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된 두 세계

by 어둠의 극락

근래에 들어 허월은 다시 젊어진 기분이었다. 바다에서 우연히 만난 새로운 인연 덕분에 마음이 들뜨고 즐거웠다. 그는 이제 암자를 떠나 도로 순식의 집에 머물면서 초아를 만나러 하루도 빠짐없이 바닷가를 찾았다. 덕분에 오랫동안 마음속을 가득 채워 괴롭히던 죄책감은 서서히 씻겨나갔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허월의 바랑은 끈이 끊어질 듯 묵직하고 무거웠다. 초아에게 구경시켜 줄 물건들과 음식이 잔뜩 담겨있었다. 어서 바닷가로 가서 초아를 만날 생각에 어깨가 아픈 줄도 모르고 걸음을 서둘렀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만나기로 약속한 덕에 전처럼 하염없이 기다릴 필요는 없어졌다. 초아가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허월이 주었던 옷을 물이 닿지 않는 암초 틈에 감춰놓고 만날 때마다 입고 나왔다.

해변으로 내려오니 허월은 지난번 사고의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나 괜히 속이 불편해졌다. 부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며 마음속으로 진언을 외웠다. 허월은 초아가 자신과 만난 뒤로 어미인 세리와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세리가 인간을 극도로 경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허월도 자식이 있어서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에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는 몸이 나은 뒤에 초아에게 세리와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렇게 정식으로 만나게 된 세리는 변함없이 허월을 경계하였다. 허월은 그런 세리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초아와 만나게 되었는지, 승려로서의 삶과 육지에 대해서도 들려주며 설득하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처음 며칠간 세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멀찍이서 허월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말없이 초아를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세리의 환심을 사보려 육지의 물건들도 가져와서 보여주었으나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허월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같이 바다로 찾아왔다. 그러자 세리는 더는 그를 외면하기 어려워졌다. 허월의 정성에 시나브로 그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허월이 육지의 물건과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로웠다. 그들을 통하여 접한 육지의 문물은 참으로 신비로웠다. 사실 그동안 초아를 키우느라 잊고 있었을 뿐이지 육지가 어떤 곳인지 누구보다 궁금해하던 그였다. 허월의 오랜 설득과 회유 끝에 세리는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열고 초아와 허월의 교류를 허락하였다. 단,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서였다.

잠시만 기다리면 될 줄 알았으나 초아는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내었다. 허월은 반가우면서도 서운한 마음에 초아에게 달려갔다.

“오늘은 왜 이리 늦었느냐? 한참 기다렸다.”

초아는 대답 대신 바다를 가리켰다. 세리뿐 아니라 다른 인어들까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세리를 제외하고 하나같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허월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다가 내가 진귀한 구경거리가 되었구나, 허허허.”

허월은 모래 위에 풀썩 주저앉아서 바랑을 풀었다. 초아는 오늘은 어떤 재미있는 물건을 보게 될지 몹시 기대되었다. 허월이 꺼낸 것은 붓과 먹이었다.

“자, 이것은 붓이라는 물건이다. 글씨를 쓸 때 쓰는 것이지. 그리고 이 까만 것은 먹이라고 한다. 이 먹을 갈아서 물과 섞은 다음, 그 물에 붓을 적셔서 종이에 글을 쓴단다. 종이는 저번에 보여주었으니 알고 있겠지?”

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자, 잡아보렴.”

허월은 초아의 손에 붓을 쥐여주었다.

“여기 모래 위에 무엇이든 한 번 써 보아라. 그림을 그려도 좋고.”

초아는 손에 붓을 쥔 채 모래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붓의 손잡이 끝을 아래로 향하게 하였다.

“허허, 모래 위에는 그렇게 써도 상관없겠으나, 본래 이렇게 쥐고 쓰는 것이다.”

허월은 초아가 붓을 바르게 쥐도록 고쳐주었다.

“이렇게 털이 아래쪽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너무 세게 누르지 말고 부드럽게 써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붓을 움직였다. 나뭇가지로 낙서를 할 때와는 달리 털이 부드러워 조금만 힘을 줘도 선이 삐뚤어졌다. 뜻대로 되지 않는지 몇 번을 지웠다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던 초아는 이윽고 상괭이 그림을 완성하였다.

“혹시 이것이 고래이냐?”

허월은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강 추측하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운 좋게 맞췄는지 초아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잘 그렸구나. 기왕이면 먹물로 종이에 써 보면 좋을 터인데, 여기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엇!”

