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새벽 3시쯤에 사이렌이 울려서 계단으로 대피를 했다가 돌아 왔다. 역시 예멘에서 쏘아 올린 탄도 미사일이었다. 한국에서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하는데 도무지 어디에서 살아야, 미사일 소리를 안들을 수가 있을까?
2002년 1월 27일에 태어난 첫아들은 낳자마자 친정어머니가 도와주셔서 2002년 8월 15일까지 한국에서 육아 도움을 받았다. 친정 엄마와 친정 언니는 혼자 갓난아기와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이스라엘로 들어가야 하는 내가 너무 안쓰러워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 태진이를 8월 여름 방학 때 '이모 사수하기'짐꾼으로 함께 이스라엘로 보내주셨다.
공항에서 오고 갈 때 마다 우리 초 6학년 태진이는 나 대신 무거운 아기 유모차를 계속 밀고 끌어 주었고, 아이가 칭얼대면 바로 앞에서 아이를 얼른 다독여주는 완벽한 베이비시터였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는 이스라엘 이웃들은 조카 태진이가 내가 한국에서 낳은 친아들로 알고 있다. 슈퍼를 갈 때마다 무거운 슈퍼 카터를 밀며 나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동양인 아이를 그들은 단순하게 내 한국 아들로 제 멋대로 생각했다.
나는 일일이 "너의 큰아들은 이제 한국에 돌아갔니?" 안쓰럽게 쳐다보며 물어보는 이웃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응, 그래!"라고 대답해 버렸다.
남편은 월드컵 경기를 관람하며 한국에서 한 달여간 신혼 여행을 즐기다가 6월 달에 혼자 이스라엘로 귀국을 하였다.
이스라엘 Life Guard는 여름에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바다를 지켜야 한다. 2002년에는 핸드폰도 없었고, SNS도 없던 때이다. 우리는 국제 전화로 가끔 연락하며 사실 남처럼 지낸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엄마에게 아들을 맡기고 친구들을 매일 만나러 다녔다. 요리를 너무 못하는 것 같아, 올케와 함께 요리학원도 다녔다.
두 달을 따로 살다가 다시 이스라엘에서 아이와 조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조카는 삼주일동안 나를 도와주다가, 학교 개학 날자에 맞추어 한국으로 돌아갔다. 서로 육아에는 처음이라 아무 도움없이 하루 24시간 아기를 케어하는 것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특히 6시간 파트 타임이지만 회사도 다녀야해서 주말에는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도와 줄 친척들이 너무 멀리 있어서 혼자 외롭고 너무 피곤했다.
남편은 여름 시즌 근무에 지쳐있었고, 나는 이제 혼자 아이를 키워야 했다. 24시간 엄마 노릇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더욱이 남편은 여름 중 7월에서 9월은 시즌 중 제일 바쁜 때라 주말에는 월급의 200%를 더 받으며 9월 말까지 주말 근무를 해야 했다.
도와줄 친정 식구도 없고, 가까이 지내는 시댁 식구도 없었다. 홀로 일주일 내내 아이를 돌보는데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남편 얼굴을 꼴도 보기도 싫었다.
그러다가 하루에 6시간씩 만 일하면 되는 이스라엘 스타트업 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길 유아원을 찾아보자고 했다.
도저히 하루 24시간 육아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버는 돈을 모두 유아원에 내야 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네에 있던 유아원 3군데를 둘러보았고 내가 제일 깨끗해 보이는 Motti 유아원으로 등록을 하고 9개월이 된 아들을 아침 7시 30분부터 4시까지 유아원에 보내게 되었다.
회사에 출근을 하면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신다. 번역부서였던 우리 부서에는 12개 국어를 번역하는 세계 각국에서 오신 번역부 직원분들이 계신다. 12분 모두 나처럼 이스라엘 남자와 국제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시는 분들이다. 우리는 보통 9시에서 3시까지 일을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아침에도 남편이 7시에 바다로 출근을 하기 때문에 아침에도 내가 아이를 준비시켜 유아원에 맡기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회사로 운전을 15분 정도 하여 출근을 하고, 오후 4시가 되기 전에 아이를 찾으러 유아원에 가야 했다.
