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하지 못한 그림

by 어둠의 극락

“사,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제발!”

“이야앗!”

“커헉!”

말에서 떨어져 목숨을 구걸하던 사내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산적은 묵직한 철퇴에 묻은 사내의 피를 털어내었다.

“자, 어서 챙겨라!”

“예!”

두목의 지시에 따라 산적들은 죽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과 곡식, 장신구와 입고 있던 옷까지 모조리 쓸어 담았다. 그러고는 말까지 끌고 서둘러 현장을 벗어났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시체들만 나뒹굴었다.

산속 깊숙이 자리한 소굴로 향하던 산적들은 도중에 배가 고파져서 불을 피울 땔감을 구하고 토끼와 꿩을 사냥하였다. 그러는 사이 두목은 약탈한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참 좋은 옷감이로구나. 값이 꽤 나가겠어.”

산적은 부드러운 비단을 쓰다듬고 얼굴에 비비기도 하였다.

“말에 타고 있던 놈이 벼슬아치였나 봅니다. 이만하면 소금하고도 바꿀 수 있겠습니다, 헤헤.”

“그래, 그래. 이번에도 수고들 많았다. 돌아가서 골고루 나눠주마.”

두목은 옷감을 펼쳐 몸에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군님!”

사냥하러 갔던 산적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돌보 녀석이 발목을 삐어서요. 옮기려면 손이 더 필요합니다.”

“에잉, 쯧쯧. 어서 가 봐!”

“예, 장군님.”

두목은 혀를 끌끌 차며 산적들을 전부 딸려 보내었다. 혼자 남은 두목은 마저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아아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고통에 찬 비명이 산에 울려 퍼졌다.

“어이구, 놀고들 있네.”

두목은 부상자를 옮기다가 실수했으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반면에 말은 그 소리에 놀랐는지 울부짖으며 날뛰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땔감을 구하러 갔던 산적들이 돌아왔는데도 나머지는 소식이 없었다.

“장군님, 다른 녀석들은 어디 갔습니까?”

“돌보 놈이 발목을 다쳤다는구나.”

“예? 저는 여기 있는뎁쇼?”

“뭐?”

산적들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다쳤다던 산적은 땔감을 든 채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런 쳐 죽일 놈이 감히 장난을 쳐? 내 이놈을 당장……. 이놈들은 왜 여태껏 안 돌아오는 게야?”

“자, 장군님. 그러고 보니 아까 비명 소리가……”

“엉?”

두목은 불현듯 깨달았다. 남아있던 산적들이 부상자를 도우러 간 뒤 비명이 들렸고, 그들은 여태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장군님, 우리가 뭔가에 홀린 모양입니다. 돌보가 다쳤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그, 그게……”

두목은 부하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얼굴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에 사냥하다가 다친 큼지막한 흉터가 있었다. 틀림없이 여태까지 함께 다녔던 부하였다. 평소와 다른 점도 전혀 없었다.

“혹시 이 자가 아닙니까?”

두목은 눈과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바로 그 부하가 서 있었다. 그는 방금 누구에게 부상자 얘기를 들었는지 물었던 부하가 서 있던 자리에 그가 들고 있던 땔감까지 그대로 들고 서 있었다. 얼굴에 흉터도 똑같이 있었다. 산적들은 모두 그대로 얼어붙었다. 말은 고삐가 묶여있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기세로 더욱 날뛰었다.

“너, 너, 어……”

두목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으나 말이 목에 턱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흉터 난 산적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땔감을 떨어뜨렸다. 마지막 햇빛 한줄기가 사라지는 순간 그의 눈빛이 돌변하였다. 그가 입을 쩍 벌리더니 기다란 혀가 튀어나와 순식간에 곁에 있던 산적 둘의 목을 꿰뚫었다. 혀가 빠지면서 산적들은 아무 소리도 못 내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날뛰던 말은 기어이 고삐를 끊고 달아나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도 두목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도망치려던 산적 하나마저 혀로 꿰뚫어 죽인 그는 두목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두목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핥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던 그 존재는 어느 틈에 오늘 살해당한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철퇴에 맞아 머리가 터져서 피를 흘리는 죽은 직후의 모습 그대로였다.

“살려달라고 했잖소. 키키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요괴의 혀는 두목의 목을 찔렀다. 혀는 그의 몸 안에 피를 한가득 빨아들이고 다시 입안으로 돌아왔다. 산적들을 남김없이 다 해치운 요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가를 혀끝으로 훑었다.

“하아, 오랜만에 팔팔한 것들로 실컷 마셨네.”