무심코 고개를 돌린 허월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인어들이 소리소문없이 해변 위로 기어 올라와 바로 옆에 와 있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 친구들아. 그대들도 해보겠는가?”

허월은 바랑에서 붓을 여러 개 더 꺼내어 그들에게 내밀었다. 인어들은 붓을 받아 들고 본능적으로 냄새부터 맡더니 초아가 한 것처럼 모래 위에 이리저리 선을 그으며 써 보았다. 반면 먹 냄새는 싫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내려놓았다. 허월은 자신에게는 익숙한 물건을 신기해하는 인어들이 꼭 어린아이들 같아 귀여웠다.

“자, 그리고 이것이 책이라는 물건이다. 그 붓과 먹으로 글을 쓴 종이를 한데 묶어 놓은 것이지.”

허월은 다음으로 경전을 꺼내어 책장을 차르륵 넘기며 보여주었다. 얇디얇은 종이와 그 위에 적힌 글씨를 빛나는 눈으로 보던 초아와 인어들은 젖은 손으로 책을 만져보려다 그만두었다. 종이가 젖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월은 초아에게 경전을 건네었다.

“괜찮다. 마음껏 살펴보아라.”

그제야 인어들은 안심하고 조심스럽게 장을 넘기며 책을 구경하였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였으나 초아가 결국 책장 끄트머리를 찢고 말았다. 그래도 허월은 상냥하게 웃을 뿐이었다.

“괜찮대도. 그저 종이에 불과하다. 그 내용을 익히고 기억하여 늘 마음에 되새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아, 이참에 조금 들려주마.”

허월은 목청을 가다듬고 경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소리였으나 인어들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들을수록 점점 빠져들었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온해지는 듯하였다. 허월은 인어들의 반응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 안도가 되었다. 그들도 여느 요괴처럼 불경에 거부감을 느끼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였다.

“과연 그대들은 다르군. 눈에서도 욕심이나 불길한 기운이 전혀 보이지 않더니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모양일세. 역시 귀한 인연이 틀림없어.”

허월은 또 다른 좋은 인연을 맺어준 하늘에 감사하였다.

인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있던 허월은 붉어진 하늘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구먼. 내일 또 보세나.”

허월은 바랑을 싸서 챙기고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며 일어섰다. 인어들은 무척 아쉬워하였다. 초아는 아예 허월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허허, 내일 또 오마.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좋은 꿈 꾸려무나. 나무관세음보살.”

허월은 초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초아가 마지못해 놓아주자 허월은 해변을 벗어나 집으로 향하였다. 가다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어들도 그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초아는 아예 양팔을 다 휘저으며 인사하였다. 만남이 되풀이될수록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마음을 빼앗길 정도의 강한 끌림은 오히려 약해졌다.

“아버지, 요즈음 매일 같이 어딜 다녀오십니까?”

허월과 저녁상에 마주 앉은 순식이 물었다.

“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여 그 암자를 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뭐 어떻습니까? 설마 다시 돌아가시려고요?”

“그럴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너 무서워서 다시는 아니 돌아가련다.”

순식은 멋쩍어 도로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다시 찾지 않더라도 엄연히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고, 언젠가 다른 이가 와서 머물다 갈 수도 있으니 잘 돌보아야지.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기도 답답하고.”

“알겠습니다, 아버지.”

거짓말은 아니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허월은 비워둔 암자가 마음에 걸려서 종종 산에 올라가 살피고는 하였다. 문득 오늘 경전을 구경하던 초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경과 진언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으니 아예 그 내용을 가르쳐주는 것도 괜찮을 듯하였다. 기왕이면 짠 내 섞인 바람과 요란한 파도 소리로 어수선한 해변보다 고요한 산속 암자로 데려가는 편이 나아 보였다. 마침 육지와 인간에 대하여 가르쳐줄 적당한 장소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러자면 세리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였다. 초아를 만나는 것도 어렵게 승낙을 받았는데 또 어떻게 부탁해야 할지 막막하였다.

“아버지.”

“응?”

갑자기 순식이 허월을 불렀다.

“지금 무얼 하십니까?”

“뭐가 말이냐?”

허월이 순식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니 자신이 젓가락을 국그릇에 담가놓고 밥그릇 옆 허공을 숟가락으로 휘젓고 있었다.

“허허……”

“괜찮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었다. 어서 들어라.”


