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뜻의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이지만 지금은 종교를 떠나 일반 명사로도 쓰입니다. 어떤 대상이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더럽게도 깨끗하게도 보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덕규 시인의 <허공>이라는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자라면서 기댈 곳이
허공밖에 없는 나무들은
믿는 구석이 오직 허공뿐인 나무들은
어느 한쪽으로 가만히 기운 나무들은
끝내 기운 쪽으로
쿵, 쓰러지고야 마는 나무들은
기억한다 일생
기대 살던 당신의 그 든든한 어깨를
당신이 떠날까봐,
조바심으로 오그라들던 그 뭉툭한 발가락을
-이덕규, <허공>
나무가 마음 놓고 자랄 수 있는 것은 허공을 허공으로 생각하지 않고 허공을 자신을 지탱하게 해 주는 버팀목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허공을 텅빈 공간으로 생각했다면 수십 미터 높이까지 자랄 수 없었겠지요. 나무가 허공을 허공으로 생각하는 순간 나무는 기댈 곳이 없다는 조바심으로 뿌리들이 오그라들어 마침내 쿵 쓰러지고 맙니다.
허공을 버팀목으로 인식하는 그 믿음이, 세찬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그 믿음이 나무를 허공에도 기댈 수 있는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연약한 풀잎도, 키만 멀쑥한 갈대도 허공에 기대고 살고 있습니다. 새들도 별들도 둥근 달도,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구도 허공이라는 튼튼한 비팀목을 어깨로 여기고 그 어깨에 기대고 살고 있습니다. 허공을 버팀목으로 생각하는 마음가짐, 부정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는 ‘기본적 귀인 오류’의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언행이 남에게 어떤 피해를 줄 것인지를 살펴서 자신의 언행을 결정해야 합니다. 공자는 세 번 생각한 후 말하고 행동하라고 했습니다.
공자가 제자(弟子)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군주를 만나기 위해 주유천하할 때, 송(宋)나라 광(匡)이란 곳을 지나다가 뽕을 따는 여인을 보게 됩니다. 여인이 박색(薄色)이라 지나가는 말로 ‘정말 못생겼군’ 하고 한마디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여인은 내색하지 않고, 뒤따르던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에게 어려운 일을 당하면 찾아오라고 합니다. 얼마쯤 가다가 공자는 광(匡) 땅 사람들에게 폭정을 한 ‘양호(陽虎)’라는 사람으로 오인을 받아 구금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공(子貢)이 나서서 이분은 양호가 아니라 성인(聖人)이신 공자님이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공자님이라고 하니 그 정도의 성인이라면 성인의 능력을 보이시라’고 하면서 아홉 구비로 구멍이 난 구슬 한 개를 주며 그 속에 실을 꿰어보라고 요구합니다.
구곡주(九曲珠)라 아무리 해도 실을 꿸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다급한 상황에서 자로(子路)는 박색의 여인을 찾아갑니다. 그 여인은 ‘蜜(꿀밀) 蟻(개미의) 絲(실사)’ 세 글자를 적어 자로에게 줍니다. 공자가 보더니 ‘꿀과 개미와 명주실’을 구해 오라고 일렀습니다. 아홉 구비로 굽은 구멍에 꿀물을 부어넣고 개미의 허리에 명주실을 매어 한쪽 구멍으로 개미를 밀어 넣었더니 반대편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그 여인 덕분에 공자는 낭패를 면했습니다. 공자는 이 일을 겪고난 뒤 제자들에게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라’는 ‘삼사일언(三思一言)’과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행동하라’는 ‘삼사일행(三思一行)’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뽕을 따는 여인이 절색이든 박색이든 공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박색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언어는 파편이 되어 그 여인의 가슴에 박히게 되고 그 여인의 행복을 앗아가게 됩니다. 서로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오해의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부정적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그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기보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반구저신(反求諸身)’의 자세 또한 서로를 행복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중용(中庸)』 14장은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군자(君子)의 자세를 활쏘기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자왈 사유사호군자 실저정곡 반구저기신) -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활쏘기는 군자의 태도와 비슷함이 있으니, 그 정곡을 맞히지 못하면 돌이켜 그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났을 때 소인은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군자는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소인은 활이나 화살을 탓할 수도 있고, 바람을 탓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군자는 자기 자신의 수양 부족에서 찾는다는 것이죠. 군자에게 활이나 화살, 바람과 같은 외부 요인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지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게 한 이유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명종이 울리지 않아 지각을 했다는 것은 소인의 자세입니다. 자명종이 울리지 않아도 그 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내공을 쌓는 것이 군자의 자세입니다. 우리의 삶 전부를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쌓아야 할 수양은 끝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허향숙 시인은 사소한 돌멩이 하나에서 ‘반구저신(反求諸身)’의 자세를 들춰냅니다.
산길 가는데
돌멩이가 발을 걸어 왔다
넘어질 뻔한 나는 돌멩이를 걷어차다가
그만 울컥, 했다
어쩌면 저 돌멩이는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일지도
서툰 마음을 불쑥 내밀었는지도
너도 그랬어
사랑한다는 말 대신
독한 말로 나를 넘어뜨리곤 했었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원망하며 떠나온 나
차인 돌멩이를 제 자리에 놓아 주고
비탈진 산길을 오른다
-허향숙, ‘돌멩이’
산길을 걸어갑니다. 돌멩이가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합니다. 화가 나서 돌멩이를 냅다 걷어찹니다. 넘어질 뻔한 것은 내 탓이지 저 돌멩이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솟아오릅니다. 어쩌면 돌멩이는 자신에게 발을 건 것이 아니라 말을 건 것인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말을 걸고 싶었는데 서툴러서 발을 건 셈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너’를 생각하게 됩니다.
‘너’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서툴러서 다른 말을 합니다. ‘나’는 그 다른 말을 독한 말로 오해를 합니다. 헤어지고 싶어서 독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너’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가득 안고 떠나왔습니다. 그러나 돌멩이가 발을 건 것이 아니라 말을 건 것임을 몰랐듯이 ‘너’가 사랑 고백에 서툴러서 다른 말을 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습니다.
돌멩이 탓이 아니라,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네 탓이라고 생각했을 때 비탈길이었던 산길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평평한 길이 됨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스포츠도, 공부도, 취업도, 선거도, 승부(勝負)가 있고 합불(合不)이 있습니다. 승부가 있는 우리의 삶에서 패배의 원인을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고 잘못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은 경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성의 목소리가 벌써 2,500년 전에 나왔다는 것은 ‘반구저신(反求諸身)’이야말로 시대를 넘어 간직해야 할 행복의 전도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에 “不恨自家汲繩短 只恨他家苦井深 [(불한자가급승단 지한타가고정심) -자기의 두레박 줄이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 깊은 것만 탓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물은 깊을수록 물은 더 깨끗하고 맛있게 마련입니다. 우물이 깊으면 자신의 두레박 줄을 길게 하여 물을 길으면 됩니다. 우물이 깊으면 우물을 깊게 판 사람의 노고를 높이 평가할 일이지 누가 이렇게 깊이 팠냐고 따질 일은 아닙니다. 깊은 우물의 깨끗하고 맛있는 물을 먹기 위해서 두레박 줄을 길게 하는 수고로움 정도는 내 몫으로 해야 되지 않겠는지요. 이런 마음이야말로 모두를 행복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림 : 박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