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해변에 있던 Ben & Jerry 아이스크림 가게 의자였다. 서로 자기소개를 했고 남편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며 텔아비브에 오면 언제든지 자기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다.
남편은 텔아비브 해변의 Life Guard였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초대를 해준 M 언니와 함께 북쪽 나하리아에 1주일쯤 더 머물다가 다시 1월에 런던으로 돌아갔다. 남편에게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런던에서 다니던 college는 등록금을 포기하고 3개월 만에 자퇴를 하였다. 30살이었던 내가 20살의 business management 학과의 학생들과 그룹 report를 제출하느라고 매일 같이 만나서 정해준 책을 읽고 논문들을 찾아서 연구하는데 서로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그들은 너무 어린 철딱서니가 없는 소녀들이었고, 나는 첫 report에 목숨을 걸었던 이방인이었다.
그룹 친구들은 남자랑 노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는 철부지 아랍계 여학생들이었다. 한 여자애가 나한테 자기 오빠를 소개해준다고 하더니, 급기야 자기 오빠가 나를 무척 좋아할 거 란다. 내가 동양 여자이기 때문이란다. 오빠는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고, 내가 세 번째 부인이 될 거라고 하는데 망치로 머리를 갈겨 맞은 기분이었다.
머리채를 흔들어 놓아서라도 그것들의 정신을 바로 잡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학과장에게 상담을 신청해서 그룹과제를 할 상황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휴학을 했다. 건강상의 문제라고 거짓말을 했다.
학교에는 휴학계를 제출했지만, 나는 이미 이 학교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Advanced Business English 학원에 등록을 했고, 이곳에서는 20-30대 중반의 나와 같은 외국인으로서 제2외국어 영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학급 분위기도 좋았고, 담임 선생님도 무척 정중하고 책임감이 있으셨다.
나는 2000년 6월 Oxford Advanced Level 시험에 통과를 했고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지, 런던 다른 학교에 등록을 해야 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한국을 1999년 9월에 떠났으니까 이제 거의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족들은 내가 한국에 돌아올 거라고 기대를 하셨지만, 난 절대로 한국에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일단 런던 영어학원에 9월 개강 등록 신청을 해 놓고 다시 이스라엘로 여름 방학이 되자마자 3개월 일정으로 M 언니 집을 방문했다.
3개월을 북쪽 이스라엘에서 언니와 함께 지내다, 결국 너무 심심해서 텔아비브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친구 Laura를 만나러 혼자 남쪽 하르쯜리아에 내려왔는데 갑자기 남편이 몇 달 전 적어준 전화번호가 생각났다.
그렇게 내가 먼저 전화를 해서 우린 다시 해변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 후로 몇 번 더 만나다가 연애를 하게 되었다.
9월이 되어 런던으로 돌아가서 한 학기를 마치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무심하게 다음과 같이 내게 말했다.
"나한테 다시 돌아오겠다고 트렁크를 맡기고 돌아오지 않는 외국 여자들 짐이 한 트럭이야!"
"What!! 한 트럭?"
"떨어져서 먼 곳에서 살게 되면 마음도 쉽게, 상황에 맞게 변하게 돼!"
"So, 어떡하라고"
"내 생각에 지금 런던으로 네가 돌아간다면 안 돌아 올 확률이 높아!"
"Really? 미치겠군"
"영국 영어 학원 대신, 이스라엘 Ulpan에서 히브리어를 배워 봐. 그러고 나서 네 미래를 정해 보는 게 좋겠다!"
"Oh my gosh! 어쩌나!"
나는 이틀을 고민했고, 결국 영국 비행기 티켓 날짜를 10월로 연장하고, 이스라엘 히브리어 Ulpan에 3개월 등록을 하였다.
아침 8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오전반, 그리고 저녁 5시 30분부터 8시 45분까지 오후반에 등록하여 피나게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10년이 넘게 걸린 영어 공부보다 훨씬 쉽게 히브리어 공부가 진행되었다.
남편은 나에게 히브리어로 만 대화를 나누었고, 난 하루 8시간씩 히브리어로 쓰고, 히브리어로 된 신문을 읽었다.
기적스럽게 2개월이 지나가자, 거리의 히브리어가 귀에 들어왔다. 히브리어로 쓰는 것은 아직 어려웠지만, 히브리어로 된 거리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난 히브리어의 습득에 용기를 얻어 런던 학교를 정리하고 히브리어 Ulpan을 3개월 더 수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0월에 있었던 이스라엘 명절 방학 기간 동안 런던에 들어가서 가지고 있었던 짐을 대충 다 버릴 것은 버리고, 최소한으로 챙겨서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같이 지냈던 Ester 할머니에게 내 남편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남편과의 동거를 시작했다.
