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문학 이야기꾼 Oct 01. 2024

<기본적 귀인 오류>의 문학적 사례들

 오정희 작가의 <소음 공해>라는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심신 장애인 시설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화자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즐기려는 순간 위층에서 ‘드르륵드르륵’하는 소음 때문에 기분을 망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경비원을 통해서 이야기해도, 인터폰으로 직접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남을 위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다고 위층 사람의 인성을 최악으로 판단한 아래층 화자는 그래도 자신의 교양을 지키기 위해 슬리퍼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누릅니다. 한참 뒤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위층 여자를 보는 순간 아래층 화자는 자원봉사자, 교양, 슬리퍼를 숨기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래층 화자는 위층 소음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았는지요? 위층 주인의 인성으로 보았습니다. 공동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을 모른다든지, 배려심이 부족하다든지 하는 등 위층 주인의 바르지 못한 인성을 소음의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 방법으로 실내 슬리퍼를 선물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발소리를 죽이는 푹신한 슬리퍼를 선물함으로써 소리를 죽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소리 때문에 고통받는 자신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사려 깊고 양식 있는 이웃으로서 공동 생활의 규범에 대해 조곤조곤 타이르리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최대한 교양을 갖추면서 벨을 누릅니다. 휠체어를 탄 위층 사람이 문을 열어줍니다. 순간 장애인 자원봉사자로서 이웃에 대한 무관심, 신을 수 없는 슬리퍼를 선물로 준비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옵니다.

  아래층 화자가 소음의 원인을 위층 여자의 인성으로 보지 않고, 위층 여자가 처한 상황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그런 부끄러움은 없었을 테고, 자원봉사자로서의 자부심도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아래층 화자는 위층의 소음에서 휠체어의 바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의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김종삼 시인(1921~1984)의 ‘민간인(民間人)’이란 시도 기본적 귀인 오류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孀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민간인(民間人)’     


  1945년, 독립을 이루었지만 분단이 시작되었습니다. 1947년은 이남에서 이북으로, 이북에서 이남으로 왕래는 금지되었지만, ‘광장(최인훈 저)’의 주인공 ‘이명준’이 월북한 것처럼, 비밀스럽게, 위험을 무릅쓰고 남북의 경계선을 오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 바다로 배를 타고 움직이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황해도 해주’로 보아 이북에서 이남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습니다. 노 젓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바다입니다. 순간 갓난아이가 울기 시작합니다. 감시병에게 발각되면 모두가 무사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 갓난아이를 죽여야 합니다. 엄마가 안고 있는 ‘영아’를 누군가 빼앗아 바다에 던집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영아를 죽인 이데올로기의 깊이를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에서 승자는 전쟁이란 이름으로 용서 아닌 용서가 됩니다. 오히려 많이 죽일수록 영웅으로 대접받는 역설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민간인(民間人)이 남을 죽이면 살인이죠. 더구나 ‘영아’를 죽이는 일은 흉악에 흉악을 더하는 일입니다. ‘영아’는 이데올로기를 모릅니다. 이데올로기를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살기 위해 우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아무 잘못도, 아무 선택권도 없는 영아를 왜 바다에 던졌을까요? 바다에 던진 사람의 인성이 악독해서이겠는지요? 아닙니다. 인성이 악독해서라기보다 몰래 남북의 경계선을 넘어가다가 적발되면 배를 탄 사람들이 몰살당한다는 상황이 그 어린아이를 바다로 밀어넣은 것입니다. 물론 시인은 바다가 영아를 삼킨 이유를 밝히지 않았기에 귀인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시인은 이데올로기의 깊이가 지금도 영아를 삼킬 수 있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시인의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이데올로기라는 상황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박완서 작가의 <오해>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습니다. 단독 주택에 사는 화자는 집 앞에 내다놓으면 환경미화원이 수거해가는 쓰레기봉투에 신경을 씁니다. 쓰레기 봉투에 자신의 깔끔한 성격이 투영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닭 뼈나 생선 뼈가 쓰레기봉투 안에 들어 있으면 도둑고양이가 헤집어 놓는 통에 깔끔하지 못한 성격으로 소문이라도 나는 게 싫어 닭 뼈와 생선 뼈는 따로 접시에 담아 고양이에게 제공하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고양이만을 위한 생선조림을 만들어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양이가 고마워한다고 생각하면서 음식을 제공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름이 끝나갈 어느날 그 고양이가 털이 반지르르 윤이 흐르는 새끼 다섯 마리를 거느리고 뒤꼍에 산책을 나왔습니다. 화자는 반가운 마음에 환대의 표시로 고양이에게로 다가갑니다. 순간 어미 고양이는 으르릉거리며 공격 태세로 적의를 드러냅니다. 화자는 놀라 얼른 부엌문을 닿아버립니다.

  왜 고양이는 화자에게 적의를 드러내며 공격의 태세를 취했을까요? 공격 태세를 취한 원인을 그동안 먹이를 제공한 화자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고양이의 인성에서 찾는다면 바로 ‘기본적 귀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다행히 화자는 새끼를 보호해야 하는 어미 고양이의 상황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런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고양이의 행동을 고양이의 인성으로 평가하지 않고 고양이가 처한 상황으로 평가하듯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의 원인을 인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들이 처한 상황으로 판단하면 이런 오류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지요.  

   

  『채근담(菜根譚)』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줄여서 ‘춘풍추상(春風秋霜)’이라고 합니다. 이는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잘못은 인격 수양의 부족으로, 남의 잘못은 상황 때문으로 여기라는 이야기인데 이 또한 ‘귀인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전 07화 기본적 귀인 오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