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하기 한 달 전이었던 12월 23일 양수가 적어져서 태아가 움직이지 못하는 위험한 상황이되었고 바로 입원하게 되었다.
마침 입원을 한 날은 이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남편과 함께 이삿짐을 싸고 있는 중이었다.
접시 몇 개를 싸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이상해! 애기가 쿨렁거리지가 않아! 오늘 한 번도 움직이는 걸 못 느꼈어!
남편은 기겁을 하며 나를 산부인과에 데리고 갔고, 내 담당 산부인과 의사는 울트라 사운드를 해 보더니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진단서를 작성해 주었다.
난 병원에 입원을 했고, 남편은 혼자 이삿짐을 챙겨서 이사를 해야만 했다.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아침에 한번 오후에 한번 Ultra Sound 검사를 받았다. 난 어떤 고통도 없이 온몸이 멀쩡했다. 단지 이사를 못 돕고 누워만 있다는 게 남편한테 미안했다.
남편은 이삿짐을 혼자서 싸고 푸느라 오전에 닥터 미팅 때와 오후에 잠깐만 병원에 들렀다. 남편의 얼굴이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우리 아들은 태어나기 전에 내게 효도를 한 셈이다. 너무 불안해서 엄마에게 병원에 입원한 이유를 설명하니, 엄마가 전화기 속에서 우신 것 같았다. 엄마는 이틀 만에 준비를 하시고 바로 이스라엘에 들어오셨다.
60살의 체구가 적으신 우리 엄마는 영어도 못하시는데 당신의 딸을 위해 터키에서 환승까지 하시고 용감하게 이스라엘에 홀로 들어오셨다.
엄마와 남편이 같이 김치 만들기
2002년 이스라엘에서
엄마가 이스라엘에 도착하신 날짜가 2001년 12월 25일이었다. 나한테는 기적 같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엄마는 한국에서 꾸역꾸역 싸 오신 많은 재료들로 맛있는 삼시 세끼를 계속 준비해 주셨다.
집요하게 퇴원을 요청했고 물을 많이 마시고, 1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서 ultra sound 검사를 받기로 하고 새로 이사한 집으로 퇴원을 했다.
커다란 거실 창문이 푹 마음에 들었다. 더더욱 엄마와 같이 퇴원을 하여 잘 정돈된 새 집을 보니 너무 기분이 환타스틱 했다.
2002년 1월 26일 토요일. 제앙절개 출산 1일 전.
엄마와 남편과 나는 함께 텔아비브 해변을 산보를 하고 있었다. 걷기를 많이 하면 출산을 쉽게 한다고 해서 엄마와 남편 손을 붙잡고 걷기를 하였다. 내 배는 남산만큼이나 높고 무거웠다. 출산 예정일은 2월 초였다.
남편이 뜬금없이 나에게 낮은 저음으로 선포를 한다.
"이번주에 우리 형제들을 새 집에 집들이 초대를 해야겠어!"
"13형제를 초대한다고? 내 배를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오나?"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넌 그냥 앉아만 있어,음식은 Catering으로 주문할 거야! 네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이 사람아! 지금 제정신인가! 어떻게 앉아만 있어? 전부 다 오면, 부부 동반 30여 명은 족히 될 텐데... 손님상 세팅이며, 파티 끝나고 뒤처리는 어떻게 하려고! 혹시 당신 머리가 돈 거 아니야?"
길게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13형제의 막내로서 48살에 뒤늦게 결혼하여 첫아들 출산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 가족에게 자신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고 싶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주? 언제?" 내가 물었다.
남편은 내일 일요일에 날짜를 정하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은 산보를 끝내고 엄마에게 두부 전이 먹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다. 해변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는데도 집에 돌아오니 갑자기 노릇노릇한 두부 전을 간장에 찍어 먹고 싶었다.
두부 전을 맛있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엄마는 내가 두부 전을 먹는 모습과 배를 보면서 '쟤가 혹시 저러다 배가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셨다고 하신다.
밤 10시쯤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4시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는데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에 오줌이 줄줄줄 나왔다.
"엄마, 나 오줌 쌌어!"
엄마를 먼저 불렀다. 엄마는 주무시다가 내 목소리에 깨시더니,
"케븐아, 애기가 나오려나 보다! 양수가 터진 거 같아!"
우리는 준비해 놓은 출산 가방을 챙겨서 산부인과 응급실로 달려갔다.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던 이스라엘 최대의 종합병원이었다.
난 아기가 거꾸로 자리를 잡고 있어서 원래부터 제왕절개로 출산하기로 계획이 잡혀있었다.
"어제 몇 시에 마지막으로 식사를 했나요?"
"어젯밤 8시에 마지막으로 먹었어요"
"그럼, 지금 바로 제왕절개에 들어갑시다"
바로 수술실에 끌려들어 갔다. 오전 7시쯤이었다.
