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반란의 불길을 힘없는 조정이 진압할 길은 없었다. 서라벌에 버금가는 큰 지역인 북원경까지 반란군에게 접수된 이상, 다른 지역이라고 안전할 리가 만무하였다. 서라벌과 북원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원경에는 아직 불씨가 튀지 않았으나, 그곳은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서원경의 대윤은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사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것은 살인 사건이었는데, 시신들이 하나같이 괴상한 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미라처럼 뼈와 가죽만 남은 채 바짝 말라붙어 있었고, 가슴에 날카로운 무언가로 찌른 자국이 나 있었다. 시신은 주로 크고 작은 여러 산 주변에서 발견되었고 대윤의 관아 뒷산에서까지 발견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런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니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만큼 두려움에 떨었다. 거기다 다른 지역의 반란 소식까지 수시로 날아들어 대윤은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정에서 촉구한 조세를 강제로 걷은 뒤라 민심이 좋지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서원경마저 반란의 파도가 덮칠 위기였다.
대윤은 촌주들을 전부 불러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딱히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윤에게서 해결책을 바라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살인귀가 남긴 유일한 단서는 시신 주변에 뭔가를 질질 끌고 지나간 듯 땅 위에 길게 남은 자국뿐이었다. 그 외에는 흔적이 전혀 없어 범인의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의미 없는 회의가 흐지부지 끝나갈 무렵, 군관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시신이 또 발견되었습니다!”
대윤과 촌주들은 일제히 탄식하며 절망하였다.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어디인가?”
“나무하러 가던 백성들이 와우산 기슭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신속하게 정리하게.”
대윤은 이미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촌주들을 돌려보내고 관아에 남은 대윤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똑같은 상태의 시신과 똑같은 범행 수법, 그리고 똑같은 흔적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 외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나 맹수에게 당했다고 볼 수가 없는 시신들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으나 점차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정에 보고하기도 망설여졌다. 책임과 추궁이 두렵기도 하였으나 전국적인 반란으로 인하여 한창 혼란스러운 와중에 알려봐야 소용이 없을 듯하였다. 차라리 책임을 피하여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고민하던 대윤은 관아에 불이 밝혀질 즈음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제 자포자기하여 사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민심이 격앙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몸을 피할 생각이었다.
“대윤 어른, 소윤입니다.”
정무 대행을 지시하기 위해 소윤을 부르려던 차에 그가 때맞추어 찾아왔다.
“어, 들어오게.”
대윤은 소윤을 들여보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등불을 들고 집무실로 들어온 소윤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소윤을 따라 들어왔다. 은은한 등불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는 상당한 거구였다. 뜻밖의 방문객에 놀란 대윤은 그 인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키가 어찌나 큰지 그의 몸통과 손에 들린 갓만 보이고 얼굴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다.
“불을 밝히겠습니다.”
소윤은 들고 온 등불의 불을 옮겨 탁상 위 등잔에 붙였다. 방 안에 불빛이 늘어나니 비로소 소윤 곁에 서 있는 인물의 얼굴이 보였다. 붉은색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에 수염이 없는 잘생긴 얼굴의 젊은이였다. 젊은이는 대윤에게 고개를 숙여 공손히 인사하였다.
“대윤 어른, 이 자가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이미 사직하기로 결심한 대윤에게 딱히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무슨 말인가? 보아하니 이 지역 사람도 아닌 듯한데, 그 사건에 관하여 무엇을 안단 말인가?”
“이자가 범인을 찾아보겠다고 합니다. 일단 한 번 들어보시는 것이……”
“뭐라? 무슨 수로?”
젊은이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아지태라고 합니다. 정처 없이 떠돌다가 서원경에서 기이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대윤 어른을 찾아뵈었습니다. 한동안 사냥을 하며 살았던지라 그 경험을 되살려 범인을 쫓아보려 합니다. 비록 이곳에 연고는 없으나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냥이라고? 범인이 사람인지 짐승인지조차도 모르는데 사냥감을 쫓듯 쫓겠단 말인가? 관군은 물론 촌주들의 가병까지 총동원하고도 범인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네. 한데 겨우 짐승 사냥하듯 범인을 뒤쫓겠다고?”
내심 기대하였던 대윤은 실망감에 언성이 높아졌다. 사냥꾼이라기에는 아지태의 옷차림이며 용모가 너무 깔끔하여 의심스럽기도 하였다.