골짜기로 돌아온 인어들은 도란도란 모여 오늘 보고 들은 것들에 관하여 얘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감탄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오늘도 참 재미있었다, 그렇지?”

“응. 그 책이라는 것 참 재밌더라. 나도 하나 갖고 싶었어.”

“나도. 난 그 중얼거리던 소리도 싫지 않았어. 또 들어보고 싶어.”

“맞아. 왠지 모르게 귓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어.”

“근데 세리는 아직도 그 인간을 싫어하는 것 같지?”

“응. 이제는 좋게 봐줘도 될 텐데 말이야. 초아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래도 만나서 같이 놀게 해 준 게 어디야. 처음 만났을 때만큼 싫어하진 않는 것 같던데 언젠가는 좋아하게 되겠지.”

그 무렵 세리는 집에서 사냥 도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칼날턱의 뼈로 만든 집게로 이빨을 하나씩 집어 고래 뼈로 만든 막대 끝에 촘촘하게 두드려 박았다. 초아는 그 옆에서 세리의 작업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엄마, 그 막대기는 왜 하나 더 만드는 거야?”

“응, 너 주려고.”

“나 주려고? 참말이야?”

“그럼. 너도 이제 네 몸을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지. 엄마가 늘 말했듯이 집 밖은 무서운 곳이야. 커서 엄마랑 언니들 도움 없이 사냥도 할 줄 알아야지.”

세리의 말에 초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막연한 미래가 그려졌다. 어른이 되어 세리와 다른 인어들의 도움 없이 칼날턱을 사냥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초아는 종종 사냥을 먼발치에서 구경한 적이 있기에 겁이 났다. 어른이 되어서도 직접 칼날턱을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초아의 얼굴이 굳자 세리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안심시켰다.

“오늘부터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니까 겁먹을 것 없어. 차근차근 하나씩 배워가면 돼. 설마 엄마가 너 홀로 사냥하라고 등 떠밀겠니?”

“아니, 히히히.”

세리는 막대에 이빨이 단단히 박혔는지 점검한 뒤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초아에게 내밀었다.

“자, 다 됐다. 한번 들어볼래?”

“응!”

초아는 신이 나서 사냥 도구를 받았으나 손에 쥐자마자 떨어뜨렸다. 생각보다 무거웠던 탓이었다. 다시 들어보려 하였으나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무겁지? 엄마도 처음 할머니에게 받았을 때 그랬어. 언니들도 그랬고. 이 무거운 걸 어떻게 써야 할지 답답했는데, 오래 걸리기는 해도 기어이 쓰게 되더라. 그러니까 우리 초아도 잘할 수 있어.”

“진짜?”

“그럼. 엄마는 거짓말 안 해.”

세리는 사냥 도구를 한쪽으로 치우고 초아를 꼭 안아주었다.

“그런데 초아야. 넌 그 인간이 좋니?”

“응, 좋아. 그 인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땅에서 가져와서 보여준 것들도 재미있어. 맛있는 것도 많이 주잖아.”

초아는 뒤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엄마는 아직도 싫어?”

세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경계심은 많이 누그러졌으나 불신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게다가 육지에서 버림받은 초아가 또다시 육지에서 상처받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초아가 허월과 가깝게 지낼수록 자신으로부터 멀어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사실 그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것은 허월의 존재를 알기 전부터 이미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땅으로 나아가면 바다로부터 멀어지는 법이었다. 그러나 초아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허월과 만날 때마다 기쁨과 열정으로 반짝이는 초아의 맑은 눈을 보면 그런 자신의 마음을 도무지 드러낼 수가 없었다.

다시 바다를 찾은 허월은 이전과는 달리 걸음이 무거웠다. 오늘 초아를 암자로 데려갈 수 있도록 세리에게 청해볼 생각이었다. 확신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리의 눈빛이 변함없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 그를 설득하려면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과 정성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였다. 혹 거절하는 것을 넘어 격하게 반응하지는 않을지도 걱정이었다.

해변에 도착하니 오늘은 초아가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멀찍이서 다가오는 허월을 보자 초아는 양팔을 휘저으며 그를 환영하였다. 허월도 손을 흔들어 화답해 주었다. 세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초아는 마치 할아버지를 반기는 손녀처럼 허월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잘 있었느냐? 오늘은 너 혼자 왔구나.”

초아는 무언가로 허공을 찌르는 시늉을 하였다.

“사냥을 나갔다고? 그렇구나. 자, 앉자.”