본모습으로 돌아간 요괴는 얇고 하얀 옷자락을 늘어뜨리며 옷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돌아서서 떠나려던 그는 도적들이 약탈한 물건들에 눈길이 갔다. 곡식이나 옷감에는 별 흥미가 없었으나 화려한 장신구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요괴는 백옥으로 만든 가락지를 손가락에 끼워보고 귀고리를 귀에 걸어보기도 하였다. 귀고리는 불편하여 빼서 던져버렸고 가락지는 마음에 들어서 가지기로 하였다. 이어서 요괴는 수정과 금을 꿰어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고 칼집에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단도를 집어 들었다. 손잡이와 칼집 모두 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단도를 뽑아 날을 만져보던 요괴는 그것을 냅다 어딘가로 던졌다. 세차게 날아간 단도가 깊숙이 박히면서 나무에 균열이 갔다.

“거기 숨어있는 거 다 아니까 나오지 그래?”

요괴의 외침에 단도가 박힌 나무 뒤에서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침착하게 걸어 나왔다. 그는 목에 염주를 걸고 허리에 방울과 칼을 매달고 있었다.

“역시 요귀로구나. 저 산적들을 전부 네가 죽였느냐?”

“그래. 그렇다면 어쩌려고?”

“저 산적들은 다른 이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던 자들이다. 오늘 너에게 모두 죽었으니 더는 살생을 저지르지 못하겠구나.”

“그래서 고맙다고 하려고?”

“남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기는 너도 매한가지가 아니더냐? 오늘은 악인을 죽였으나 내일은 무고한 이의 목숨을 빼앗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살생을 저지를 터. 한평생 이 산에서 수행한 나로서 그를 묵과할 수가 없구나.”

요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깔깔대며 웃었다.

“하하하하! 그럼 도나 마저 닦을 일이지 왜 기어 나왔나?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고 썩 돌아가. 배는 채웠으니 그냥 보내주지.”

그러나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팡이를 땅에 박아 세우고는 손을 모아 주문을 외웠다. 그의 허리에 달린 방울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방울 소리는 노인의 주문 외우는 소리와 합쳐져 점점 커졌다. 그 소리는 귀를 찢고 골을 울리는 듯하였다.

“으윽! 그만두지 못해?”

요괴는 괴로워하며 귀를 막았다. 마치 소리가 예리한 날붙이로 변하여 귓속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통증은 점차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참다못한 요괴는 혀를 빼내어 노인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눈조차 뜨기 힘들어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만하라고!”

요괴는 소리를 지르며 양팔을 뻗었다. 그러자 하얀 옷자락이 길게 늘어나 팔을 뻗은 방향에 있던 나무들을 부숴버렸다. 갑작스러운 요괴의 발악에 노인은 주문을 멈추었다. 주문이 멈추자마자 요괴의 옷자락은 노인에게로 향하였다. 노인은 재빨리 지팡이를 뽑아 옷자락을 막아내었다. 요괴가 옷자락을 지팡이에 휘감아 그것을 빼앗으려 하자 노인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옷자락을 내리쳤다. 쇠가 아닌 나무로 된 칼이었는데도 옷자락이 잘렸다. 요괴가 옷자락을 거두어 보니 마치 불에 탄 듯 그을려 있었다.

“이것은 복사나무로 만든 목도이다. 무언가를 찌르고 벨 수는 없지만 너 같은 것을 상대하는 데에는 제격이지.”

“이 늙어빠진 게…….”

요괴는 분노하며 손톱을 세우고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매의 발톱처럼 휘두르는 날카로운 손톱을 노인은 지팡이와 목도로 전부 막아내었다. 이내 노인이 서서히 밀리는가 싶더니 빈틈을 노려 지팡이 끝을 요괴의 배로 힘껏 내찔렀다.

“커헉!”

기습을 받은 요괴는 배를 감싸며 나가떨어졌다. 충격이 컸는지 요괴는 몸을 일으키려다 도로 쓰러졌다. 노인은 요괴에게 다가가 목도를 겨누었다.

“잘 가거라. 극락왕생은 빌어주마.”

노인이 또다시 주문을 외우며 지팡이와 목도를 모아들고 높이 치켜들었다. 그가 요괴를 내리찍으려는 순간, 갑자기 주변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둠이 몹시 짙어 요괴와 노인 둘 다 눈이 먼 것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엇!”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노인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방울 소리가 주문을 외울 때보다 더 요란하게 쩔렁거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무언가가 연속적으로 부러지는 소리에 묻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온몸의 뼈가 마디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부수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이내 소리마저 사라진 어둠 속에서 요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암흑에서 요괴는 점점 불안해졌다.