“자네 참 할 짓도 없군.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렇지, 이런 자를 함부로 들여서 터무니없는 소리로 내 시간을 빼앗다니……. 이 자를 당장 내보내고 자네도 퇴청하게. 어서들 나가!”
불똥은 아지태를 데려온 소윤에게까지 튀었다.
“허나 대윤 어른,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않겠습니까? 벌써 열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나같이 농민이나 나무하러 산에 가던 백성들이라 인심이 흉흉합니다. 하루빨리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더 큰 사달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자를 대윤 어른께 데려온 것입니다. 이자가 이토록 자신만만하니 한 번 맡겨보시지요. 혹 정말 범인을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잘된 일이 아닙니까?”
불안하고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던 소윤의 설득에 대윤은 머리가 아파졌다. 다 포기하려던 차에 건넨 도움의 손길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으나, 오랫동안 함께 일한 부하의 간곡한 요청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속는 셈 치고 맡겨보도록 하지. 대신 자네가 청한 일인 만큼 자네가 책임지고 매듭짓도록 하게. 알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윤 어른.”
“좋아. 그대는 최선을 다하여 범인을 추적해 보게.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야 하네. 이 일만 해결된다면 내 자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지.”
아지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머물 곳과 식사만 챙겨주시면 됩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여운 사람들의 죽음을 두고 볼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인정이 넘치는 말과는 달리 아지태의 미소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날이 밝으면 소인에게 시신들부터 보여주십시오. 그런 뒤에 시신이 발견된 장소들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하지. 오늘 밤은 이 관아에서 머물도록 하게. 자네가 방으로 안내해 주게.”
“예, 대윤 어른. 따라오게.”
“고맙습니다, 대윤 어른.”
아지태는 대윤에게 인사를 하고 소윤을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아지태가 돌아서는 순간, 대윤은 그의 눈이 붉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으나 피곤하여 잘못 본 것이라 여겼다.
아직 유족에게 인계되지 않은 시신들을 살펴본 아지태는 인근 마을 촌주의 안내를 받아 제일 처음 시신이 발견되었던 와우산으로 향하였다. 이른 아침에 오른 산은 혼란스러운 인간 세상과는 달리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허리에 묵직한 철퇴까지 달고 산길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아지태를 촌주와 그의 가병들이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따라잡았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촌주가 어느새 가장 뒤처지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숨을 고르는 일행과 달리 아지태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길 안내를 맡은 촌주는 어느 정도 호흡이 안정되자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저쪽일세.”
촌주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다. 주변의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큰 그 나무는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였다. 나무 밑동에는 넓적한 바위를 그대로 가져다 만든 작은 제단이 놓여있었다.
“당산나무입니까?”
“뭐, 그런 셈이지. 이 산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라 마을 사람들이 떠받들고 있다네. 한데 이 나무 아래에서 사람이 죽다니……. 그 바람에 사람들이 더 이상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네.”
촌주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지태는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곳에서는 거의 사라졌네만 시신을 발견한 곳마다 이상한 자국이 남아 있었네. 꼭 기다란 새끼줄 두 가닥을 질질 끌고 간 것처럼 보였지.”
“모든 현장이 다 그와 같은지요?”
“그렇네.”
“그렇다면 가장 최근에 시신을 찾은 곳으로 곧장 가시지요.”
힘겹게 올라온 산을 도로 내려가려니 촌주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일행은 산기슭으로 내려왔다. 나무가 울창한 정상과는 달리 나무꾼들이 베어가 밑동만 남은 나무들뿐이었다. 시신이 발견된 자리는 줄을 쳐서 막아 놓은 덕에 촌주가 말한 자국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범인이 점차 대담해지고 있군요. 거기다 살인하는 솜씨까지 늘고 있습니다. 이곳은 나무가 없어 눈에 띄기 쉬운 곳인데도 처음과 같은 수법으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한데도 목격자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과연 그렇구먼. 이곳은 민가와도 지척이니 뭔가 일이 있었다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보았겠지.”
“그렇다면 범행은 밤에 매우 빠르게 이루어진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자국은 시신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나 있습니다. 금방 끊어지고요.”
“정말 그렇군.”
“어디서 나타나서 어디로 사라지는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군요. 범인이 다음에 출몰할 곳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허면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대로 다음 희생자가 나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지 않은가?”
아지태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그들이 내려온 와우산을 올려다보았다.
