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난세

by 어둠의 극락

재정이 궁핍해지자 조정은 각지로 관리를 파견하여 조세를 다시 독촉하였다. 그 결과 상주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고, 그를 계기로 전국에 반란의 불씨가 번졌다. 반란군의 기세에 관군조차 겁을 먹고 진압하지 못하여 장수 영기가 처형되고 상주의 촌주 우련이 전사하였다. 북원경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도 연이어 반란이 일어나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조정은 끊임없이 올라오는 보고로 아침부터 혼란스러웠다. 평의전에 모인 신료들은 그 일을 숨 가쁘게 논의하고 있었다.

“대왕 폐하 납시오!”

왕이 도착하자 신료들은 일제히 인사를 올렸다. 왕은 얼핏 보아도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폐하, 문후드리옵니다. 간밤에는 편안히 주무시었는지요?”

“그대라면 작금의 시기에 편히 잘 수 있겠소?”

시중이 눈치를 살피며 인사를 건네자 왕은 퉁명스럽게 답하였다. 무안해진 시중은 입맛을 다셨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저, 이미 각지에서 보고를 올린 내용이옵니다만, 북원경에서 도적 양길이 난을 일으킨 데에 이어 무주의 압해군에서도 능창이라는 자가 이끄는 해적들이 나날이 세력을 불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게다가 이미 상주 일대를 장악한 아자개 또한 그 세력이 만만치 않다고 하옵니다. 이에 대하여 대책을 세우셔야 하옵니다.”

그러자 왕은 시중을 노려보았다.

“대책? 짐더러 어쩌라는 말이오? 반란이 일어났으니 짐이 직접 갑주를 갖추고 난적들을 토벌하기라도 하라는 말이오?”

“폐하……”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오?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지는 경들이 더 잘 알 거 아니오? 짐이 팔자에도 없던 이 자리에 오른 지 겨우 두 해밖에 되지 않았소. 선왕들께서 강건하시었다면 짐이 옥좌에 앉을 이유가 없었단 말이오! 이제는 헌강대왕의 치세부터 정사를 돌봐오셨던 혜성대왕께서도 아니 계시오. 한데 짐에게 무슨 수로 사방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고 국고를 다시 채우라 하는 게요? 민심을 달래고자 조세를 감면한 결과가 정녕 이것이란 말이오?”

왕이 분통을 터뜨리자 신료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세건 반란이건 경들이 알아서 하시오. 제발 이런 일로 또다시 짐을 괴롭히지 말란 말이오!”

왕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신료들은 저마다 탄식하며 웅성거렸다.

“보십시오, 시중 어른. 제가 무어라 하였습니까? 폐하께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역시 우리끼리 처리하고 보고만 하는 편이 나았습니다.”

신료들의 불평을 한 몸에 받은 시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회는 이것으로 마칩시다.”

신료들은 한숨을 쉬며 각자의 소속 관청으로 향하였다.

평의전을 나온 왕은 조카 요의 처소로 향하였다. 남편처럼 여기며 사랑했던 삼촌을 잃은 상실감과 고독에 빠져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어린 조카가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톨이가 된 조카의 처지가 꼭 자신과 비슷하여 더욱 마음이 쓰였다. 죽은 큰오빠의 유일한 혈육이기도 하였다. 처소로 찾아온 왕에게 요는 궁녀의 도움을 받아 어설프게 절을 올렸다. 이른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왕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잘하는구나. 기특하기도 하지. 자, 고모에게 와보렴.”

왕이 자리에 앉으며 두 팔을 벌리자 요는 뒤뚱뒤뚱 걸어 그의 품으로 걸어가 안겼다. 고모를 엄마처럼 여기는 듯 아주 얌전하였다. 왕은 조카를 안아 올려 그를 무릎 위에 앉혔다. 요는 왕의 코와 뺨을 어루만지더니 그의 귀걸이를 보고는 작은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 하였다. 왕은 조카의 장난을 그저 웃으며 받아주었다.

“여봐라.”

