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크는 중 #2

#EP1. 혼자 시작한 여행 #강천섬 #굴업도

by rodit 로딧


KakaoTalk_20250115_174803884.jpg <굴업도 개머리언덕>




내가 지금 어디에 누워있는 거지?

딱딱한 천장 대신 카키색 텐트 천이 흔들리던 여주 강천섬에서의 어느 밤, (5년 전, 야영이 가능하던 시기였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할수록 흡사 헬리콥터 소리 같은 날벌레들의 날갯짓이 얇은 텐트 사이로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이게 무슨 재난 상황이냐고? 아니다. 그날은 나의 첫 번째 노숙이자, 내 인생을 바꿔놓은 백패킹 첫 번째 밤이었다. 하지만 나는 재난 상황에 내던져진 애송이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누가 나를 여주 강천섬에 홀로 떨어뜨렸냐고? 범인은 바로 나의 오기였다. 그때의 나는 사회생활 7년차 직장인이었으나, 정작 주변인들에게는 번듯한 성인이 아닌 불완전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미혼 여성인 동시에 독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불안정한 존재가 되는 현실이 답답증을 앓게 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 무언갈 혼자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백패킹이라는 신기한 여행문화(?)를 운명처럼 마주했다. 운명에 유튜브 알고리즘도 포함된다면 말이다. 또래의 젊은 여자가 홀로 1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고생스러운 여행길을 나서는 모습은 무언갈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나에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답안지 같았다. 이거다!. 나도 백패킹을 해내면 다른 누군가의 눈치도 보지 않고 좀 더 내 멋대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혼자서도 충분히 완전한 존재라고, 나 자신에게 소리칠 수 있는 길.


그 무렵은 아이들 수업 일정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시기였고, 그 덕에 시간이 필요한 백패킹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배낭 하나를 꾸렸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여주 강천섬으로 달려갔다.

오기와 혈기가 원동력이 됐을 때의 장점이 빠른 실행력이라면, 단점은 목표에 매몰돼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강천섬에 막 도착했을 때,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배낭을 멘 사람들이 반대 방향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고, 잔디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텐트를 철수하고 있었다. 그제야 당일이 일요일 오후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즐거웠던 주말을 마감하고 떠나려는 분위기에, 초짜인 나 홀로 남아 해가 지기 전에 텐트를 쳐야 하는 상황...


집에서 연습해본 덕분에 텐트를 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법 장엄한 카키색의 텐트를 완성하고, 침낭을 깔고, 테이블과 의자까지 펼쳐놓고 나니 여름날 긴 해도 저물고 있었다.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서둘러 랜턴을 켰다. 노을빛에서 사방이 칠흑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내 랜턴을 제외하곤 그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새까만 밤이었다. 도시의 빛에 익숙한 나에겐 난생처음 겪어보는 밤 풍경이었다. 그제야 이 넓은 잔디 광장에 나 홀로 남았구나, 실감이 났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얇은 천이지만 어찌 됐든 실내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텐트 문을 여는 순간 메뚜기 한 마리가 나보다 먼저 들어와 매쉬를 갉으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텐트 밖에선 풍뎅이 떼가 ‘부웅부웅’ 흡사 헬리콥터 소리를 내며 나를 위협해댔다. 그들을 내쫓고 살아보겠다고 랜턴을 모두 끄고 암흑 속에서 난리법석을 피운 끝에 겨우 텐트 안으로 나를 가뒀다. 해가 뜰 때까지 저 문을 열 수 없었다. 잠을 청하기엔 이른 시간이었고 맨정신으로 잠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지독하게 낯설고 두려운 환경이었다. 성공적인 백패킹 첫날밤을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한시라도 빠른 수면을 위해 가방 속에서 미리 챙겨온 사케를 꺼냈다. 우려했던 대로 사케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고 잠들기엔 취기가 부족했다. 결국 밤새 벌레들의 소리를 들으며 ‘이 밤은 지나갈 테고, 난 내일 집에 돌아갈 수 있겠지?’라고 의심하며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아침,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문이 아닌 지퍼를 열고, 버너와 드리퍼를 꺼냈다. 하룻밤을 무사히 보내고 아침 해를 감상하며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 이것이 나의 첫 백패킹에서 해내야 할 최종 퀘스트였다. 커피를 내리면서도 왠지 모를 생경함에 아침 풍경과 내 모습이 낯설었다. 허리를 굽혀 힘겹게 텐트 밖으로 나가본다. 간밤에 내려앉은 이슬을 털어내고 의자를 펴고 따뜻한 커피를 입에 머금는 순간, 밤잠을 설치게 만들던 모든 의심과 두려움이 녹아 없어졌다. 짜릿함이 온몸을 감쌌다. 비로소 이 여행의 모든 것을 홀로 해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나의 백패킹은 계속되겠구나. 또 다른 새로운 여행으로 이어지겠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고, 나는 고작 일주일 후 백패킹 3대 성지 굴업도로 향했다.