“위치는 다 다르지만 그나마 시신이 여러 번 발견된 곳이 바로 이 산입니다. 일단 대윤께 부탁드려 최대한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산을 수색하면 어떻겠습니까?”
“허나 이미 이 산은 시신이 나올 때마다 수색해 보았네. 별 이상한 점은 없었어.”
“그야 범인이 인간이라는 전제로 수색하였으니까요.”
“뭐라? 그게 무슨 말인가?”
아지태는 대답하지 않고 갓을 벗더니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자국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흔적을 살폈다. 한참을 살펴보던 그는 자국이 끊긴 자리에서 멈추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무엇인가?”
아지태는 자국이 끊긴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 자세히 들여다보시지요. 구멍이 나 있습니다.”
촌주가 몸을 숙이고 아지태의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니 정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벌레가 판 듯 콩알보다도 작은 구멍이었다.
“그동안 현장을 조사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로군. 허나 단순히 벌레 구멍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른 곳들도 한 번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 중 현장이 훼손되지 않은 곳이 또 어디인지요?”
“따라오게.”
새로운 단서가 나오자 촌주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온종일 서원경 일대를 돌아다니며 자국이 보존된 다른 현장들을 모두 둘러본 결과, 하나같이 자국이 끊긴 자리에 똑같은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시력이 뛰어난 아지태가 최초로 발견한 흔적이었다. 길고 가는 나뭇가지를 구멍 안으로 밀어 넣어 보니 사람 팔 만큼 긴 나뭇가지가 거의 다 들어갈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꼭 땅벌레나 지렁이가 깊숙이 파고 들어간 것 같았다.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었으나 촌주는 흥분하여 피곤한 것도 잊고 서둘러 소윤에게 달려갔다.
소식을 접한 대윤은 아지태를 불러들였다.
“지금까지 벼슬을 하면서 이토록 괴이한 사건은 처음일세. 파면 팔수록 이해할 수가 없어. 범인이 벌레라도 된다는 말인가?”
당연히 대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도깨비가 벌레로 변하여 벌인 일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허, 이 사람아. 도깨비라니? 조정에 그리 보고하란 말인가?”
아지태의 농담 섞인 말에 대윤이 기가 차서 윽박질렀다.
“사람은 물론 짐승도 벌일 수 없는 짓이라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은 대윤 어른께서도 인정하시지 않는지요?”
대윤은 반박하지 못하였다.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나 책임을 회피할 궁리를 하고 있던 그였다.
“그래도 그간 우리가 찾지 못한 새로운 단서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윤은 어떻게든 대윤을 달래보려 하였다.
“진전? 여전히 범인을 잡을 길이 보이지 않는데 진전이라니? 그 진전이라는 것이 고작 땅에 파인 작은 구멍과 벌레로 변하는 도깨비라는 헛소리뿐이잖나! 거기다가 군사까지 동원해달라고? 자네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대윤이 화를 내는데도 아지태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대윤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대윤의 입에서 고함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아지태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대윤 어른. 도깨비라는 말이 괜히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머리와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꽤 많습니다. 기왕에 소인에게 이 사건을 맡기셨으니 끝까지 믿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이곳에서 얻어먹은 밥값은 할 터이니 믿어주십시오. 대윤 어른께 누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대윤은 심호흡하며 분을 삭였다. 이제는 아지태의 얼굴을 쳐다만 보아도 짜증이 치밀었다. 어째서인지 갈수록 기분이 나쁘고 불쾌하였다.
“소윤의 낯을 보아서라도 자네 말을 따르도록 하지. 내일 날이 밝거든 관군들을 와우산으로 보내게.”
“고맙습니다, 대윤 어른.”
“이제부터 이 일은 소윤 자네가 직접 지휘하게. 나는 내일 웅주 도독을 만나러 가야 하니까.”
“웅주 도독은 어찌……”
“그야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지. 비록 면목은 서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아야 할 것 아닌가?”
“예, 대윤 어른. 돌아오시거든 꼭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나 않았으면 좋겠네그려.”
“염려 마십시오.”
대윤은 어차피 사건을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뒤였다.
<용어 해석>
대윤 : 5소경에 파견된 지방관. 사신 또는 사대등이라고도 함.
와우산 : 지금의 우암산(충청북도 청주시).
소윤 : 5소경에 파견되어 대윤을 보좌하는 관리. 사대사라고도 함.
가병 : 사병. 개인이 사사로이 길러서 부리는 병사.
웅주 : 신라 9주 중 하나. 지금의 충청도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