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뒤덮은 발들

by 어둠의 극락

이른 새벽부터 관아의 보초들을 제외하고는 관군의 대부분이 와우산에 투입되었다. 군사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단단히 무장하고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산 여기저기에 배치되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위장까지 하였다. 그러나 범인을 잡을 수도 있다는 기대와는 달리 해가 지도록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다.

“나 참,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게. 발바닥부터 무릎까지 다 아파 죽겠는데.”

“이름이 뭐더라? 아, 아지태인지 뭔지 어디서 굴러들어 온 놈이길래 우리더러 이래라저래라하는 건지, 원.”

점점 어두워지는 으슥한 산속에서 군사들은 하나둘 수군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새벽부터 산에 올라온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처음에는 살인범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각오를 다졌으나 피로가 몰려오니 의욕을 잃고 말았다. 불만은 자연스레 아지태에게로 향하였다.

밤이 깊어지도록 아지태는 산 정상에서 자리까지 펴고 앉아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술만 마시고 있었다. 군사들이 불평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함께 정상에서 대기하던 소윤은 태평한 그가 영 미덥지 않았으나 일단 지켜보기로 하였다.

“한 모금 하시렵니까?”

아지태가 술병을 내밀었으나 소윤은 손사래를 쳤다.

“괜찮네.”

아지태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둠에 잠긴 마을에서 유일하게 대윤의 관아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대윤께서 잠을 못 이루시는 모양입니다.”

“꽤 오래되었다네. 오죽 근심이 크시겠는가?”

“허나 오늘 밤은 편히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곧 그 근심이 사라질 터이니까요.”

“정녕 자신 있나? 대체 무슨 생각인가?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가? 이미 밤이 깊었어.”

“내일 아침까지는 있어야 하니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지요.”

“내일 아침까지? 허, 이것 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계책에 소윤도 점차 아지태가 수상하게 여겨졌다.

보초들 외에 모두가 떠난 관아에서 대윤은 홀로 남아 집무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미 사직서도 써두었고 가족들에게도 떠날 채비를 하라고 일러둔 뒤였다. 웅주 도독을 만난다는 핑계를 대었으니 별 의심 없이 서원경을 떠날 수 있을 터였다. 정리를 마친 대윤은 마지막으로 한번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비록 어렵게 오른 관직이었으나 발등에 떨어진 불과 앞으로 다가올 큰불을 어떻게든 피하려면 아쉬워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대윤은 마당에 서 있던 보초병에게 다가갔다.

“이제 퇴청하십니까?”

“그래.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왕도에 전달할 중요한 서찰이 있느니라. 말을 내어줄 터이니 신속하게 전하여라. 그리고 그 내용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잘 간수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예, 대윤 어른. 명심하겠습니다.”

대윤은 봉한 사직서를 병사에게 건네주었다. 병사는 마구간으로 달려갔고, 대윤은 서둘러 대문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문으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대윤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관아에는 분명 적어도 열 명의 병사는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마당을 다시 둘러보니 방금 사직서를 전달한 병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관아 안을 전부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대윤은 마구간으로 가보았다.

마구간에는 말도 병사도 없었다. 대윤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조금 전 마주쳐서 지시를 내렸던 병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천히 뒷걸음질로 마구간을 나온 대윤은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 다리로 뒤로 돌아섰다. 본능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 들 게 아니라 서둘러 관아를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갑작스러운 통증과 함께 다리에 힘이 빠졌다. 숨이 턱 막히며 눈앞이 흐려졌다. 그는 곧 끊어지려는 숨을 간신히 붙들고 팔과 손에 힘을 주어 가슴을 더듬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액체에 젖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것이 만져졌다. 그리고 무언가가 서로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윽고 몸 안의 모든 수분이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대윤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산속에 매복한 군사들은 서로 번을 서며 눈을 붙였다. 이제 그들은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소윤도 어느새 나무에 기대어 잠들었다. 아지태는 피곤하지는 않았으나 가지고 온 술도 다 마셨고 기다림이 길어져서 절로 하품이 나왔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는 하였으나 역시 인내는 쉽지 않았다.

“하!”

길고 긴 기다림을 보상해 주듯 마침내 아지태가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관아의 불이 전부 꺼지며 와우산 일대가 온통 어둠에 휩싸였다. 아지태는 서둘러 목에 걸고 있던 줄을 풀어 그것을 품속에서 꺼내었다. 흑재에게서 받은 요력의 결정을 줄에 꿰어 만든 목걸이였다. 아지태는 결정을 손에 쥐고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잠시 뒤, 땅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지진이 아니었다. 아지태가 딛고 서 있는 주변을 제외하고는 산의 흙과 돌이 부르르 떨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들까지 흔들리자 소윤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잠이 확 달아난 소윤은 곁에 있던 등불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으아아아악!”

