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의 의미
우리의 고전 ‘심청전’을 들여다보겠습니다. 80여 종의 이본이 있을 정도로 조선 후기에 널리 읽힌 베스트셀러지요. 아버지의 개안(開眼)을 위해 남경 상인에게 팔려 인당수로 갈 때 독자들도 심청에게 감정이입하여 함께 갔고, 황후가 되어 아버지를 만날 때도 독자들은 심청이 되었습니다. 울고 웃고 독자들은 심청과 한 몸이 되었지요. 그러나 저는 인물끼리의 주고받는 거래는 왠지 부당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심청전’은 한편으로는 현실 세계의 관점으로 한편으로는 설화의 세계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심청전’은 여러 설화가 결합된 것이기도 하니까요. 지금이야 인권과 생명이 최상위의 가치이니 인당수라는 설정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효행에 감동한 호랑이가 효자를 태워 백여 리나 떨어진 곳까지 태워 철 아닌 홍시를 얻어 올 수도 있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희생시킬 수도 있는 것이 가능한 설화의 세계에서 인당수의 설정은 개연성 있는 장치이지요.
이정원 교수의 『전(傳)을 범하다』를 참고하여 인물 간의 거래를 따져 보겠습니다. 물론 설화적 관점입니다. 몽은사 화주승과 심학규의 거래는 수긍이 됩니다. 화주승은 공양미 300석을 얻고 심학규는 눈을 뜰 수 있으니까요. 남경 선인도 풍랑을 피하는 대가로 삼백석은 충분히 지불 가능한 금액이죠. 장사를 통해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눈을 얻지만 딸이 얻는 것은 효녀라는 평가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심청이가 제일 억울하다는 것은 압니다. 효(孝)라는 가치에 눌려 말을 못할 뿐이지요. 이런 심청이를 위로하고 배려할 수는 없을까요? 김종삼 시인(1921년~1984년)은 ‘술래잡기’를 통해서 심청이를 위로합니다.
심청일 웃겨 보자고 시작한 것이
술래잡기였다.
꿈속에서도 언제나 외로웠던 심청인
오랜만에 제 또래의 애들과
뜀박질을 하였다.
붙잡혔다.
술래가 되었다.
얼마 후 심청은
눈가리개 헝겊을 맨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술래잡기하던 애들은 안됐다는 듯
심청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김종삼, ‘술래잡기’
심청은 인당수에 가기 전에도 아버지를 봉양하느라 친구들과 어울려 마음껏 놀지 못합니다. 너무나 외롭습니다. 이런 심청을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심청과 놀아줍니다. 친구들의 배려가 고맙습니다. 술래가 되고 눈을 가립니다. 아버지를 봉양한다고 했지만 막상 눈을 가리니 아버지의 처지가 체감되고 새삼 연민의 감정이 밀려옵니다. 놀이가 현실이 되어 그 자리에 얼어붙습니다. 친구들은 이것마저 위로해 줍니다. 놀이의 시간에도 아버지의 처지를 생각하는 심청도 애틋하지만, 심청의 처지를 겹으로 위로해 주는 친구들의 배려가 눈물겹습니다.
저는 고향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고향에서 대구까지는 비포장도로로 한 시간 반, 포장도로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제 고향 면소재지가 버스 출발지이기 때문에 거의 자리에 앉아 갑니다. 한번은 자리에 앉아 가는데 잠결에 누가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실눈을 떠보니 어떤 여학생이 고통스러운 듯 배를 잡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자리를 양보해야 되겠다는 마음은 있으나 ‘이때까지 양보하지 않고 왜 이제야 양보하느냐’는 주위의 질책이 겁나 내쳐 자는 척해야 했습니다. 멀미 때문인지 복통 때문인지 대구까지 그 여학생의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가 밟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은 눈을 감고 있어도 감지가 되었습니다. 대구까지의 거리가 그날만큼 멀게 느껴진 날이 없었습니다.
만원 버스에서 아이가 웁니다. 엄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이를 달랩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이때 한 아저씨가 ‘아줌마! 아기 좀 달래세요.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있나’라고 한 아저씨를 남의 사정을 참 헤아릴 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 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학생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지 못한 그날 이후 저는 이런 아저씨를 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아저씨가 되었기 때문이죠.
저는 요즈음도 지하철을 타면 웬만해서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이 어색한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생색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강원국 작가(1962년~ )의 『나는 말하듯이 쓴다』의 한 대목이 확 공감이 됩니다.
“도착역이 가까워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내 자리에 앉게 된 어르신이 연신 고맙다고 하셨다. 잠시 후에는 저쪽에 자리가 비었으니 어서 가서 앉으라고 큰 소리로 알려주셨다. 주변 사람들이 앉지 못하고 나를 보고 있어서 지하철에서 내리는 것을 포기한 채 그 자리에 앉아 두 정거장을 더 가야 했다.”
자리 양보를 훨씬 넘어서는,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을 이기철 시인의 ‘자주 한 생각’이란 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새로 닦은 땅이 되어서
집 없는 사람의 집터가 될 수 있다면
내가 빗방울이 되어서
목 타는 밭의 살을 적시는 여울물로 흐를 수 있다면
내가 바지랑대가 되어서
지친 잠자리의 날개를 쉬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음악이 되어서
슬픈 사람의 가슴을 적시는 눈물이 될 수 있다면
아, 내가 뉘 집 창고에 과일로 쌓여서
향기로운 술이 될 수 있다면
-이기철, ‘자주 한 생각’
자리 양보가 문제가 아닙니다. 집터가 되어 누군가 그 위에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겁니다. 빗방울이 되어 가뭄에 지친 풀들의 생명을 살리고 싶다는 겁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처가 되고 싶고 안식처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기껏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배려로 생각했는데 이 시인은 집터를 내어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배려라고 봅니다. 시인의 안목과 품이 이렇게 넓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모이면 저절로 웃음꽃이 피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