“예, 폐하.”

“식척전에 일러 짐의 중반을 이리로 대령하라.”

왕은 내관에게 지시하고는 다시 조카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조카를 보며 아무 근심 걱정 없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잠시 그려보았다.


“폐하, 소장을 찾으셨사옵니까?”

“그래, 어서 오너라. 밤은 깊어 가는데 잠이 오지를 않아서 함께 술이나 한잔하자고 불렀느니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한밤중에 부름을 받고 온 견훤을 왕은 반갑게 맞이하였다. 일개 병사였던 견훤은 어느덧 군관이 되어 시위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왕은 잔을 견훤에게 건네고 향긋한 머루주를 가득 채워주었다.

“근자에 나라 곳곳에서 난이 일어나고 있다. 아느냐?”

“소식을 이미 들었사옵니다. 폐하의 근심이 얼마나 크실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사옵니다.”

왕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 오늘따라 돌아가신 숙부가 너무도 그립구나. 숙부라면 이 일을 능히 해결하셨을 터인데……. 생전에 네 이야기를 종종 하시었다. 무력과 용맹이 남다르다지?”

“그저 체구가 남들보다 조금 큰 덕이옵니다.”

억지로 웃던 왕은 견훤의 겸손에 비로소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겸손도 하여라. 상주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맞느냐?”

“예, 폐하. 가은현에서 태어났사옵니다.”

“그렇구나. 그러면 식솔들도 모두 그곳에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구나. 그곳을 장악한 도적의 수괴 아자개에게 화를 당하였거나, 아니면 그에 가담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냐?”

왕의 표정이 왠지 싸늘해지자, 견훤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었다. 사실 고향의 소식은 간간이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왕은 의혹을 품으면서도 아자개가 바로 견훤의 아버지라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듯하였다.

“근래에 들어 소식이 끊겨서 잘 모르겠사옵니다.”

견훤이 둘러대자 왕은 혀를 찼다.

“쯧쯧, 딱하구나. 타향살이도 고달플 터인데 식솔들의 소식마저 모르다니…….”

과묵한 견훤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왕은 이내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라에 공을 세워보고 싶지 않으냐?”

“예? 어인 말씀이온지…….”

“너에게 출세할 길을 열어주겠다는 말이니라. 숙부께서 인정하실 정도의 무인이라면 반란을 능히 진압할 수 있을 터. 병부에 일러 너를 승차시키도록 하겠다. 너는 그 멍청한 영기와는 다르리라고 믿는다. 자, 한 잔 더 받아라.”

왕은 다시 견훤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견훤은 기쁜 마음을 감추며 술을 들이켰다. 그도 마침 서라벌이 답답하여 벗어나고 싶던 참이었다. 멀리 떠나 새로운 터전에서 골품제를 극복하고 대업을 이루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의 숙원이었다.

“오늘 밤은 유독 춥고 외롭구나.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왕은 견훤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앉아 그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얼굴은 붉었고, 그윽한 눈빛으로 견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 황송하옵니다, 폐하.”

견훤은 마구 뛰는 가슴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몰랐다.

한편 서라벌의 사정은 흑재에게도 전해졌다.

“뜻하지 않게 김만이 우리의 일을 도와주었사옵니다.”

흑재에게 현황을 보고하는 아지태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그 계집 임금이 말이냐? 어떻게?”

“견훤과 함께 밤을 보내고는 다음날 그의 직을 높여주고 군사와 함께 무진주로 파견하였다 하옵니다. 이제 지위와 무력까지 손에 넣었으니 바람만 조금 불어주면 빠르게 힘을 키울 수 있사옵니다.”

“잘 되었구나. 아비인 아자개가 힘을 보태준다면 더욱 빠르게 클 수 있겠으나, 그것은 어렵겠지? 둘이 사이가 나쁘다면서?”

“그러하옵니다.”

“쯧쯧, 그 마음을 알 듯하군.”
“예?”