소윤이 비명을 지르며 등불을 내던졌다. 사방에서 크고 작은 지네들이 기어 나와 우글거리고 있었다. 지네들은 땅에서 끊임없이 기어 나와 삽시간에 산 정상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일부는 소윤의 다리를 타고 그의 몸으로 기어 올라왔다.

“아으아아악! 으아아아아!”

아지태는 목이 찢어지도록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소윤에게 가서 결정을 들이대었다. 그러자 지네들이 소윤에게서 떨어져 나와 일제히 산 아래쪽으로 몰려갔다. 지네들이 물러가고도 소윤은 실성한 사람처럼 계속 옷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진정하시지요. 이제 범인을 알아내었습니다.”

“으헉, 허억, 헉……”

소윤이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자 아지태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 차리십시오. 범인이 나타났으니 당장 관아로 돌아가야 합니다. 뭐,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지태는 소윤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지태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정상에서 내려온 소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또다시 경악하였다. 군사들이 지네들에 뒤덮여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미 기절하여 쓰러져 있거나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소윤도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저것들은 범인이 아닙니다. 따지자면 공범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주범은 아마 마을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아지태는 결정의 힘으로 군사들을 공격하던 지네들을 쫓아내었다. 사납게 몰려들던 지네들이 순식간에 물러가자, 목숨을 건진 군사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부축하였다.

“어, 어떻게 한 거요?”

한 병사가 묻자 아지태는 손을 펼쳐 결정을 보여주었다.

“강력하고 성스러운 힘이 담긴 귀한 물건이오. 서두릅시다. 마을로 돌아가야 하오.”

아지태는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고, 소윤과 군사들은 홀린 듯이 그를 뒤따랐다. 과연 아지태는 외모처럼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다. 두렵기는 하였으나 신기한 능력으로 자신들을 구해주니 신뢰가 싹텄다.

대윤의 관아와 그 주변은 이미 초토화되어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하였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틈으로 말라붙은 시신들이 보였다. 소윤은 그중 대윤이 입고 있던 옷을 입은 채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보고는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았다. 관군들도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무 늦었군요. 대윤께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십니다, 쯧쯧……”

아지태는 무너진 관아를 둘러보며 혀를 끌끌 찼으나 조금도 안타까워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쭈그려 앉아 대윤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소윤은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하였다.

“숨을 거둔 지 얼마 아니 되었군요. 모두 경계 태세를 갖추시오! 괴수가 아직 이 근처에 있소이다.”

아지태의 지시에 흩어져 있던 군사들이 신속하게 모여 대열을 이루었고, 아지태는 침착하게 철퇴를 손에 쥐었다. 소윤은 군사들 뒤에서 벌벌 떨며 닭처럼 두리번거렸다. 당장이라도 괴물이 시커먼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두려움은 순식간에 번져 관군들까지 집어삼켰다. 징그러운 지네 떼에 이어서 또 무엇이 덮쳐 올지 너무도 두려웠다. 병사들은 물론 군관들까지 한마음으로 당장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고 싶었다.

“왔군.”

아지태의 나지막한 말과 함께 땅이 요동쳤다. 산에서 지네들이 기어 나올 때보다 훨씬 더 강한 진동이었다.

“지진이다!”

아지태를 제외한 모두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소윤은 머리를 감싸며 몸을 숙였고, 군사들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였다. 급기야 관아 주변의 민가들까지 흔들리며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잠들어 있던 주민들은 옷을 챙겨입을 새도 없이 맨발로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굉음과 함께 집 몇 채가 폭발하듯 부서지며 무너졌다. 그리고 이어진 광경에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지네가 땅을 뚫고 올라와 고개를 내밀었다. 배를 묶는 밧줄처럼 굵고 긴 더듬이와 길고 날카로운 턱이 말의 다리만큼 큰 지네였다. 지네는 땅에서 기어 나오면서 몸이 점점 더 커졌고, 아까 산에서 나타난 작은 지네들이 구덩이에서 온천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고, 고, 공격하라! 공격해!”

군관들이 소리쳤으나 군사들은 명령을 따르지 못하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들은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결국 대열을 이탈하여 하나둘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하는 수 없이 군관들은 군사들이 내던지고 간 창과 쇠뇌를 주워 직접 지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지네의 몸은 철판처럼 단단하여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지네 요괴는 귀찮다는 듯 군관들을 더듬이로 후려쳐 멀리 날려버렸다.

