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아와의 첫 만남 이후로 허월은 매일 같이 음식을 싸 들고 바닷가 절벽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기묘한 아이는 두 번째로 만난 뒤로는 통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렸는데도 아이가 나타나지 않아서 자리를 옮겨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허월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니면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해서 오지 않는지 걱정이 커졌다. 분명 자신이 준 음식과 옷을 싫어하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나타나지 않으니 불안하였다.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쉬움이 매우 컸다.
허월은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모래사장으로 내려와 파도가 닿지 않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다림이 지루하였던 그는 바랑에서 경전을 꺼내었다. 출가한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읽어 진작에 다 외워버린 내용이었으나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갈매기 소리에 언제 아이가 올지 신경이 쓰여 금세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허월은 결국 한숨을 쉬며 경전을 덮어버렸다. 바다를 바라보던 허월은 문득 아이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두 번의 만남 동안 아이의 목소리조차 들어보지 못하여 이름을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이름이라도 알아두었다면 바다를 향해 힘껏 외쳐 불러볼 수도 있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아쉬움만 커졌다.
끼르륵-
갈매기 울음소리인 줄 알고 신경 쓰지 않던 소리가 또 한 번 들리자, 허월은 뭔가가 다름을 느꼈다. 여러 소리에 섞여 확실하지 않았으나 분명 다른 소리였다. 허월은 온 신경을 귀로 집중하였다. 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 위에 작은 섬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그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니 더 뚜렷하게 들렸다.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였다. 까르르 웃는 여성과 아이 같았다. 허월은 바위를 자세히 보려 바다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바위 주변에 사람의 형체들이 보였다. 상반신만 내놓고 있는 그들은 모두 젊은 여성들이었고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여인들은 물론 바위 위에 서 있는 아이들까지 모두 알몸이었다. 아이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다시 바위 위로 기어 올라와 뛰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바위 주위를 맴돌며 아이들을 지켜봐 주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허월은 초아를 떠올렸다. 왜 그들이 그곳에서 놀고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초아와 관련이 있을 듯한 느낌이 들어 허월은 더 가까이 접근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잔뜩 신이 난 초아가 바위 위로 기어 올라왔다. 허월은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파도를 뚫고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발이 젖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별안간 한 여인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더니 높이 튀어 올라 공중제비를 돌았고, 허월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물 밖으로 튀어 오른 여인은 다리가 매우 길었는데, 자세히 보니 다리가 아닌 반짝이는 비늘로 덮인 물고기와 같은 커다란 꼬리였다. 허월은 전설인 줄만 알았던 인어를 직접 목격하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귀로 듣고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무엇보다 햇빛에 반사된 바다처럼 반짝거리는 그들의 무지갯빛 비늘과 자태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비늘 없이도 빛을 발하는 그들의 흰 살결을 보고 있으니 오래전 잊어버린 어떤 기분이 다시 들었고,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허월은 그들을 더 가까이서 자세히 보고 싶었다. 어서 다가가서 말을 걸고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헉!”
허월은 턱밑에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는 물이 가슴께까지 닿도록 깊이 들어와 있었다. 그를 알아챈 순간 요동치는 차가운 물과 가슴을 누르는 수압이 갑자기 한꺼번에 느껴졌다. 인어에게 넋을 빼앗겨 그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당황한 허월은 팔을 휘저어 해변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물에 잠긴 그의 팔과 다리는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그만 중심을 잃고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그 바람에 허월은 머리까지 물속에 잠겨버렸다. 코와 입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와 숨을 틀어막았다. 발을 이리저리 휘저었으나 바닥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발끝에 닿지 않았다. 허월은 어떻게든 수면 밖으로 떠오르기 위해 몸부림쳤다. 겨우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어 숨을 들이마셨으나 곧바로 다시 가라앉았다. 또다시 짠물이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들어왔다. 있는 힘껏 팔다리를 휘저었으나 역부족이었고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허월은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빨려 들어가듯 밑으로 가라앉았다. 팔다리가 점점 무거워져 헤엄을 칠 수가 없었다. 이윽고 허월은 서서히 몸에 힘이 풀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커어억! 쿨럭쿨럭!”
허월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목이 터지도록 기침을 하였다. 코와 입에서 짠 바닷물이 뿜어져 나와 콧속과 목구멍이 쓰라렸다. 그는 잔뜩 먹은 물을 다 토해내고는 도로 쓰러졌다. 겨우 정신이 차리고 보니 허월은 모래사장에 누워있었다. 까슬까슬한 모래와 발끝을 적시는 파도의 생생한 느낌은 그가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허월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해변에 앉아 경전을 읽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으나 그 이후의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해변에 있던 자신이 어쩌다 물에 빠졌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허월의 눈에 희한한 광경이 들어왔다. 파도가 닿지 않는 곳에 알몸인 사람 여럿이 허월의 바랑을 뒤적거리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에 스며든 물기를 닦아내고 다시 보니 여인과 아이들이었다. 어째 하나같이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제야 허월은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바위에서 놀던 인어들이었다. 꼬리는 사라지고 다리가 달려있었으나 틀림없었다. 전설처럼 그도 인어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었다. 허월은 너무도 아름다운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뛰어 바랑에서 음식을 꺼내 살펴보며 맛보는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우윽! 컥!”