“아니다. 그렇다면 견훤은 되었고, 다른 녀석들은 어쩌고 있느냐?”
“북원경에서 양길도 세력을 점차 넓혀나가고 있사옵니다. 그 외에도 죽주에서 기훤, 압해군에서 능창 등이 궐기하였사옵니다만, 어르신의 마음에 들 만한 자들은 아니옵니다. 한낱 도적에 불과하옵니다.”

“궁예는?”

“궁예는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하였사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보잘것없는 중이었으니 오래 걸릴 듯하옵니다. 다만 절에서 벗어나도록 바람을 조금 불어주기는 하였사옵니다.”

“어떻게?”

“송아님께 부탁드려 아이 하나를 까마귀로 변하게 한 뒤, 임금을 뜻하는 글자가 새겨진 막대기를 궁예의 밥그릇에 떨어뜨리게 하였사옵니다. 궁예는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 철석같이 믿고 나설 것이옵니다.”

“오, 그거 재미있구나. 알겠다. 허면 너는 어떠하냐?”

“예? 소인이 무엇을……”
“너도 그 녀석들처럼 네 땅의 임자가 되어보고 싶지 않으냐? 상당, 아니 서원경 말이다.”

아지태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던 엄청난 일이었다.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는 지방의 세력가들처럼 그의 고향을 차지하여 지배하라는 말이었다.

“소인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사옵니다.”

“한낱 도적이라는 것들도 땅덩이를 틀어쥐고 떵떵거리고 있는데 네가 못할 까닭이 무엇이더냐? 네가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어차피 언젠가 왕건을 없애려면 네 일을 거들어 줄 인간들을 많이 모아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면 먼저 터가 있어야지.”

“그것은 그러하옵니다만…….”

“너는 머리도 좋고 이제는 힘과 몸집도 커졌다. 내가 도와줄 터이니 서원경으로 가거라. 가서 너에게 맞서는 것들을 다 꺾어 누르고 그 땅을 차지하여라. 그리고 머리를 숙이는 것들을 품어서 잘 부려보아라. 그 땅에서 임금 노릇을 한 번 해보라는 말이다.”

아지태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무리 고향이라도 연고도 없고 멸시만 당하던 곳이었다. 돌아가고 싶지도, 그곳 사람들과 상종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얼 망설이느냐?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 땅에 사는 도깨비건 인간이건 모조리 찍어 누르면 네 땅이 되겠지. 그렇지 않으냐?”

“그것은…… 그렇다면 어르신의 말씀을 따르겠사옵니다.”

자신이 없었으나 아지태는 차마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더 할 말이 없거든 그만 물러가거라.”

“예, 어르신.”

아지태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아지태는 걸음을 멈추고 걸어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귀를 기울였다. 그는 요력이 강해지면서 시력과 청각도 발달하여 그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머리 위 들보에 거꾸로 매달려 함께 엿듣고 있는 백화의 존재를 느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백화는 흑재가 회의에는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아 그렇게 엿듣고 있었다.

“그 일은 어찌 되었느냐?”

“요즈음 짐승들이 사냥보다는 주검을 파먹고 살아가는 것들이 많아 찾기는 더 쉬워졌습니다. 곰도 있고 이리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인간들이 곳곳에서 서로 죽이고 죽고 있으니 그 몸뚱이들이 널려있을 터이니까. 그렇다면 곰으로 잡아 오너라. 마음 같아서는 범을 잡고 싶으나 아니 될 일이니.”

“예, 어르신. 허나, 이번에도 쓸모가 없으면 다음번에는 어찌하시렵니까? 다른 것으로 또 잡아오리까?”

“글쎄다. 도선만 없었으면 짐승이고 인간이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보았을 터인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처음에는 나름대로 좋은 길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앞이 캄캄하다. 이번에도 아니 되면 어이할꼬? 이 눈을 다시는 되찾지 못할 터인데.”

“너무 시름하지 마십시오. 어떻게든 일이 되게 만들겠습니다.”

