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문학 이야기꾼 Sep 17. 2024

행복을 위한 <허구적 합의 효과>

이영광, <우물>

  행복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에서 옵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은 줄 알았지.’, ‘너도 나와 생각이 같은 줄 알았지.’와 같은 말로 자신의 언행을 합리화하는 것은 상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상대의 행복을 짓밟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태도야말로 서로의 행복감을 높이는 길입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에서, 복두장은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목숨을 담보로 대숲에 발설합니다. 비밀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숨기고 싶은 임금님의 입장을 조금만이라도 헤아렸다면 대숲에 들어가 비밀을 발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비밀을 발설하고 싶은 자신의 입장, 그리고 대숲에 발설하면 비밀이 퍼져 나가지 않으리라고 여긴 자신만의 생각이 임금님의 입장과 처지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복두장이 ‘허구적 합의 효과’를 알았다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지녔을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목숨을 걸 필요도 없었고 타인의 신체 비밀이 퍼져나가지도 않았겠죠.      


  복두장과 달리, 여기 온 동네 사람들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 비밀을 묵묵히 지켜낸 우물이 있습니다. ‘이영광’ 시인의 ‘우물’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물은,

    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

    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이영광, ‘우물’     


  옛날에 마을마다 공동 우물이 있었습니다. 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통샘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공동 우물은 마을 사람들이 물을 긷기도 하고, 먹거리를 씻기도 하고, 길손이 목을 축여 가기 위해 잠시 머물기도 하는 곳입니다. 우물은 마을 아낙들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 사랑방이기도 하고,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욕할 수 있는 공개된 장소이기도 하고, 물 한 두레박을 들이켜며 답답한 가슴을 하소연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물은 개나리 처녀와 나무꾼 총각의 사랑 이야기가 남몰래 무르익던 곳이기도 합니다. 

  우물은 누가 우물에 대고 어떤 고함을 질렀는지, 누가 어떤 사연으로 눈물을 흘렸는지, 누가 어떤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누가 누구의 험담을 했는지,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죄다 알고 있습니다. 누가 우물을 긷다가 두레박을 빠뜨렸는지, 누가 긴 줄에 갈고리를 매달아 빠뜨린 두레박을 건졌는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물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대숲처럼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소문이라도 내면 온 동네 사람들의 비밀은 비밀이 아닌 게 됩니다. 그러나 우물은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물은 사람들 각각의 입장을 다 알기에 들어주기만 하고 비춰주기만 할 뿐, 비평도 평가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제 역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니 마을이 수백년 동안 평온하고 마을 사람들은 행복하게 우물을 공유하며 살았습니다.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태도가 서로의 행복감을 높이는 길인데, 상대의 ‘허구적 합의 효과’에 의한 발화에 상처를 입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요?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상처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상황과 생각을 분명히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철수 작가의 판화 ‘가난한 머루송이에게’의 ‘머루’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분명히 함으로써 상대의 ‘허구적 합의 효과’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탐스러운 열매를 품고 있는 포도가 열서너 개의 빈약한 머루알을 매달고 있는 머루에게 ‘겨우 요것 달았어?’라고 묻습니다. 머루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입니다. 머루는 ‘너는 땅도 비옥하고, 햇볕도 많이 받고, 너의 주인이 물도 많이 주지만, 나는 물도 없고 햇볕도 없는 척박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잖아. 날 무시하지 마!’라고 말하고 싶지만, ‘최선이었어요’라고 할 뿐입니다. 아마 머루는 척박한 땅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행복했었나 봅니다. 그러니 이런 초라한 결과에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에 포도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머루와 자신의 잘못을 수긍하고 사과하는 포도의 태도가 멋있지 않습니까? 

  누군가 잘못된 정보로 자신을 평가할 때, ‘머루’처럼 ‘최선이었다’고 떳떳하게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수용 여부는 상대에게 달려있지만, ‘허구적 합의 효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일깨워 줄 필요는 있습니다. 그래야 남의 생각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버릇, 다른 사람의 행복을 앗아가는 버릇을 조금이라도 고칠 수 있지 아니겠는지요.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말했지만 수용되지 않을 때라도 화내지 않는 것이 행복을 위한 길입니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남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존중해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아야 합니다. 화를 낼수록 그 화가 상대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기 때문이죠. 물론 남이 이런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공자(孔子) 정도의 내공이 쌓여야 합니다. 공자의 내공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전쟁이 그칠 날이 없는 춘추시대, 공자는 자신의 학설을 따르면 전쟁을 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런 이상을 펼칠 군주를 만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56세에 주유천하를 시작해 결국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하고 13년 만인 69세에 고국 노나라에 돌아와 공자학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합니다. 

  자신의 학문이, 자신의 사상이 수용되지 않았을 때 공자의 노여움은 어떠했겠습니까? 자신의 이상을 알아주는 군주만 있다면 전쟁의 시대를 평화의 시대로 바꿀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군주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공자의 허망함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공자는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을 때 노여움과 허망함을 경험했습니다. 13년이나 경험했죠. 그러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노여움과 허망함을 후학을 양성하는 에너지로 승화시켰습니다. 공자는 모든 것을 경험했기에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공자였기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역시 군자답지 않겠느냐?[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의 구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후학들은 공자를 군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부정의 노여움을 긍정의 에너지로 승화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모두를 행복의 문으로 향하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春雨如膏 行人惡其泥濘(춘우여고 행인오기니녕) 秋月揚輝 盜者憎其照鑑(추월양휘 도자증기조감)’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만물을 소생케 하는 봄비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짚신을 신은 행인들은 질퍽거리는 길을 싫어하기 때문이죠. 휘영청 밝은 가을 달도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둑은 그 밝음을 싫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입니다. 나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는 순간 잠자리를 안전한 장대 끝에서 억지로 끌어내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벼슬보다 자연이 좋은 허유와 소부를 진흙탕 벼슬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장대 끝이 좋은 사람은 장대 끝에서, 우물 안이 좋은 사람은 우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지요. 또한 ‘우물’처럼 상대의 허물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머루송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태도는 서로를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 아니겠는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