그러다 갑자기 미처 나오지 못한 물이 목에서 올라와 또 기침이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다가온 허월에 놀란 인어들은 음식과 바랑을 집어 던지며 두 팔로 기어서 도망쳤다.
“여보게들, 잠깐만. 두려워 말게.”
인어들은 바위 뒤에 숨어 허월을 경계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허월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을 안심시키려 하였다.
“혹시 그대들이 빈도를 구해주었는가?”
허월의 물음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안면이 있던 초아가 바위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널브러진 바랑과 음식을 가리켰다.
“오, 그래. 너 주려고 또 가져왔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초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월은 다시 시선을 인어들에게 돌렸다. 그들 중 하나가 그에게 유독 강한 적대심을 보였다. 초아와 가까운 사이였는지 허월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아이의 한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빈도는 결코 그대들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네. 그저 우연히 만난 저 아이가 귀여워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었을 뿐이야. 육지에는 바다에 없는 진귀한 것들이 많거든. 원한다면 그대들에게도 보여주겠네.”
인어들은 여전히 허월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허월은 멋쩍게 웃으며 바랑을 정리하다가 바랑 안에 남아있던 배 한 알을 꺼내어 초아에게 내밀었다. 다른 음식은 모래 위에 나뒹굴어서 내버려 두었다.
“자, 이것도 마저 먹으려무나. 다음에 또 가져오마.”
허월은 배를 바위 위에 올려놓은 뒤 바랑을 짊어지고 일어섰다. 인어들의 태도를 보아 더 다가가지 않는 편이 나을 듯하였다.
“빈도의 이름은 허월이라고 하네. 목숨을 구해주어 고맙네.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다음에 또 만나세.”
인어들에게 인사를 하고 해변을 벗어나던 허월은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인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초아만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허월도 손을 흔들어 아이에게 화답해 주었다.
“어이쿠…….”
허월은 갑작스러운 오한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여태 몸이 젖은 채로 있었던 탓에 체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그 상태로 오대산까지 갈 수는 없었기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순식의 집으로 향하였다.
“네가 마주쳤던 게 그 인간이니?”
집으로 돌아온 세리는 초아에게 물었다. 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잔소리가 쏟아질 줄 알았으나 세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얼굴은 수심이 가득하여 어두웠다. 초아가 부탁하여 허월을 구해주기는 하였으나 그를 후회하고 있는 듯하였다. 곁에서 도로를 안고 있던 라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쁜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던데. 가지고 있던 것들도 맛이 괜찮았어.”
“언니도 그렇게 생각해? 믿어도 되는 인간일까?”
세리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자 을소도 한마디 거들었다.
“괜찮을 거야. 그 인간처럼 머리를 깎고 염주를 가지고 있는 인간을 중이라고 하는데, 절대 남의 목숨을 빼앗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염주가 뭔데?”
“그 인간이 목에 걸고 있던 것 말이야. 중들은 모두 가지고 있어.”
“그래?”
세리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나 을소의 말을 듣고 나니 한 번쯤 더 만나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베푸는 친절이 과연 진심인지, 초아와 계속 어울리게 해 줘도 될지 직접 판단하고 싶었다. 초아와 이미 몇 차례 만났던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얘, 우리가 물에 빠져서 죽을뻔한 것도 건져줬는데 설마 무슨 짓을 하겠니? 고마워서라도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너무 시름하지 마.”
“그럴까?”
라미와 을소의 설득에 일리가 있었다. 허월의 바랑에는 종이 뭉치와 음식뿐이었고,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도 인간이 사용하는 위험한 쇠붙이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어차피 그를 살려 보낸 이상, 다음번에 다시 만나서 확실하게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순식의 집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약을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허월이 결국 밤사이 몸살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어쩌다가 바다에 빠지신 겁니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그동안 집에서 음식만 얻어가시고 얼굴을 비추지 않으셨는지요? 이제는 그만 집으로 돌아오시지요. 산속에서 홀로 지내시니 이런 일이 생긴 것 아닙니까?”
순식은 너무도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에 몸져누운 허월을 나무랐다.
“알았으니 그만하거라, 커흠…….”
“탕약을 달이고 있으니 곧 올리겠습니다. 또 불편하신 곳이 있으시면 의원에게 속히 말씀하십시오. 소자는 이만 물러갈 터이니 쉬시지요.”
“오냐, 고맙구나.”
순식은 방을 나서기 전 화로에 숯을 더 넣었다. 허월은 오들오들 떨며 화로에 손을 뻗어 열기를 쬐었다.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으려니 아름다운 인어들의 모습이 또 그려졌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목숨을 빚졌으니 어떻게든 보답을 해 주고 싶었다. 게다가 인간과 똑같은 생김새에 말도 알아듣고, 육지와 바다를 마음대로 오갈 수도 있는 초아가 정작 육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몸이 낫는 대로 초아를 다시 찾아가 그가 가진 모든 지식을 전수해 주어야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음식과 육지에 사는 온갖 동식물은 물론, 옷 입는 법과 기본적인 예절 등 친손녀처럼 잘 이끌어 주리라 다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