“이건, 이건 꿈이야, 저건…… 이건 꿈이야…….”

소윤은 머리를 감싼 채 실성한 사람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아지태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땅에 떨어진 창을 주워서 지네 요괴에게 힘껏 던졌다. 군관들이 던졌을 때와 달리 창이 지네의 등에 제대로 박혔다.

캬아아악!

지네 요괴가 귀를 찢을 듯한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하였다. 소윤은 귀를 막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지네가 턱을 딱딱 부딪히며 달려들자, 아지태는 재빨리 창을 하나 더 주우면서 피하였다. 아지태를 잡으려다 땅에 처박혀 흙만 잔뜩 먹은 지네는 더욱 화가 나서 또 달려들었으나 아지태가 더 빨랐다. 그가 던진 창이 이번에는 머리에 박혔다. 지네는 괴로워하며 마구 날뛰었고, 그 바람에 주민들이 빠져나간 빈집들이 쓸려나가 주변이 쑥대밭이 되었다. 바글바글 모여있던 작은 지네들까지 휩쓸렸다.

“걸리적거리니 비키시오.”

아지태는 웅크리고 있던 소윤의 옷깃을 잡고는 냅다 던져버렸다. 그 틈에 지네 요괴가 아가리를 벌리고 누런빛의 액체를 뱉어내었다. 아지태는 몸을 돌려 피하였고, 액체가 떨어진 자리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지네는 액체를 연거푸 뱉어내었고 아지태는 민첩하게 전부 피하였다. 마구잡이로 뱉어낸 탓에 주변에 있던 작은 지네들만 잔뜩 녹아버렸다. 가소롭다는 듯 실실 웃으며 약을 올리는 아지태에게 지네는 분노가 솟구쳐 다시 그를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그러자 아지태는 두 눈을 붉게 빛내며 높이 뛰어올라 철퇴로 지네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머리가 땅에 처박히며 지네의 거대한 몸이 앞으로 뒤집혀 꼬리가 머리 앞으로 떨어졌다. 충격이 상당하였는지 지네는 뒤집힌 채 다리만 바르르 떨며 일어나지 못하였다.

“덩칫값을 못 하는군.”

아지태는 철퇴에 묻은 지네의 파편을 털어내었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숨소리가 차분하였다. 지네 요괴가 쓰러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이 조용해졌다. 치열한 싸움 끝에 찾아온 적막이 어색하게 느껴진 아지태는 괜히 쓰러진 지네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뒷수습이라도 하려니 도와줄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고 없어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붉은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동이 틀 무렵 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폐허가 된 마을에서 아지태가 관아의 잔해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지네와 그를 쓰러뜨린 아지태를 번갈아 보며 살금살금 다가왔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자 아지태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괜찮으니 모두 돌아오시오. 다 끝났소.”

그제야 사람들은 땅에 널브러진 지네들의 사체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접근하였지만 불과 몇 걸음뿐이었다. 아무리 쓰러졌어도 지네 요괴는 그 크기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소? 보시오.”

아지태는 철퇴에 맞아 찌그러진 지네의 머리를 발로 건드렸다. 사람들은 움찔하며 물러났다가 지네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안도하였다.

“비켜보게. 잠시만, 비켜주게.”

아지태의 손에 날아갔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소윤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왔다. 그는 쓰러진 지네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비틀거렸다.

“어서 오시지요, 소윤 어른.”

아지태가 웃으며 반겼으나 소윤은 공포와 경계로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네, 정체가 무엇인가?”

“무슨 말씀인지?”

“자네 아까 맨손으로 나를 잡아서 저만치 던졌어. 웬만한 장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거기다 저렇게 커다란 괴물을 단신으로 해치우다니…….”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답니까? 여러분이 그토록 골머리를 앓던 살인 사건을 마침내 해결하였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요. 바로 이놈이 그 살인귀였습니다. 몸집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인간을 기습하여 잡아먹고, 다른 지네들까지 끌어다 오늘 밤에 아주 끝장을 내려고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시신들이 그 모양이었던 까닭도 뼈와 가죽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다 녹여서 빨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아지태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두렵고도 역겨워 탄식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괴수가 죽었으니 모두 힘을 합쳐 사체를 치우고 마을을 재건하는 일만 남았군요. 이 사람의 역할은 끝났으니 이만……”

“어어, 저, 저!”