“그래, 그러나……”

흑재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허공에 손짓을 하였다. 그리고 잠시 뒤 방문이 벌컥 열리며 아지태가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가 엿듣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었다. 아지태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흑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요, 용서하시옵소서! 무례를 범하였사옵니다.”

흑재는 아무 말 없이 아지태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지태가 자신의 말을 어기고 대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에 흑재는 깊은 실망과 배신감을 느꼈다.

“지난날 어르신께서 하셨던 말씀을 잊었소? 모르는 게 나은 일들이 있다는 그 말씀 말이오. 그런데 쥐처럼 숨어서 엿듣다니 이게 무슨 짓이오?”

송아가 그저 아지태를 싸늘하게 보고만 있는 흑재 대신 그를 책망하였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흑재는 계속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지태는 그것이 오히려 더욱 두려웠다. 지금까지 한 번도 흑재의 분노를 산 적도,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몹시 두려웠다. 그런데 어떻게 용기가 생겼는지 아지태는 고개를 천천히 들며 입을 열었다. 죽더라도 할 말은 꼭 하고 싶었다.

“하오나…… 대체 무슨 연유로 소인에게서 그 일을 숨기시는지 소인은 알아야겠사옵니다.”

“입 다무시오. 어디……”

흑재는 손을 들어 송아를 제지하였다.

“소인은 어르신께서 처음 명하셨던 일을 해낸 뒤로 어르신의 신임을 얻었노라 믿어 의심치 않았사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에 의문을 품은 적이 없사옵니다. 그런데도 어르신께서는 그 일만은 소인에게 어떠한 소견도 구하지 않으시고 그저 숨기기만 하셨사옵니다. 그것이 서운하고 안타까웠사옵니다. 그 때문에 오늘과 같은 결례를 범하게 되었나이다.”

아지태는 그동안 쌓여 있던 것을 터뜨렸다. 그런 아지태의 모습을 처음 보기는 흑재도 마찬가지였다. 한결같이 공손하던 그가 서운함을 드러내니 슬며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르신. 소인은 이미 오래전에 어르신께 충성하기로 맹세하였사옵니다. 어르신께서는 소인의 주인이시옵니다. 소인은 주인을 위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사옵니다. 걸인이나 다름없던 소인에게 따뜻한 음식을 내어주셨을 때 소인의 모든 것을, 이 목숨과 혼백까지 전부 어르신께 바치기로 마음먹었사옵니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 외에도 분부만 내리시면 무엇이든 하겠나이다. 그러니 어르신께서 숨기시는 그 일에 관하여 기회를 한 번만 주시옵소서. 반드시 해내겠사옵니다.”

아지태의 간곡한 설득에 흑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너무도 치욕스럽고 괴로운 탓에 어떻게든 숨기고 싶은 기억이었다. 아무리 돕겠다고 하여도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힘겨웠다.

한참의 시간이 흐를 동안 정적은 공기마저 누르고 방 안은 물론 집 전체를 가득 채웠다. 침묵이 오랫동안 이어지자 어느 틈에 백화도 슬그머니 흑재의 방으로 들어와 있었다. 모두 흑재의 눈치만 살피느라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이윽고 흑재가 무거운 정적을 걷어내었다.

“그래. 그리도 서운하였단 말이지……. 알겠다. 말해주마. 다만, 그에 앞서서 너의 다짐을 먼저 받아두어야겠다. 해내지 못한다면 그때는 아무 군소리 없이 값을 치르겠노라고. 그리하겠느냐?”

길고 긴 적막에 질식할 것만 같던 아지태는 숨을 고르고 답을 뱉어내었다.

“물론이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그래. 틀림없이 네 입으로 그리 말하였다. 그렇다면 말해주마. 나는 왼쪽 눈을 잃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도록 하였다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지난날 도선에게 빼앗겼지. 그놈이 내가 머물던 메에 절을 세우려고 이 눈을 찌르고 나를 쫓아내었느니라.”

“백계산 옥룡사 말씀이옵니까?”