혼자서 집에서 자랐던 아들은 아픈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유아원에 보내자마자 코감기, 열감기에 일주일마다 매주 목요일 소아과 의사한테 진료를 받아야 했다.
닥터 Moshe는 아이에게 한 번도 항생제 약을 처방해 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모여있는 유아원에 가기 때문에 다른 아기에게서 옮는 바이러스니까 그냥 물만 많이 먹이고, 열이 심하면 미지근한 물에 목욕을 시키고, 열을 떨어뜨리는 Acamoll을 먹이라고만 했다.
아들을 1주일에 한 번씩 의사에게 데려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두 달 정도 이렇게 되면서 내가 회사를 관두어야 하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렇게 면역력을 키우면서 아이가 자란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혼자 머릿속으로 회사를 계속 다닐지 관두고 아이에게 집중해야 하는지 고민 중에 있었다. 함께 일하던 번역부서 엄마들이 큰소리로 절대 회사를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아이들은 아프면서 큰다고 자신들도 똑같은 경험들을 했단다. 아이가 6개월 정도 지나서 면역성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덜 아프게 된다고 했다.
그러다가 어린이 클리닉에 매주 목요일마다 예약하고, 약도 주지 않는 의사를 만나러 가는 게 지겹고 화가 날 무렵에 의외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 Kevin! 난 Tali라도 해! Dan이랑 같은 유아원에 다니는 Ariel 엄마야! 오늘 Dan 이를 우리 집에 초대해도 될까? 유아원이 끝날 때 내가 Dan이랑 Ariel을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 6시 반쯤 데리러 와! 괜찮겠니?"
"어, 고마워! 집주소를 알려줘! 내가 6시 반까지 데리러 갈게!"
이렇게 우리는 2003년 봄, 가족과 같은 친구가 되었다. Tali는 모로코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얼마나 마음이 깊고, 남을 선천적으로 돕고 사는지, 그녀의 옆에만 있어도 마음이 선해졌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지만 깊은 속마음으로 내 상황을 알아채고 항상 나를 도와주었다. 주말이 되면 혼자 아이와 있을 나를 생각해서 동물원, 공원, 키즈카페를 늘 같이 다녀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스라엘식 교육 방법을 그녀를 통해 체득했다.
내가 아는 이스라엘 엄마들은 아이에게 뭔가를 하라고 가이드하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뭔가 먹어야 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아이에게 물어서 아이가 결정하게 한다.
"배고프지? 뭐 먹고 싶니?"
아침에 유치원에 갈 때도,
"오늘은 뭐 입고 갈래?"
친구랑 놀 때도,
"친구랑, 뭐 하고 놀고 싶니?"
간식을 살 때도,
"뭐 먹고 싶니? 골라서 넣어!"
이스라엘 아이들은 말 문을 열기 전에 이미 많은 것들을 자신들이 생각해서 결정하게 된다. 부모들이 항상 "너는 무엇을 원하니?" 하며 끊임없이 질문하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때부터 "너 뭐할래" 하며 아기가 생각할 수 있도록 집요하게 생각하기를 시킨다.
아기가 울면, "울지 마! 시끄러워! 뚝!" 하는 대신에 " 왜 우니? 아기야! 마음이 상했니?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조금만 울고 나한테 얘기하렴! 뭐가 널 슬프게 했는지 생각하고 말해봐!"
1년에 한 달씩 아이를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 친정 엄마와 언니는 단이에게 뭘 계속 묻고 들어주는 나를 보고 답답해하셨다. 왜 자꾸 아이에게 물으면서 힘들게 사는 냐고 쓴소리를 하셨다. 그냥 내가 고르고, 내가 선택한 대로 먹이고 아이를 키우라고 하셨다.
"엄마, 이스라엘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묻고 아이가 결정하게 하는 게 정통 교육 하는 방법이에요"
"한국처럼 부모가 정한 대로 아이가 따라오지 않아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어요!"
"18살이 되면 여자, 남자 모두 군대를 가서 진짜 전쟁에 참전하게 되는데, 부모가 언제까지 대신 인생을 결정해 줄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후츠바 (Chutzpa) 정신이다. 의미로 뻔뻔함, 무례함, 담대함, 저돌성을 뜻한다.
