절했다.

아직도 그 친구에게는 갚지 못한 빚이 남아 있다.


집에 돌아와 불을 끄고 스탠드만 켠 채 박스를 열었다.

런너에 조각조각 붙어 있는 하얀 부품들.

설명서는 일본어였지만 그림만 봐도 다 알 수 있었다. 니퍼가 없어서 손톱깎이로 부품을 잘랐다.

흰 플라스틱이 뚝뚝 끊어질 때마다 심장도 같이 뛰었다.

세 시간 만에 완성된 건담이 내 책상 위에 섰다.

관절은 뻑뻑했고, 게이트 자국은 희끗희끗 남아 있었고, 왼쪽 어깨는 자꾸 빠졌다.

그런데도, 세상에, 그건 건담이었다. 내 방에, 내 책상 위에, 건담이 서 있었다.


열다섯 살의 나는 왜 그렇게까지 건담에 매달렸을까.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나는 너무 작았다.

키도 작고, 성적도 중간이고, 좋아하는 여자애에게는 말 한 마디 못 걸었다.


교실에서 나는 늘 배경이었다.

누구의 주인공도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존재감 없이 교실에 앉아 있다 돌아오는 하루가 나는 지겨웠다.

그런데 그 지겨움을 뚫고 나를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책상 위의 건담이었다.

열다섯의 나에게 그 플라스틱은 도피처가 아니라 탈출구였다.

도피는 잠시 숨는 것이고, 탈출은 다른 세계로 나가는 것이다.

나는 매일 저녁 책상 앞에 앉아, 일년전쟁의 우주로 탈출했다.


건담을 조립하는 그 세 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었다.

손끝에서 기체가 완성되어 갔다.

부품 하나하나가 내 결정이었다.

이 각도로 세울지, 저 무기를 쥐여줄지. 책상 위에서만큼은 내가 파일럿이었고 정비사였고 감독이었다.

작은 책상은 거대한 우주였고, 나는 그 우주의 주인이었다.

교실에서 엑스트라였던 내가, 방으로 돌아오면 일년전쟁의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다.

그 이중 생활이 나를 살렸다. 낮의 초라함을 밤의 우주가 메워주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용돈을 모았다.

배고플 때 뭐라도 먹으라던 용돈은 삼각김밥 하나로 때우고, 오락실을 끊고, 친구들이 PC방에 갈 때 나는 바쁘다며 핑계를댔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한 달에 하나씩 건프라를 샀다.

자쿠, 구프, 돔, 겔구그.

이상하게도 지온군 기체가 더 좋았다. 왜였을까.

아마 지고 있는 쪽이어서였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나처럼, 그들도 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정이 갔다.

패배자의 마음은 패배자가 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작은 패배를, 자쿠의 모노아이 뒤에 숨겨 두었다.


아버지는 내 책상을 볼 때마다 혀를 찼다. "사내놈이 집에만 있고, 그 인형은 또 뭐냐"

나는 이것이 인형이 아니라 모빌슈트라고, 일년전쟁의 역사가 담긴 기록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에게 건담은 영원히 플라스틱 인형이었고, 나에게 건담은 영원히 건담이었다.

그 거리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아직도 아버지 앞에서 건담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의 무서운 얼굴 앞에 나는 단 한 번도 내 건담을 꺼내 보인 적이 없다.

나와 반대로 아버지가 약해보일까봐.


그 열다섯 살의 RX-78-2는 현재도 잘 간직하고있다.

이사를 다섯 번 하고, 연애를 네 번 하고, 결혼까지 했지만 그 녀석만은 버리지 않았다.

어깨는 여전히 빠지고, 관절은 더 헐거워졌고, 흰색은 누렇게 변색됐다.

아내는 가끔 그걸 보고 묻는다. "이거 진짜 못 버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이건 내 첫사랑이야."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그날, 열다섯 살 여름에, 그 조그만 흰색 플라스틱에게 진심으로 반했다. 그리고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