“괜찮은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요괴는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흑재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여전히 짙게 깔린 암흑 속에서 오직 그의 모습만이 보였다.

“너는 뭐야?”

요괴는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작은 풀벌레의 움직임도 느낄 수 있었던 그는 눈앞의 상대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의아하였다.

“나는 흑재라고 한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그런 거 없는데?”

“응? 이름이 없다고?”

생각지 못한 답에 흑재는 되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인간 따위도 다 이름이 있는데.”

“그런 거 없이도 여태껏 잘만 살아왔어.”

요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쏘아붙이고는 천천히 흑재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서 맴돌며 그를 훑어보았다. 냄새를 맡기도 하고 실체가 있는지 확인하려 흑재의 손과 몸을 만져보기도 하였다. 흑재는 이름이 없는 요괴에게 흥미가 생겨 가만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너 같은 녀석은 처음 봐. 눈에 보이고 만질 수도 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마치 없는 것처럼. 너는 뭐지?”

요괴는 흑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감추려 함이다. 귀찮게 하는 놈이 하나 있거든.”

“그래? 너도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로구나? 귀찮게 하면 죽여버리면 되는데 굳이 숨어다니는 걸 보면 말이야.”

“하하하, 그런가?”

요괴는 두 손으로 흑재의 얼굴을 붙들고는 그의 눈을 뚫어지도록 들여다보았다.

“너, 애꾸로구나? 그 귀찮은 놈에게 빼앗겼나? 왜 못 죽이는지 알겠네.”

“하……”

요괴는 겁도 없이 흑재의 치부를 알아내어 조롱하였다. 흑재는 불쾌하면서도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이상하게도 흥미가 생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요괴는 복장도 특이하였다. 치마처럼 보일 만큼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상의는 매우 길고 얇은 천을 가슴에 둘러매어 묶고 매듭의 양 끝을 손목에 매단 게 전부였다. 꼭 팔에 날개가 달린 듯한 눈길을 사로잡는 독특한 복장이었다. 무엇보다 요괴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마치 색을 칠하지 않은 그림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미인 같았다.

“그래도 이름이 있는 게 낫지 않나? 다들 너를 뭐라고 부르지?”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아. 마주치는 것들은 모조리 잡아먹었거든.”

“그렇군. 그렇다면 내가 하나 지어주면 어떨까?”

“뭐? 네가 뭔데?”

요괴는 불쾌한 눈치였다.

“나는 그대를 더 알아보고 싶은데, 그러자면 부를 이름이 있는 게 나으니까.”

“나를 더 안다고?”

“그래. 이렇게 만난 김에 서로 가깝게 지냈으면 한다. 내가 머무는 곳에 함께 가지 않겠나? 거기서 같이 사는 다른 녀석들도 있는데, 만나보면 그대의 좋은 벗이 될 수도 있을 거야.”

“벗이라고?”

요괴는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처음 만나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이가 제집에 같이 가자고 청하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제의에 요괴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체처럼 생기가 없는 눈과 도통 속내를 알 수가 없는 다른 눈이 영 꺼림칙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구해주었고, 그동안 보았던 존재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호기심이 동하기도 하였다.

“너 재미있는 놈이다. 왠지 싫지 않아.”

요괴는 뱀이 나무를 감으며 기어오르듯 흑재의 어깨를 쓸며 목덜미를 끌어안더니 혀로 그의 목을 쓸었다. 그의 도발적인 행동에도 흑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사이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요괴는 흑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여 주변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럼 들어가지. 이쪽이다.”

흑재가 요괴를 집으로 안내하였다. 요괴는 순식간에 다른 장소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 흑재에게서 떨어졌다.

“집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내가 머무는 곳이다. 안은 보기보다 넓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흑재는 돌아서서 요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주변을 둘러보던 요괴는 그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흑재는 요괴를 데리고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지나갔다. 아지태가 처음 왔을 때처럼 요괴도 안과 밖이 딴판인 집을 두리번거리며 따라갔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가도 가도 끝이 없네.”

“거의 다 왔다.”

요괴가 불평하였다. 어둠 속에서 검은 아이들이 하나둘 기어나와 요괴를 신기하게 올려다보며 뒤따랐다.

“이것들은 또 뭐야? 징그러워.”

“여기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들이다.”

요괴는 등 뒤에서 점점 수가 불어나는 검은 아이들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노란 눈을 반짝이며 계속 졸졸 따라오니 꼭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매달릴 것 같았다. 마침내 흑재가 어느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요괴도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검은 아이들은 방까지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다.

“다녀오셨습니까, 어르신. 담철과 아지태가 돌아왔습니다.”

“그래, 어서들 오너라.”