다급한 외침에 아지태는 뒤로 돌아섰다. 죽은 줄 알았던 지네가 다시 머리를 들고 일어나 턱을 쩍 벌렸다. 아지태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지네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철퇴를 내리찍었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땅이 울려 사람들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지네가 다시 쓰러진 뒤 아지태는 확실히 숨통을 끊으려 철퇴를 한 번 더 내리쳤다. 머리가 으깨어지고서야 지네는 비로소 숨이 끊어졌고, 몸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구렁이 만 한 크기가 되었다.

“질긴 놈. 곱게 좀 죽으면 안 되나?”

아지태는 짜증스럽게 철퇴를 닦았다.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아지태를 주목하였다. 아지태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들은 처음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경계와 두려움이 가시고 신뢰가 들어섰다. 그러나 소윤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아지태가 인간이 아님을 직감하였다.

“어, 어서 이곳을 떠나주게.”

소윤의 말을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윤 어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자는 우리 모두를 구해주었습니다. 마땅히 보답을……”

“저자는 사람이 아니야. 저, 저 지네와 다를 것 없는 괴물이라고! 언제 돌변해서 우리를 해치려 들지 몰라. 당장 쫓아내야 해!”

아지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쫓아낸다고? 무슨 수로? 저 괴수에게 겁을 집어먹고 손가락도 까딱 못 한 주제에 나를 쫓아내? 저놈을 누가 해치웠는지 벌써 잊었나?”

방금까지 온화하던 아지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굳자 소윤은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배은망덕한 놈. 네놈도 네 상관과 다르지 않구나.”

아지태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소윤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였다. 소윤은 갑자기 무례하게 돌변한 아지태에게 화를 낼 정신도 없이 종이를 펼쳐 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소윤의 손이 떨려 종이도 덩달아 파르르 떨렸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내용이길래…….”

소윤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촌주가 다가와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였다.

“이, 이럴 수가…… 이것은 대윤 어른의 사직서가 아닌가?”

촌주의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서원경의 최고 책임자인 대윤이 사직을 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들으셨소? 대윤이라는 작자는 사건을 해결하여 백성들을 구하고 살피기는커녕 책임을 회피하고 홀로 도망칠 궁리뿐이었소. 나라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가 말이오! 그래서 이 사람과 관군을 모두 산으로 보내고 관아에 남아 이 사직서를 쓰다가 괴수에게 잡아먹힌 것이오.”

아지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촌주들과 관군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야! 대윤께서 그리하실 리가 없다! 대윤께서는 분명 웅주 도독께 도움을 청하겠다고 하셨어! 이거, 이것은……”

이미 소윤의 해명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버림받았다고 여긴 사람들은 일제히 무너진 관아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사단이 일어날 듯한 기세였다. 관군들조차 대윤이 자신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병장기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소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무능한 조정의 비위를 맞추려 양식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서 저 혼자 살겠다고 괴물에게 잡아먹힌 죄 없는 백성들을 외면하다니. 이를 두고 인과응보라 하는 게지요. 그렇지 않소이까?”

“옳소! 옳소!”

아지태의 말에 주민들은 물론 촌주와 관군들까지 한목소리로 외쳤다. 비겁한 귀족으로 인하여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 서원경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직접 나서서 그들을 구해준 아지태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소윤은 자신이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실현되자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기어이 서원경의 민심마저 신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 빌어먹을 놈의 시체는 조각내버립시다!”

“그럽시다! 그놈의 남은 식솔들도 다 찾아서 없애버립시다! 살려둘 수야 없지!”

대윤이 이미 죽었는데도 사람들의 분노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넋이 나가 있던 소윤은 함성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분노에 사로잡혀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사람들을 홀로 막아섰다.

“모두 멈추지 못할까! 아무리 그래도 이미 돌아가신 분께 그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할 수는 없다! 관군은 어서 백성들을 해산시켜라!”

그러나 병사들은 소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군관들도 그들을 통솔하려 들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의 매서운 눈은 일제히 소윤에게로 향하였다. 그들에게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명을 듣지 못하였느냐! 어서, 어서 백성들을 해산시키라니까! 군관은 무얼 하느냐!”

“저놈도 죽여라! 대윤에게 빌붙어 먹고 살던 놈이다! 죽여라!”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어 소윤을 때려눕히고 발로 밟았다. 소윤은 비명도 못 지르고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았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머리가 터져서 의식이 흐려졌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소윤은 사람들 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개의 붉은 눈을 보았다. 아지태는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져서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