같이 사귀는 것과 같이 사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난 32살, 남편은 48살이었다. 남편은 13형제 중의 막내였다. 나이만 들었지 그 동거 생활에는 둘 다 경험이 부족했다.
같이 살면서 서로 너무 달라서 티격태격하며 살았다. 그럭저럭 서로 양보하면서 별 기대 없이 같이 살았고,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내가 이스라엘에서 낳겠다고 결정을 하자, 남편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 같다.
"네가 결정한 대로 최대한 Support를 할게. 너의 결정을 100% 존중해"
"그래서 뭘 어쩔 건데?"
"아이를 낳으려면 산부인과를 가야 해. 그러려면 우리는 결혼을 해야 하고, 혼인 신고서가 있어야, 이스라엘 체류 비자도 받을 수 있고 이스라엘 국가 의료 보험에 가입을 할 수 있어!"
"결혼? 세상에 내가 결혼을?"
나는 다시 2-3일을 고민하다 남편과 결혼신고식을 한국 대사관에서 하기로 했다.
결국 8월 26일 한국 대사관에서 결혼식을 했고, 바로 이스라엘 외무부에 비자 신청을 하였다. 비자 신청을 하자마자, 남편이 알고 지내던 이스라엘 국회의원을 같이 찾아가 임신 사정을 설명해 드리고 외무부에 핫라인을 부탁드렸다. 그 국회의원은 바로 우리 앞에서 팩스를 예루살렘의 외무부에 보내주셨다. 이 덕분인지 2달 만에 이스라엘에 체류 비자가 나오고 난 이스라엘 산부인과에 등록이 되었고 정기적으로 무료 검사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한숨을 돌리고 나자, 어느 날 남편이 같이 갈 데가 있다고 나에게 외출을 요청했다.
남편의 고향인 아쉬켈론에서 있는 아브너의 변호사를 만나 혼전 계약서 Prenup을 작성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일단 내용을 작성을 해 났으니까, 네가 사인을 할지 안 할지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내 변호사가 너한테 나의 혼전 계약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줄 거야"
혼전 계약서의 주요 내용은 남편이 가지고 있던 우리 결혼 전의 남편 재산은 우리 이혼할 때 재산 분배 요청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만약 이혼을 하게 된다면 아이의 양육비와 생활비까지를 무조건 남편이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나의 논리로는 납득이 가는 내용이었다. 난 나 자신을 이스라엘에서 남녀 평등하게 사회생활을 하며 경제적으로 독립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운 좋게 비자를 받고 나자마자 이스라엘 하이테크 스타트업 회사의 번역팀에 취직이 되었다. 30명으로 시작된 이 회사는 700명까지 직원이 늘어나며 성공가도를 달렸고, 회사 상장을 런던에 하며, 난 회사 주식을 무료로 받기까지 했다. 이 회사는 매해마다 부서를 바꾸어 근무하며 12년을 다녔다.
난 지금도 이 혼전 계약서에 서명을 한 내가 자랑스럽다. 이렇게 당당하게 시작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더 치열하게 살아냈다.
24년 동안 남편과 살면서 경제적으로 대등하게 살았다. 우린 지금도 서로 각자의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 각자의 월급이 사실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고 살았다. 남편은 정년퇴직을 하고 현재 공무원 연금을 받고 있다. 나는 조울증과 관련된 연금을 받고 있다. 의식주에 관련된 생활비의 80%는 남편이 부담한다. 나는 교육비와 아이들의 한 달 용돈을 주로 부담한다. 같이 가족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총비용을 계산하여 정확히 반반씩 부담한다.
24년 전에 나는 혼전 계약서에 서명을 해서 남편에게 더 당당하게 대등한 위치로 살 수 있었다. 아이들을 동등하게 육아할 수 있도록 일주일 스케줄을 조리 있게 만들며 열심히 직장을 다녔다. 주변에서 괜찮아 보이는 Babysitter Yael를 알게 되어, 이 친구에게 아이들 숙제 검사를 부탁했다.
이스라엘에서 아무 도움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많이 힘들다. 나는 나의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제 글을 읽으시는 여성 여러분 결혼을 하시면 경제권을 꼭 챙기세요. 결혼과 동시에 100% 남편에게 경제권을 넘겨주면 나중에 외롭고 허망하답니다. 육아와 집안 살림하는 것도 엄연한 노동입니다. 꼭 노동의 권리를 주장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