흑재는 오랜만에 돌아온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아지태는 처음 흑재에게 찾아왔을 때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잘 먹고 힘을 기르면서 몸집이 커진 데다, 풀어헤치고 있던 머리도 깔끔하게 빗어서 상투를 틀고 그 위에 두건을 쓰고 있었다. 용모가 단정해지니 외모도 빛을 발하여 영락없는 귀공자였다. 흑재를 뒤따라 들어온 요괴를 발견한 송아와 아지태, 담철은 본능적으로 그를 경계하였다. 반면에 요괴는 흥미롭게 그들을 한명 한명 살펴보았다. 방 안에 모인 이들 모두가 인간의 모습이었으나 그들은 서로의 본성을 곧바로 파악하였다.

“무엇 하느냐? 다들 앉아라.”

흑재가 자리를 권하자 요괴는 한쪽 발을 의자 위에 걸치고 삐딱하게 앉았다. 그의 무례한 태도에 담철과 아지태는 당혹하며 흑재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뜻밖의 만남에 놀란 그들은 어서 흑재가 설명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흑재는 요괴를 소개하는 대신 담철에게 물었다.

“이 누리를 둘러보니 어떠하더냐? 재미있었느냐?”

“에(예), 어르신.”

“아지태가 여러 가지 잘 가르쳐주었고?”

“에.”

흑재의 물음에 답을 하면서도 담철은 이름 모를 요괴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러다 요괴와 눈이 마주치자 담철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였다. 마치 신기한 것을 구경하듯 자신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흑재가 그에 대하여 뭐라도 말해주기를 바랐으나 그는 이번에는 아지태에게 말을 걸었다.

“요즈음 인간들 사는 모습이 어떠하더냐? 나날이 시끄러워지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하옵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조정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생겨나고 있사옵니다. 민란과 도적은 물론 사병과 토지를 보유한 유지와 장자들이 사방에서 궐기하여 가히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옵니다. 더군다나 임금은 제 숙부가 죽은 뒤로 나랏일에 손을 놓아버렸다고 하옵니다.”

“그렇구나. 과연 도선의 말대로 되고 있어.”

“조만간 그들 중 가장 특출난 자를 가려내어 어르신께 아뢰겠사옵니다.”

“세달사에 있었던 궁예라는 녀석도 찾아내어 지켜보도록 하여라. 서라벌에서 보았던 녀석인데, 선종이라고도 불리는 애꾸 중이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저이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주려무나. 너는 글을 많이 읽었으니 멋들어진 이름을 하나 짓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예?”

흑재의 갑작스러운 지시에 아지태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소개도 없이 처음 만난 요괴의 이름을 지어주라는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향한 요괴의 농염한 눈빛도 불편하였다.

“하오나, 소인은 저이를 알지도 못하옵니다.”

“아, 그렇지. 물어보지도 않고 데려왔구나. 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물어보았던 것인데.”

송아가 걸친 운견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요괴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야기를 해달라는 말이지? 나도 잘 몰라.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서 피를 빨며 살아왔어.”

“태어났을 때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나?”

“처음 눈을 떴을 때 어느 인간이 묻힌 무덤 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다 썩어서 뼈만 남은 몸뚱이와 붓과 그림들이 함께 묻혀있더군. 아마도 죽기 전에 그림을 그리던 인간이었나 봐.”

“어르신께 너무 무례하지 않소. 말을 높이시오.”

처음부터 요괴의 태도가 거슬렸던 아지태는 참다못해 그에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요괴는 입꼬리를 올리며 아지태를 비웃었다.

“그럼 네 귀를 닫던지.”

“뭐라고?”

“괜찮으니 마저 이야기해 보아라.”

흑재는 아지태를 제지하였다. 순간 치밀어오르는 화를 아지태는 간신히 억눌렀다.

“그 무덤을 떠나서 돌아다니다가 인간들이 하는 말을 들었지. 홀로 살면서 그림을 그렸지만 아무도 그림을 사지도, 봐주지도 않아서 외롭게 굶어 죽었다더군. 죽은 지 한참 지나서 다 썩은 것을 찾아서 묻어주었는데, 미처 다 못 그린 그림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고 하더라.”

“딱한 것, 쯧쯧…….”

흑재는 전혀 그렇지 않은 말투로 안타까워하였다.

“그 뒤로는 이리저리 떠돌며 인간의 피를 마시면서 여태까지 살아왔어. 다른 것들도 먹어봤는데 입에 맞지를 않더라고.”

“그렇게 된 것이었군. 잘 들었다. 앞으로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지내자. 함께 살면서 서로를 지켜준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건 두고 봐야지. 저 녀석들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데.”