허월과 둘둘 말아서 가져온 돗자리를 펼쳤다. 그 역시 초아에게는 처음 보는 새로운 물건이었다. 허월은 돗자리를 모래 위에 깐 뒤 신을 벗고 그 위에 앉았다.

“이 위로 와서 앉아라. 이것은 돗자리라는 물건이다. 이렇게 집 밖에서 옷을 더럽히지 않고 앉고 싶을 때 바닥에 까는 것이지.”

초아는 허월이 앉은 자세를 그대로 따라 하며 돗자리 위에 앉았다. 그러다가 살에 닿는 골풀의 촉감이 어색하였는지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무릎을 꿇기도 하며 가만히 있지 못하였다. 하지만 적응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아가 차분해지자 허월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 얘야. 다음번에는 나를 따라 산으로 가보지 않으련? 저 너머에 높이 솟아있는 저곳 말이다.”

허월이 가리키는 오대산을 보며 초아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면 우선 네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함박웃음을 짓던 초아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깜빡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아니 된다고 하면 갈 수가 없다. 그러니 내일은 어머니와 꼭 함께 오렴. 내가 잘 말해 보마.”

초아는 잠시 아무런 반응 없이 허월의 얼굴만 빤히 보고 있더니 바다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근처에 있는 바위였다. 그 뒤에서 세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허월이 오기 전부터 이미 그곳에 숨어있었다.

“마침 거기 있었구먼. 빈도가 한 말도 다 들었겠군.”

허월은 내심 기뻤다. 우려와는 달리 세리는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이제 전과 같은 적대심은 보이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세리는 바위 뒤에서 돌아 나와 천천히 두 팔로 기어 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보기는 처음이군. 반갑기 그지없네, 허허허.”

반가워하는 허월과는 달리 세리는 어색하였는지 허월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피하기를 반복하였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허월의 얼굴은 그가 살아온 세월을 보여주듯 거칠고 주름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인간 남자의 늙은 얼굴에 세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갔다. 그러다 살짝 자라서 까슬까슬한 수염의 감촉에 놀라 화들짝 손을 떼었다. 허월은 그가 편히 만져보도록 얼굴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세리는 허월의 주름을 따라 손가락 끝으로 그려보기도 하고 처진 얼굴 살을 당겨보기도 하였다. 허월이 간지러워서 웃음을 터뜨리자 그만두었다.

“그래. 인간이란 이런 존재일세. 태어나서 늙고 때가 되면 숨을 거두지. 그리고 수레바퀴가 제자리로 돌아오듯 다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다네. 그대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겠지. 인간은 인생이 짧아서 매 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한다네. 다시 말하자면, 보람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말이지.”

다소 어려운 말이었으나 세리는 허월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듯하였다.

“전에도 한 얘기지만 그대의 아이를 처음 마주쳤을 때, 빈도는 그저 신기하고 두려웠다네. 그대들에 대하여 그저 이야기로나 들어보았지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거든. 첫 만남이 너무도 짧아서 아쉬웠던 탓에 다음날 저 아이가 다시 빈도를 찾아와 주었을 때 무척 기뻤다네. 그래서 작은 선물을 주었지.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아이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싶어지더군.”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얘기라 세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괜히 돗자리의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렸다.

“그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네. 자식이 낯선 이와 함부로 어울리는 것이 두렵겠지. 게다가 우리 인간들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물건들은 그대들에게도 위협적일 터이고. 어쩌면 이미 인간에게 해코지를 당한 인어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대가 빈도를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네. 허나 이 아이는 특별한 아이일세. 땅 위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는 그대들과는 달리 땅과 바다를 마음대로 오갈 수가 있지 않은가. 저 바다가 아무리 넓다 하여도 이 아이가 물속에서만 살아가기에는 아깝지 않나? 이 땅 위에 바다처럼 넓은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데 말일세. 빈도는 이 아이에게 그 세상을 보여주고 싶네. 그리고 그 세상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법도 가르쳐주고 싶으이.”

허월은 마치 세리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였다. 한마디도 틀린 부분이 없었다. 다 알면서도 지금까지 그렇게 정성을 쏟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세리는 그가 다르게 보였다. 부처와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모르는 세리는 살생을 하지 않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지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그러나 허월이 그물과 작살을 든 인간들과 다르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처음으로 가까이 마주친 그의 깊은 두 눈에는 거짓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 초아는 둘 사이에 껴서 간절히 세리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세리는 허월을 바라보는 초아의 열망으로 가득 찬 두 눈을 더는 외면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