수술 준비가 끝나고, 내 배 중간에 커튼이 쳐진다.
"난 마취 담당 의사야! 전신마취를 할래? 아니 아래쪽만 마취를 할래?
"아래쪽만 마취할래"
"오케이"
"근데 우리 남편은 어디 있어? 출산할 때 같이 있기로 약속했는데..."
"이곳에 남편은 들어올 수는 없는데... 우리가 널 잘 돌봐 줄 거야. 걱정하지 마"
순간적으로 왕 소름이 확 돌았다. 혼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몰아쳤다.
"니 손이라도 수술 동안 잡고 있으면 안 될까? 나 너무 무서워!"
난감한 표정을 짓는 마취 의사, 아직 수술 전이었다.
의사는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밖으로 나갔다.
난 웅성거리는 주변 의료진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꺄륵거리고 있었다. 수술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기가 막히게 남편이 수술실로 들어왔다. 남편의 손을 잡고 떨고 있는데 잠시 후 아래쪽에서 칼 가는 소리가 들리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아기를 보고 울기 시작했고 난 아기가 무사하고 정상적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온몸에 있던 스트레스 근육이 다 풀어졌다. 남편은 애기와 함께 나가고, 나는 밖에서 혼자 계실 엄마를 생각하며 회복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나의 하반신 마취는 8시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다. 옆자리에 들어오는 엄마들은 한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 바뀌는데 나만 계속 왼쪽 다리가 마취가 안 풀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실 엄마 걱정에 더 미칠 것만 같았다. 남편이라도 엄마한테 잘 설명해 드려야 엄마가 괜찮을 텐데...
"케븐, 너 어디 있어? 너 여기 있니? 케븐??"
바깥 복도에서 남편의 고함이 들려온다.
"나 여기 있어!" 답변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안 나온다.
"엄마, 나 괜찮아, 곧 나갈 거야!" 소리를 치고 싶은데 말을 할 수가 없다.
한참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마취하고 8시간 만에 왼쪽 다리까지 마취가 풀리고 입원실로 옮길 수 있었다. 다시 엄마를 만나보니 어찌나 감동적이고 좋았는지 새로 태어난 애기는 볼 겨를이 없었다. 수술한 자리는 욱신 거리고, 온 얼굴이 퉁퉁 불어 있었다. 병원에서는 내게 1인 병실을 내주었고 우리 엄마에게 이동식 침대까지 주셨다. 엄마도 지극정성으로 나를 간호해 주셨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는데도 요령껏 우리 집에서 병원까지 오는 길을 찾아내어 하루 두 끼씩 미역국과 반찬을 만들어 오셨다. 애기를 모유 수유하는데 처음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엄마는 왜 힘들게 모유 수유를 하나며 그냥 분유를 먹이라고 하실 정도로 내 걱정만 하셨다.
피부가 예민했던 나는 수술자리에 염증이 생겨서 한 달 동안 통원 치료를 하여야 했다. 아들은 황달 수치가 너무 높아서 일주일을 더 신생아실에서 경과를 지켜본 후에 아시안인 아이들은 원래 황달수치가 높다며 퇴원이 되었다.
인간관계가 넓은 남편은 아들의 <브리트 밀라 > 파티를 성대하게 열었다. 사실 엄마가 유대인이 아니면 그 아이들도 유대인이 아니라서 <브리트 밀라> 파티를 못하게 되어있다.
브리트 밀라는 유대교 율법에 따라 출생 후 8일 안에 할례를 받는 행사를 말한다. 남편은 유통성 있는 라비에게 돈을 지불하고 종교적인 Blessing 은 제외하고 할례식을 열어서 모든 가족들과 친구들을 불러서 성대하게 파티를 하였다.
엄마는 2001년 12월 25일 날 이스라엘에 들어오셔서 나와 아기를 돌봐 주시다가 2002년 3월 25일 날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아들의 예방 접종을 마치고 2002년 5월 31일 월드컵 개막식에 맞추어 남편과 함께 한국에 들어갔다.
축구를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우리 가족은 월드컵 게임 일정에 맞추어 한국의 여러 도시를 함께 여행했다. 한국에서 간단하게 웨딩포토를 찍기도 했다. 무엇이든 잘 먹던 남편은 지금도 수원에서 먹었던 소주와 삼겹살이 그립다고 말한다. 난 자장면을 좋아하고 남편은 해물짬뽕을 좋아했다.
문득 지금의 남편이 우연찮게 한국 여자를 만나고,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나한테 호감이 확 생긴 게 아닌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우리에겐 서로의 첫 아이를 가지며 질기고 질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세워졌다.
아이의 탄생으로 가족이라는 강렬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었다. 가족으로 함께 살기 위하여 한순간 한순간 많이 노력했다. 25년이 지난 지금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작은 전투에서 이긴 승리의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고, 남편은 같이 전투에 참가한 동지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