“그놈이 그렇게 이름을 지었더구나. 그 바람에 나는 애꾸가 되어 그곳에서 쫓겨나 이리로 오게 되었지. 다시 도선과 부딪히자니 겁이 나서 하는 수 없이 이 자리에 머물 곳을 만들고, 송아의 힘으로 인간들로부터 숨겨서 지금까지 살고 있느니라. 그래서 너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뭐, 그래도 그 뒤로 내 기운을 감추는 길을 익히기는 하였지만.”

마침내 아픈 기억을 스스로 밝힌 흑재는 아지태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동정과 실망으로 차 있을 그의 눈을 마주치기가 싫었다. 하지만 아지태의 반응은 그의 우려와는 달랐다. 아지태의 두 눈은 동정도 실망도 아닌 분노만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것은 도선을 향한 분노였다. 마치 불길이 일 듯 그의 눈이 서서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황송하옵니다, 어르신. 진솔하게 말씀해 주시어 참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소인이 기필코 어르신의 그 원한을 풀어드리겠사옵니다.”

흑재는 미소를 지으며 아지태에게 일어서라고 손짓하였다. 그러고는 송아에게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건네받아 아지태에게 주었다.

“받아라.”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아지태가 받아 든 것은 작은 쇳조각 같은 물건이었다. 매우 단단하고 윤기가 흐르는 것이 꼭 비늘이나 갑옷의 미늘 같았다.

“내 힘을 뭉쳐놓은 것이다. 서원경으로 가거든 그것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거라. 너의 힘을 더욱 키워주고 지켜주리니.”

“예, 어르신. 늘 간직하겠나이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홀로 용쓰지 말고 언제든지 도움을 얻어라. 눈치 보지 말라는 말이다. 알겠느냐?”

“예, 어르신.”

조각을 품속에 넣으려던 아지태는 백화가 갑작스레 튀어나오며 일으킨 바람에 휘청거렸다. 흑재에게 새처럼 날아든 백화는 대뜸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더니 팔을 그의 어깨에 두르며 살포시 기대었다.

“나도 줘.”

백화는 흑재의 뺨에 자신의 것을 비비며 손을 내밀었다. 아지태는 그 어이없는 광경에 입을 다무는 법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런 도발적인 행동에도 흑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꼭 어린아이의 재롱을 귀여워하는 어른처럼 웃으며 어깨에 올려진 백화의 손을 감싸 쥐었다.

“글쎄, 저 아이는 한동안 이곳을 떠나있어야 하고, 그대는 여기 머무르고 있으니 굳이 없어도 될 듯한데.”

“이런 칙칙한 굴속 같은 집구석에 처박혀 있으라고? 싫어. 난 늘 여기저기 마음껏 돌아다니며 살았단 말이야.”

“여기서 나가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어차피 그대의 힘은 저 아이보다 세고 몸놀림도 빠르지 않은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으니 어디서 어떤 일을 겪던 우리가 곧바로 알고 도와줄 터이니 얼마든지 돌아다녀도 좋아.”

백화는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부루퉁한 얼굴로 흑재를 쏘아보더니 그의 귀를 깨물었다. 하지만 흑재의 무릎 위에서 내려오지는 않았다. 흑재는 간지럽지도 않은 듯 그저 웃으며 다시 아지태를 돌아보았다.

“짐을 잘 챙겨서 떠나거라. 몸조심하고.”

“예, 어르신. 꼭 성공하여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사옵니다.”



<용어 해석>

상주 : 신라 9주 중 하나. 지금의 상주시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 사벌주라고도 함.

평의전 : 신라 궁궐에서 군신이 모여 정사를 논의하던 전각.

시중 : 신라~고려 때의 재상직. 최고 중앙 관부의 으뜸 벼슬.

무주 : 신라 9주 중 하나. 지금의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도 일대. 무진주라고도 함.

압해군 :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

혜성대왕 : 김위홍의 시호.

식척전 : 신라 때 궁중 요리사를 통솔하던 관청.

중반 : 점심 식사.

죽주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