요괴는 송아와 담철, 아지태를 곁눈질로 보며 냉소를 지었다. 그들은 몹시 불쾌하였으나 정작 흑재가 개의치 않는 듯하여 뭐라 따지기에도 마뜩잖았다.

“방을 하나 주어야겠구나. 담철이가 데려다주어라.”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담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아오시오(따라오시오).”

담철의 미숙한 발음에 요괴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말하는 게 왜 저래? 이제야 말을 배우고 있나? 한참 더 배워야겠네.”

요괴가 담철이 귀여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나빠진 담철은 머리를 마구 흔들어 그 손길을 뿌리쳤다. 흑재가 눈치를 주자 담철은 허둥지둥 요괴와 함께 방을 나섰다.

“어떻더냐?”

흑재가 송아에게 물었다.

“그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이 다 못 그린 그림에 스며들어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번 마주친 인간은 그 모습과 목소리는 물론 모두 똑같이 흉내 내더이다.”

“그래, 그것은 내 눈으로도 보았다. 놀랍더군. 꼭 쓸모가 있을 터이니 잘 대해 주어라. 같이 지내다 보면 좋은 구석도 보일 게야.”

“예, 어르신.”

“이름은 무엇이 좋겠느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별생각이 없던 아지태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저, 아직……”

“서둘러라. 부를 일이 생기면 무어라고 부른단 말이냐?”

“예. 어……”

아지태는 그제야 요괴가 들려준 사연을 곱씹어 보며 고민하였다. 그리고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완성하지 못한 그림으로부터 태어났으니, 백화(白畵)라고 짓겠사옵니다. 색을 칠하지 않은 하얀 그림이라는 뜻이옵니다.”

“나쁘지 않구나. 오늘은 이만 자고 날이 밝으면 네가 알려주어라. 다들 물러가라.”

“예, 어르신.”

아지태를 지긋이 바라보던 흑재는 말을 덧붙였다.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알겠느냐?”

“예…….”

그 말이 서로 다투지 말라는 경고처럼 느껴져 섬뜩해진 아지태는 서둘러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철은 빈방의 문을 열어 백화를 들여보내었다. 말 그대로 텅 빈 방은 바닥에 먼지조차 없었다.

“여기서 지내라고?”

담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인물을 구경하러 모여든 검은 아이들을 발견한 백화는 눈살을 찌푸리며 턱짓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그럼 저것들 못 들어오게 해. 징그러워.”

명령조인 백화의 말투가 영 못마땅하였으나 담철은 검은 아이들을 손짓으로 방에서 내보내었다.

“이 안에 들이고 싶은 것이 있거든 말하시오. 가져다드리겠소.”

송아가 방 안에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백화는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네 얼굴이 아니로구나?”

백화는 송아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그대로 목에서 가슴으로 손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송아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인간이었다면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도 네 것이 아니고. 그래도 잘 어울리는걸?”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에 송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백화는 실실 웃으며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너 가져.”

백화는 목걸이를 직접 송아의 목에 걸어주었다. 송아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고맙다는 말도 모르니?”

송아는 백화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원체 감정이나 마음을 표현할 줄 몰랐다. 거기다 백화가 한 행동의 의도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백화의 마음속에 정말 자신의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어 더욱 그러하였다.

“됐다. 둘 다 나가.”

백화는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였다. 백화를 쏘아보던 담철은 방을 나서려다 우두커니 서 있는 송아를 보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담철이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힌 문짝에 복도에 모여있던 검은 아이들이 튕겨 날아갔다.

“의자나 하나 가져다 주던지.”

그 광경을 보고 코웃음을 치던 백화가 방문이 닫히기 직전에 말하였다.

복도를 지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서 담철은 어눌한 말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 저 녀 슬타. 어르신 왜 데려오시미까(난 저 녀석이 싫어요. 어르신은 저 녀석을 왜 데려오신 겁니까?)?”

“나도 몰라. 어르신의 뜻이니 어쩔 수 없지. 조금만 참자.”

백화의 존재가 꺼림칙하기는 송아도 마찬가지였으나 흑재가 직접 데려와서 친하게 지내라고 당부까지 하였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송아는 백화가 준 목걸이를 들어 올려 등불에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화려하게 빛나며 눈을 찔렀다. 송아는 그런 것을 가져 본 적도, 가지고 싶은 적도 없었으나 보면 볼수록 예뻐 보이기는 하였다. 흑재의 말대로 함께 지내면서 좋은 점을 찾아본다면 아지태처럼 좋은 동료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용어 해석>

운견 : 구름 모양으로 생긴 숄처럼 어깨에 걸치는 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