이 말은 아주 어려서부터 형식과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이해될 때까지 질문하고 자신의 주장을 때로는 뻔뻔하게 펼치는 이스라엘의 도전 정신이다.
이 도전 정신은 아이가 아주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끊임없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법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아이들에게 이스라엘처럼 순간의 결정권을 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부모가 결정하여 아이들의미래가 부모님의 주관으로 결정되는 거 같다. 이스라엘에서 아이 둘을 키우면서, 또 직장을 다니면서 힘들어 지칠 때, 도와 줄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가고싶었지만 한국의 사교육을 포함한 교육체계에 거부감이 있어서 한국으로 이민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처럼 초등학생들을 위한 공부하는 학습 학원이 별로 없다. 단이와 샤니가 6살 때부터 다녔던 학원들은 공부와는 상관없는 즐겁게 몸으로 노는 Activity였다. 유도, 농구, 체조, 드럼 음악 학원, 축구, 도자기 만들기, 키즈 영어 학원이 우리 아이들이 다닌 방과 후 활동들이다.
단이는 군대를 제대하고 장기 남미 해외 여행을 마친 후에 대입 고사를 준비해 대학을 가겠다고 본인이 결정했다. 난 교육에 관련 된 학비 비용은 도와 줄 의향이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학비는 도와주겠지만, 학비 외의 생활비와 여행을 포함한 유흥비는 본인이 벌어서 소비해야한다.
현재 고3인 샤니는 내신 성적에 반영되는 바그루트(Bagrut) 시험을 보느라고 친구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올해 10월 16일에 군대 입대가 예정되어 있다.
샤니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의자에 계속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라고 한다. 자신은 대학에 들어갈 계획도 없단다. 이스라엘 하이테크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서 하루 9시간씩 일하지 않겠다고 한다. 대신 승무원, 네일 아트사등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되는 직업을 가지고 살 것이라고 말한다.
"케세라 쎄라!
언제까지 부모가 아이의 인생을 결정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나와 내 남편은 만 18살까지가 부모가 자식의 인생에 관여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Dan은 군대에 있는 동안 정통 유대인으로 개종을 하였다. 그리고 귀걸이를 했고, 한 쪽 팔에 3개의 작은 문신을 하였다. 물론 18살이 넘어 한 결정이었기에 우리의 승낙없이 본인의 의사대로 진행했다.
Shani는 벌써 우리의 승낙아래 고등학생일 때 귀에 3개의 귀걸이를 했다. 작년에 배꼽에 귀걸이를 하고 입술에도 귀걸이를 하고 싶다고 하길래 조용히 답변해 주었다.
"난 반대야, 네 귀한 몸 이곳 저곳에 침 꽂는 거 싫어! 정 하고 싶으면 너 18살이 지나고 나서, 그래도 그 때 하고 싶으면 해!"
" 엄마, 진짜 구식 Primitive해!!!"
"어, 나 구식이야! 근데 내 지붕아래에서 살려면, 내 방식을 따라야 해!"
" 엄마, 친구들은 다 했어, 정말 하면 안돼?"
" 너하고 싶은대로 할 거면 돈 벌어서 독립해! 독립하면 집 렌트비 2개월치는 내가 도와줄게. 독립해서 니 마음대로 살아!"
나는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서 평생을 결정해 주고, 또 자식이 꼭 부모가 원하는 데로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 18살이 지나면, 스스로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식의 결정을 들어줄 뿐이지 '감나라, 배나라' 유별나게 만 18살이 지나면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가정 교육의 핵심인 '후쭈바'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 넌 무엇을 원하니?"라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기어이 그 대답을 받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이스라엘 부모들의 인내심이다. 나 또한 이스라엘에 살면서 25년 동안 두 아이를 이스라엘식 인내심으로 키웠다. 올해 6월 15일이면 딸아이가 만 18살이 되니 더 이상 싸우면서 간섭할 이유가 없어진다.
아이는 만 18살이 지나면 자유롭게 훨훨 날면서 이제 본인이 선택한 크고 작은 결정들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멋진 성인이 될 것이다. 난 그저 옆에서 아이의 얘기를 들어주며 100% 동감해 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