굴업도는 인천항에서 덕적도를 거쳐 또 한번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꽤 복잡한 여정을 거쳐야만 한다. 배를 두 번이나 타야 해서 일정과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까다롭고도 먼 곳이었다. 나 역시 두 번의 시도 끝에 굴업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백팩킹 3대 성지 중 하나라는 명성답게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무림 고수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내 옆을 지나쳤고, 배에서 만나 몇 마디 나눈 어린(?) 청년과 나는 앞서가는 고수님을 놓칠세라 눈치껏 걸음을 재촉했다. 굴업도 백패킹을 다녀왔다고 하면 단연 ‘개머리 언덕’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하는데 찾아가는 길을 잘 알아보지 않고 왔던 터라 불안한 참이었다. 나보다 훨씬 큰 배낭을 짊어진 고수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르시던지...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2~30분 정도 걸리는 마을까지 도달하는 길은 아주 쉽게 가는 방법이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섬마을 아버님들이 세워둔 트럭에 무작정 올라타면 마을까지 가게 된다고... 그러고 보니 나를 지나쳐 갔던 트럭과 짐칸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외지 사람들이 생각났다. 고수님은 알고도 걸어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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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머리 언덕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고 험했다. 박배낭을 짊어지고 8월의 뙤약볕을 직통으로 맞으며 걸어갔다.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발목까지 올라온 풀 속에서 메뚜가 때가 튀어 올라왔다. 마치 내 발걸음과 장단을 맞추듯이. 정말 더는 못 가겠다 싶을 때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온통 초록초록하고 파란 풍경이 가슴에 담겼다. 저 멀리 경계심 어린 눈빛의 사슴무리가 나무숲으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나와서 살펴보기를 반복했다. 사슴이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 그리고 고작 굴업도의 야생 사슴을 만나본 경험으로 야생을 알게 된 것 같은 느낌. 하하하. 그렇게 야생(?)을 이겨내고 드디어 개머리언덕에 도착했다. 평평하면서 시야가 좋고 다른 사람과 적당히 거리를 둔 알맞은 자리를 탐색했다. 바로 앞은 바다, 저 멀리 섬이 보이고 더 멀리는 끝이 없는 파란 세상이었다. 텐트 피칭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느지막이 한 어린 여자 한명이 개머리 언덕에 도착했다. 오, 이제 두 번째 백패킹인데, 처음 본 남자 두 명과 개머리 언덕에서 야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두려웠던 내게는 마치 구세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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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첫날, 가벼운 대화를 제외하곤 그 누구와의 교류도 없이 홀로 저녁을 먹었다. 뻔히 몇 미터 앞에 사람들이 있지만 우린 서로가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자신만의 고독을 즐겼다. 그날의 내 메뉴는 레토르트 반계탕이었다. 굴업도에 들어오려던 첫 번째 시도가 말복이었는데, 그때의 짐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한 주 정도 늦은 말복을 챙기고 주변을 둘러봤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언덕 아래,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어딘가 심심한 굴업도의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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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느지막이 눈을 떠보니 어제 함께 언덕을 올라왔던 남자 둘은 이미 텐트를 철수하고 돌아간지 오래였다. 그제야 텐트를 철수하던 여자애가 먼저 말을 걸었다.

“같이 내려가실래요?”

내려가는 길에 대화를 나눈 여자애는 고작 26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그 애에게 굴업도에서 덕적도로 나가면 바로 인천항으로 가지 않고 덕적도 해변에서 하룻밤을 보낼건데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 여자애는 흔쾌히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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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업도 여행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게 예상과 달랐다. 예상치 못하게 하룻밤이 늘어났고, 홀로 도망쳐 온 곳에서 친구를 얻었고, 기대하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하룻밤, 한 장소마다 나는 조금씩 무언가를 얻고, 배우고, 진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굴업도에서 만난 친구와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의 여행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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