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자율학습에 니퍼를 들었다

샤프대신 니빠

by 해바라기

라떼는 고등학교때 수업이 끝나고 남아서 공부하는 '야간자율학습'이 있었다.

줄여서 '야자'라고 했는데, 난 고등학교 3년 내내 야자 시간이 싫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으면 머릿속에는 책상 위에 반쯤 조립해 놓고 나온 MS-06 자쿠가 떠올랐다.

왼쪽 팔 관절이 뻑뻑해서 어떻게 고칠지 고민 중이었다.

이차함수 그래프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가 안 됐지만, 자쿠의 모노아이 구조는 한 번에 이해가 갔다.

세상은 내게 수학을 요구했지만, 나는 세상에 건담으로 답하고 싶었다.


고2 가을, 결국 그 짓을 저질렀다.

야자 2교시, 화장실 가는 척 나와서 학교 뒷문을 넘었다.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가서, 가방을 던져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를 켜고 니퍼를 들었다.

그 순간 느꼈다. 이거다. 이게 내 삶이다. 문제집보다 건프라가 나를 더 잘 설명했다.

야자실 내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내 책상 위에서는 자쿠가 완성되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출석부에 내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치지 못한 그 시간, 나는 책상 위에서 가장 충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 저녁 어머니께 들켰다. "너 야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니?" 나는 니퍼를 든 채 굳어 있었다.

어머니는 내 책상 위를 한참 보시다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가셨다. 혼날 줄 알았는데,

그날 저녁 반찬으로 내가 좋아하는 돼지불고기가 나왔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아셨던 것 같다.

아들이 도망친 곳이 PC방도 당구장도 아닌, 자기 방 책상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책상 위에 플라스틱 조각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놓여 있었는지를.

어머니는 아들이 어디서 도망치느냐보다, 어디로 도망치느냐를 보셨다.

그 눈이 있어서 나는 엇나가지 않았다.

훗날 내가 어른이 되어 회사에서 후배를 볼 때마다 그 어머니의 눈을 떠올린다. 문제를 다그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먼저 보는 눈.


대학 원서를 쓸 때도 나는 건담을 생각했다.

성적에 맞춰 기계공학과를 갔다.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 나는 자축 대신 샤아 전용 자쿠II를 샀다.

빨간색, 삼 배속. 책상 위에 올려두고 혼자 중얼거렸다. "공대생이 된 이상, 나는 더 이상 파일럿이 아니라 정비사다."

말도 안 되는 비장함이었지만, 그때 내게는 그게 인생의 한 챕터를 넘기는 의식이었다.

열다섯의 나와 작별하고 스무 살의 나로 넘어가는, 지극히 사적인 성인식.


물론 대학에서 배운 기계공학은 내가 상상한 모빌슈트 정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유체역학과 열역학과 재료공학. 건담은 그 어느 과목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전공책 한쪽 구석에 늘 자쿠를 그려 넣었다. 교수님이 판서를 하시면, 그 옆에 연필로 조그맣게 MS-06을 스케치했다.

강의실 제일 뒷자리에서 혼자 웃는 나를, 동기들은 좀 이상하게 봤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스무 살의 나는, 열다섯의 나보다 훨씬 떳떳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어른이 되는 첫걸음이라는 걸 그 무렵 어렴풋이 알았다.


스물한 살, 군대를 갔다. 훈련소에서도 건담 생각이 났다.

각개전투 훈련을 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 지온군 보병이네." 자대 막사 창밖으로 별을 보면서, 나는 우주세기 0079년의 사이드3를 떠올렸다. 군대는 힘들었지만, 상상 속에서 나는 항상 어딘가의 전장에 있었고, 내 옆에는 늘 건담이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생활관에 돌아와 관물대에 기대 눈을 감으면, 집에 두고 온 미완성의 자쿠가 보였다.

이등병 시절, 고참에게 구타당한 날 밤에도 나는 그 자쿠를 떠올리며 버텼다.

내게는 돌아갈 책상이 있었다. 그게 어떤 훈장보다 든든했다.


제대하던 날, 어머니가 택배 상자 하나를 건네주셨다. "네가 입대 전에 주문해놨던 거." 이년 반 동안 방 한 구석에 놓여 있던 PG 1/60 RX-78-2(?)였다.

스무 살의 내가 스물셋의 나에게 보낸 편지 같았다. 잊지 말라는 편지. 네가 누군지 잊지 말라는 편지.


그날 밤 나는 새벽까지 그 녀석을 조립했다.

여섯 시간 만에 완성된 PG 건담이 내 책상 위에 섰을 때, 나는 처음으로 눈물이 날 뻔했다.

열다섯에 시작된 여정이, 이제 겨우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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