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욱, 『시로』
김유정(1908~1937) 작가의 <동백꽃>은 1930년대 농촌을 배경으로하는 우리나라 대표 소설입니다. 열일곱 살 청춘 남녀의 순박한 사랑 이야기가 해학적으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사랑 고백의 방법이 이색적입니다.
마름(지주의 대리인)의 딸인 ‘점순이’는 소작인의 아들인 ‘나’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습니다. 관심은 어느날 ‘점순이’가 ‘나’에게 구운 감자를 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점순이’는 ‘나’에게 감자를 주면서 “너 집엔 이거 없지?”라고 말하면서 줍니다. 감자를 주는 것은 마름의 지위를 과시하거나 소작인의 아들을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감자를 거절당했을 때 점순이의 표정이나 행동을 통해 볼 때 감자를 주는 행위는 사랑의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혀 알싸하고도 향긋한 냄새에 아찔함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도 감자를 준 것이 사랑의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먹거리가 부족한 봄에 귀한 감자를 특별히 너에게 준다는 보다 더 큰 의미의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감자를 거절합니다. 그 순간 점순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얼굴은 홍당무처럼 새빨개지며 급기야 눈물까지 흘립니다. ‘나’가 감자를 거절한 것을 ‘점순이’는 사랑 고백의 거절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점순이는 그 앙갚음으로 ‘나’의 닭을 괴롭힙니다. 씨암탉의 볼기짝을 쥐어박는가 하면 ‘우리’ 수탉과 자기네 수탉을 잡아다가 닭싸움을 붙이기도 합니다. 이런 앙갚음은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점순이’의 의도된 행동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수탉이 빈사지경에 이른 모습을 보이자 ‘나’는 지게막대기로 점순이네 수탉을 단매로 때려죽입니다. 그 순간 소작인의 지위마저 박탈되지나 않나 하는 불안감에 ‘나’는 ‘엉’ 울어버립니다.
이때 ‘점순이’가 다가와 “다음부터 안 그럴 테냐?”라고 묻습니다. 닭을 때려죽이지 않을 것을 묻는 것인지, 자기의 사랑 고백을 거절하지 않을 것을 묻는 것인지 영문도 모른 채 “그래!”라고 대답합니다. 이 순간 ‘점순이’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힙니다. 그때 ‘나’는 노란 동백꽃 향기와도 같은 이성에 대한 사랑의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런데 ‘점순이’는 ‘나’에게 감자를 주면서 왜 “너 집엔 이거 없지?”라고 말하면서 주었겠는지요? 그것은 감자를 주는 자체가 관심의 표현이고 그런 표현의 쑥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한 말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감자를 주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주는 것이기에 ‘나’도 당연히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점순이의 이런 생각이 심리학에서 ‘허구적 합의 효과’에 해당됩니다.
‘점순이’가 ‘허구적 합의 효과’를 미리 알았더라면, 소작인으로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의 약점을 자극하는 ‘너 집에 이거 없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겠지요. 오히려 ‘내가 먹어 보니까 감자가 맛있어서 가지고 왔어. 맛있는 것 먹을 때마다 네가 생각나. 한번 먹어봐.’라고 했겠지요. 그랬다면 점순이의 자존심은 조금 상할 테지만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이성에 눈뜨지 못한 ‘나’를 이성에 대한 사랑으로 이끄는 데 오히려 큰 역할을 했겠지요.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격양가(擊壤歌)’가 유행할 정도의 태평성대를 이룬 요임금은 왕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물색합니다.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후계자로 추천되었습니다. ‘허유’는 품행이나 지혜가 탁월한 현인(賢人)으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요임금은 허유를 찾아가 왕위를 맡아줄 것을 간청합니다. 허유는 거절합니다. 거절한 정도가 아니라 세속의 속된 말을 들었다며 영천이라는 계곡물에 귀를 씻었습니다. 여기에서 영천에서 귀를 씻다는 ‘영천세이’, 허유가 귀를 씻다는 ‘허유세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집니다.
소를 몰고 오던 허유의 친구 소부(巢父)는 속세의 속된 이야기를 들은 귀를 씻은 물은 소에게도 먹일 수 없다고 하면서 상류에 가서 소에게 물을 먹였다고 합니다. 소부가 소를 옮겼다고 해서 ‘소부천우(巢父遷牛)’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습니다. 허유와 소부는 자연 속에서 은거하는 삶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요임금은 허유와 같은 현인이 왕위를 이어간다면 자신이 이룩한 태평성태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간청하면 당연히 허유가 왕위를 수락할 것으로 생각했겠죠.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인 생각-‘허구적 합의 효과’에 해당합니다. 요임금은 사람의 생각이 다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나중에 요임금은 자신이 허구적 합의 효과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왕을 하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연을 벗삼아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임금은 허유의 가치관을 인정하고 허유에게 더 이상 후계자가 될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요임금의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요임금은 순(舜)을 찾아 왕위를 물려줍니다.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는 이렇게 완성됩니다.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라는 12수로 된 연시조를 남겼습니다. 그 10번째 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에 가던 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어디 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고
이제나 돌아왔으니 딴 데 마음 말리라
퇴계 선생은 학문이 취미였나 봅니다. 학문 수양에 전념하고 있는데 임금이 벼슬하라고 부릅니다. 아마 임금은 벼슬자리를 준다면 누구나 좋아한다고 생각했겠죠. 역시 자기중심적 생각인 ‘허구적 합의 효과’에 해당합니다. 퇴계는 억지로 몇 년 동안 벼슬길로 나갑니다. 그러다가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의 길로 왔습니다.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반대파를 모함하여서라도 벼슬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벼슬보다 공부가 좋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하상욱 시인의 『시로』라는 시집에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으로 무장된 사람들, ‘허구적 합의 효과’의 전형을 보여주는 시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너는 충고를 기분 나쁘게 듣더라
너는 기분 나쁘게 충고를 하더라
-하상욱, 『시로』에서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넌 왜 그래?
넌 왜 좋은 뜻을 그런 식으로 말해?
-하상욱, 『시로』에서
내가 이렇게 사과까지 하잖아
너는 사과까지 그렇게 하잖아
-하상욱, 『시로』에서
충고의 내용은 대개 부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허구적 합의 효과’에 사로잡혀 충고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친구에게 듣는 충고는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긍정적으로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나쁜 점을 들춰내어 충고하기보다는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하는 것이 우정도 높이고 친구의 선행도 높이는 길이 아니겠는지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너는 기분 나쁜 충고도 좋게 말하네!’, ‘좋게 받아들이더라도 기분 나쁜 충고는 하지 말아야 했는데!’의 자세가 어떻겠는지요.
사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과는 하는 사람의 입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면서 사과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는지요.
그러나 충고하고 사과하는 단계까지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충고나 사과는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충고하고 사과할 위치에 있지 않으면, 어쩌면 그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닌가 합니다.